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고코로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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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에 대한, 살인자에 대한 생각은 아무런 저항 없이 당연히 ~, 마땅히 ~라는 부사어구가 동반된 '혐오'를 바탕으로 한 생각을 하게 된다. 보통은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누마타 마호카루의 <유리고코로>는 나의 이런 도덕적 통념을 배신한 책이자, 뭐랄까? 참으로 낯선 경험을 하게 해 준 작품이다. 살인이라는 파란색의 서늘하고 차가운 색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빨간색의 따뜻한 온기와 사랑이 잠식해 들어가는 것을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는 느낌... 이랄까? 일본에서 '누마타 붐'을 일으킨 작가답게 그저, 이 또한 작가의 역량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애견숍을 운영하는 료스케에게 잇단 불행이 닥친다. 연인 지에의 실종, 아버지의 췌장암 말기 판정, 어머니의 교통사망사고까지. 아버지는 죽음의 순간을 묵묵히 기다리며 모든 치료와 수술을 거부한 채 홀로 집에 칩거하고 있다. 그런 아버지를 뵙기 위해 찾아 간 어느 날, 료스케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검은 머리카락이 담긴 어딘가 낯익은 핸드백과 노트 4권을 발견하게 된다. 순간, 문득 떠오른 누군가의 모습. 표정을 알 수 없는 희미한 얼굴에 원피스를 입고 핸드백을 든 여인... 그녀는 누구일까? 그리고 또다시 떠오른 유년의 기억. 한 차례 폐렴으로 병원에서 입원치료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에게 느낀 낯선 감정. 엄마가 바뀌었다는, 아이로서의 본능적이면서도 혼란스러웠던 기억. 유년의 기억이라 불확실할 수도 있지만, 료스케는 어쩐지 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생각 끝에 펼쳐 든 노트를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는데, 누군가의 일기인 것 같지만 내용이... 몹시 당혹스럽다. 그것은 평범한 일기가 아닌, 누군가의 살인수기였던 것이다.


수기 속 화자는 어릴 때 정신질환을 앓았고, 엄마와 함께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가 엄마에게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사람이라면 있어야 할 '유리고코로'가 그 자신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때 의사가 했던 말은 '요리도코로'로 즉 인식, 감각 혹은 마음의 안식처를 뜻하는 것으로 그 자신이 잘못 들었던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수기 속 화자는 자신에겐 없는 심리적 안정기제를 계속 '유리고코로'로 명명한다. 화자가 처음 살인을 시작하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그 '우연한 살인'을 통해 화자는 자신에겐 없다고 생각했던 심리적 안정기제를 발견하게 된다. 타인의 죽음이 만들어내는 고요함이 불안정하고 소란스럽던 자신의 마음에 평안한 안정감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계속되는 살인의 여정. 료스케는 도대체 왜 아버지가 이런 살인수기를 간직하고 있는지 의문이 듦과 동시에 수기 속 화자도 누군지 궁금하기만 한데... 혹시 아버지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쓴 소설?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어머니? 이도 아니면 바뀌기 전의 어머니일까? 료스케는 혼란과 복잡한 심경 속에서, 그저 막연히 이 수기가 자신과 관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미치루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늘 제 주위에 있던 그 불쾌한 느낌은
완전히 가라앉고 정원 안의 나무도 돌도 하늘도 그 너머에

펼쳐진 세계도 청결한 느낌으로 빛났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불가사의한 직감이 들었습니다.
진정한 세계의 한가운데 제가 서 있는 게 기적처럼 생각되었습니다. - 36page


<유리고코로>는 제 속에서, 저만의 언어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니까요.
정정할 수도 없고, 이제 어찌할 도리도 없습니다.
그것은 평소의 제게 부족한 모든 것, 말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누군가의 목숨이 사라질 때 생기는, 그 믿을 수 없는 현상을 나타내는 데
그보다 좋은 단어가 있을까요. - 49page
 

<유리고코로>는 수기 속 '과거 이야기'와 료스케의 '현재 이야기'를 오가며 진행된다. 수기 속 화자의 살인 여정은 선혈이 낭자하거나 잔인하진 않지만, 차분하면서도 담담한 고백체의 문장은 어딘가 서늘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엔 살인자라는 사실을 잊은 채 수기 속 이야기에 연민과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게 되니 나 자신의, 감정의 저항에 무너질 수밖에. 끊임없이 '유리고코로'를 얻기 위해 살인이라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던 수기 속 화자. 결국 가족들에겐 감당할 수 없는 짐이 되고, 그 자신조차도 용서할 수 없는 삶의 나락으로 몸을 내던진다. 그러던 어느 날 길 끝에서 만난 한 사람. 수기 속 화자는 그 만남 이후 더 이상의 살인을 하지 않게 된다. 한편 료스케는 동생 요헤이의 도움을 받아 가며 수기 속 화자가 누군인지 추적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소설 속에서 '추리적인 요소'로서 빛을 발한다. 수기 속 화자가 '한 사람'을 통해 더 이상의 살인을 하지 않게 된 반면, 료스케는 사랑하는 '한 사람' 지에를 지키기위해 '살인'을 시작하려 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살인이라는 연으로 얽히고 설킨 료스케와 수기 속의 화자. 그 깊이를 감당할 수 없는 연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는 차후 아버지의 충격적 고백 속에서 진실을 드러낸다. 

전쟁으로 황폐화 된 산과 들에도 꽃은 피듯이 삶의 잔혹하고, 음침한 나락 속에서도 사랑은 존재한다. <유리고코로>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사랑이라는, 어쩌면 참 진부하고 흔한 말이지만, 사랑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고귀함과 포용력을 알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소설 곳곳에 드리운 가족간의 따뜻한 유대감도 느끼게 해 준... 독특하면서도 기묘한,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ps. 마지막 장에선 쓸데없이(?) 펑펑 울었다지.


그것이 아버지와의 이별이었다.
창문은 아직 내려져 있었지만, 그 순간에 아버지는 모든 얽매임을 끊어낸 것처럼 여겨졌다.

계속 살고 싶다는 마지막 미련을 끊어내고, 익숙한 장소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끊어내고, 우리에 대한 마음조차 끊어낸

아버지는 두 사람과 둘만의 추억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다시 한 번 ......의, 어머니의 당신이 되었다. - 32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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