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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살아간다
리즈 마빈 지음, 애니 데이비드슨 그림, 김현수 옮김 / 덴스토리(Denstory) / 2020년 9월
평점 :
품절
한동안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것 같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해야 개운하게 닦는 습관을 지녔음에도 이를 닦는 동안 얼굴이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을 만큼, 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못했다. 나를 들여다보려고 하질 않으니,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당최 그 이유를 알기도 힘들었다.
그러던 와중에 무심코 한 책에 손이 갔다. <나무처럼 살아간다>. 매번 느끼지만 내 무의식은 나에게 지금 뭐가 필요한지를 참 잘 안다. 내 의식은 바보처럼 허우적대고 있을 동안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나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버티며 계속 생존해야 한다. 이 책은 수억 년 전부터 살아오며 지구에 뿌리내린 이 적응의 귀재들이 가진 능력과 지혜를 정리해놓은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 마음은 휴식과 더불어 조용한 위로를 받았다. 정갈하게 그린 나무 그림과 자연스럽게 꾸민 텍스트의 색깔들, 그리고 나무들의 이야기가 나를 편안하고 소소한 즐거움에 빠지게 했다. 누드 제본된 책은 이 책으로 처음 접했는데, 스프링 제본된 책처럼 책이 잘 펼쳐져서 좋았다. 제본에 쓰인 초록색 실과 마주칠 때마다 마음은 왜 그리 차분해지던지.

나무는 (중략) 우주가 무엇을 던져주든 받아들이면서
예상치 못한 일에 적응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나무는 무척 유연한 존재로 진화해왔다.
- 본서 55쪽 -
나무로부터 배울 수 있는 큰 교훈 중 하나는
삶에서 벌어지는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모든 현상을 받아들이고
어울려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본서 107쪽 -
'스코틀랜드 소나무'는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1만 년 이상 굳건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서 있다. 수천 년 동안 자기 모습을 온전히 지키며 그 자리에 꿋꿋이 서 있는 '서어나무'처럼 말이다. 이 두 나무는 온전히 나다운 게 무엇이며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게 어떤 건지를 잘 보여준다.
'검은호두나무'의 심재(나무 몸통의 중심부)는 어마어마한 힘에도 훼손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마치 내면의 힘을 잘 기른 사람처럼.
뉴칼레도니아에 사는 '세브 블뢰'는 바꿀 수 없는 척박한 주변 환경을 놀라운 방법으로 감당한다. 토양 속에 니켈 농도가 높은 뉴칼레도니아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구연산을 활용해 니켈을 수액에 아주 안전하게 저장한 것이다. 세브 블뢰의 아름다운 파란색 수액은 어쩔 수 없는 건 받아들여야 함을 일깨워주는 적절한 수용적 자세의 상징과도 같다.
'구아레아'는 열대 폭풍에 쓰러져 넘어져도 포기하지 않는다. 누운 상태에서 새로운 싹을 틔운 후 품고 있는 식량과 수분을 싹에 공급한다. 구아레아의 이 끈질긴 생명력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과 긍정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이뿐만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시나무'와 '미송', '사탕단풍', '연필향나무'. 그리고 봄이면 만개하는 '왕벚나무'와 해마다 2주간 벚꽃 개화와 비슷한 시기에 '심장이 터지도록' 꽃을 활짝 피우는 '라일락'은 행복은 선택하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온몸으로 말해준다.
책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나무들과 내용을 위에 몇 개 나열해봤는데, 이외에도 소개하고픈 나무가 많지만 내용이 더 길어질 것 같아 줄였다(그렇다, 줄인 게 이 정도다).

다양한 방법과 모습으로 환경에 적응한 나무들이 가진 지혜를 읽으며, 한동안 내가 왜 나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이 고마웠다.
예측불가능한 이 고단한 삶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삶을 계획하며 살아가는 '맹그로브'의 능력을 닮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에게 주어진 어려움을 정면 돌파하며 극복해가는 수많은 나무처럼 나도 그렇게 용감해지고 싶고, 의연해지고 싶다. 책 속 '황연목' 편에 적힌 말마따나, "나무들처럼 우리도 가장 어려운 시기를 건강하게 버틸 수 있는 방법들을 개발해나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