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아래서 기다릴게
아야세 마루 지음, 이연재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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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가득 메운 벚꽃 무리, 그 벚나무 아래를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던 순간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하얗게 반짝이는 작은 꽃송이들을 숨죽여 바라보곤 했었는데. 이젠 연초록 새싹을 틔워낸 벚나무들. 아쉽지만, 찰나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펼쳐든 아야세 마루의 <벚꽃 아래서 기다릴게>. 읽는 내내 봄의 싱그런 향기가 나고, 머리 위에선 꽃잎이 바람에 흩날려 떨어졌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찾아오면 꽃을 찾아 여행을 시작하는 나비처럼 어디론가 떠나고픈 마음이 든다. <벚꽃 아래서 기다릴게>속의 다섯 가지 이야기도 신칸센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향기롭게 그려진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곳은 일본 토호쿠 지방이다. 도쿄 위쪽, 일본 동북부 지역으로 신칸센 노선도를 따라가면 <우츠노미야>, <후쿠시마>, <센다이>, <하나마키>가 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다른 지역들에 비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해졌지만, 사고 이전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으며 누군가에겐 여전히 소중하고 아름다운 고향이자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다. 벚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나츠이의 센본자쿠라>, 옛 지방 영주의 묘지인 <즈이호우덴>, <호빵맨 박물관>, 미야자와 켄지를 기념하는 <동화마을> 등등. 책 속에 등장하는 이곳들을 각 이야기 속 주인공들과 함께 떠난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직접 가보고 싶어졌다. :)


첫 번째 이야기 <목향장미 무늬 원피스>. 토모야는 <우츠노미야>에 살고 계신 할머니를 만나러 간다. 일찍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홀로 지냈던 할머니에게 뒤늦게 찾아온 두 번째 사랑. 예쁘다는 말에 소녀처럼 얼굴이 빨개졌던 할머니. 그 사람을 따라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 했을 때 가족들은 찬성과 반대로 다툼이 심했는데, 결국 반대를 무릅쓰고 낯설지만 이곳에 정착한 할머니. 그럴 용기가 어디서 났을까? 궁금하기만 한 토모야에게 할머니의 한 마디는 마음속에 잔잔한 울림을 준다. "새로 산 예쁜 원피스를 입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거, 오랫동안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단다." 어느 순간 자식에 대한 부모님의 뒤치다꺼리를 당연시했다. 부모라는 단어는 희생의 또 다른 말인 것처럼. 새로 산 나의 옷을 당신의 몸에 대면서 아이처럼 좋아했던 엄마. 그 시절 나는 나 자신을 꾸미기에만 급급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엄마를 위해 예쁜 원피스 한 벌 사준적이 없었다. 이제와 후회하고 눈물 흘려도 예쁜 원피스를 입을 엄마는 없다. 사랑받고 싶고, 예뻐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

'사방을 둘러싼 봄의 산이 부드럽게 자신을 향해 흘러오고 있었다.

다리 건너편은 꽃이 핀 화창한 공원이었다.

토모야는 발길을 되돌려 이제 막 건너온 다리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푸른 산을 등지고 있는 듯 보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노란 꽃이 그려진 원피스가 팔랑거렸다.'


두 번째 이야기 <탱자 향기가 풍기다>. 약혼자인 유키토와 함께 그의 부모님을 뵈러 <후쿠시마>로 떠나는 리츠코. 원전사고가 났던 곳이라 그들의 삶은 어떨까? 걱정과 두려움이 앞선다. 대화를 나눌 때에도 미리 공부해 간 방사능 수치에 대해 얘기하지만, 어딘가 가라앉은 분위기이다. 생선초밥을 먹을 때에도 주저하게 되는 리츠코. 그러다 집안 어딘가에서 부드러운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집 뒤편 산울타리에 하얀색 꽃이 피는 탱자 향이다. 매스컴을 통해 듣는 후쿠시마의 안 좋은 소식들과는 대조적으로 유키토의 가족은 탱자 향이 가득한 평온한 일상을 살아간다. 관광명소 이야기를 할 때 어제보단 한결 밝아진 분위기를 보면, 그녀 혼자 너무 의식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이번 유키토네 집에 가 보니......... 뭐랄까,

다들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고, 상냥하고,그러면서도

우리 일가친적들과 마찬가지로 귀찮은 부분도 있는 거야. 그게 당연한 거지만.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후쿠시마의 피해자들'같은

이상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어."

세 번째 이야기 <유채꽃의 집>. 어머니의 기일에 맞춰 고향을 방문한 타케후미. 한때 어머니가 살았던 집이지만, 이제는 큰형 부부가 살고 있다. 어머니가 가꾸었던 일본식 정원은 형수의 손길로 유채꽃 밭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조금씩 변하듯, 자신의 기대대로 어머니가 변할 줄 알았는데 그전에 돌아가실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래된 마을 풍경과 마찬가지로 어머니 또한 흘러 지나갔다. 화해도 결론도 없는 희미한 혼란만을 남기고. 어머니 살아생전 느꼈던 감정과 기억들을 떠올리는 타케후미. 진정 어머니가 무엇을 원했는지, 무엇에 힘들어했는지 이해하려 하기보단 귀찮아하고, 피하기만 했던 자신이다. '어머니'니까 당연시했던 것들...

 

'어머니도 불단 위에서 시들어 버린 동백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것을 먹었음에 틀림없다.

앞으로도 우리 가족은 이런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미워하기를 반복해 가리라.

언젠가 열반의 길에 들어 만날 때까지'

 

 

 

네 번째 이야기 <백목련 질 때>. 함께 어울렸던 학교 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마음속에 큰 상처와 두려움을 갖게 된 초등학생 치사토의 이야기. 어린 치사토의 심리묘사가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며,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꿈, 환생과 같은 환상적인 요소가 가미된 작품이다. 어린 나이에 겪은 누군가의 죽음은 슬픔과 아픔보단 어쩌면 큰 트라우마를 동반한 두려움이 더 클지 모른다. <치사토는 사실 자신이 미도리의 아픔을 위로하고 있는 게 아니라, 미도리처럼 되어 버리면 어쩌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치사토가 꾸는 꿈속 다양한 생물로 태어나길 반복하는데, 이는 두려움에 맞설 수 있는 좀 더 강한 생물로 태어나길 갈망하는 치사토의 내면을 반영한 것이리라. 피어 있는 시간이 짧아 더 소중하단 백목련을 좋아한다는 할머니, 부모님과 함께 방문한 동화마을, 그곳에서 어머니가 읽어준 여동생의 죽음을 기리며 썼다는 켄지의<영결의 아침>이라는 시를 통해 치사토는 조금씩 마음 속 상처와 두려움을 극복해 간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꽃 백목련의 모습에서, 무섭고 두려운 상황 속에서도 눈앞의 반짝임을 절대 놓치지 않고 확실히 붙잡아 끌어안은 켄지의 시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이야기, 책의 제목이기도 한 <벚꽃 아래서 기다릴게>. 앞서 네 편의 이야기 속에 잠깐씩 등장한 신칸센 차내 판매원 사쿠라의 이야기다. 어렸을 적 늘 다투던 부모님. 불안한 환경속에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사쿠라와 남동생 슈지. 급기야 성인이 되자마자 이혼한 부모님. 사쿠라 그녀에겐 따뜻한 가정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신칸센 열차를 타고 고향을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과 모습들을 보며, 그들의 고향에 대해, 가정에 대해 상상하면서, 그녀 자신이 꿈꾸던 이상적인 가정을 그려볼 뿐이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는 슈지 또한 불행한 가정사로 인해 그 자신이 따뜻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지 두려워하는데, 그런 슈지에게 사쿠라는 말한다.


"내가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보다는, 편안하게 해 줄 테니

누군가가 돌아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어.

저 먼 곳에서 신칸센을 타고 와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발견한 예쁜 것을 함께 보고 즐겨 주었으면 좋겟어.

그런 걸 해 보고 싶어서 가족이 가지고 싶은 걸지도 몰라."


 

 


책도 얇고 이야기는 길지 않았지만 긴 호흡으로 읽어나간 <벚꽃 아래서 기다릴게>. 다섯 편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처음 벚꽃이 만개했을 때 느꼈던 소소한 감동이 가득 차올랐다. 특별할 것 없는, 열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그들의 섬세한 감정선에 닿아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열차 창밖으로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들은 복잡한 도심 속 빌딩에 가려 보지 못했던 것들로, 지금 당장이라도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지금은 벚꽃이 지고 없지만 순간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다시 돌아올 벚꽃의 계절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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