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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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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에서 출간되고 있는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를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이장욱 작가님의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작품이다. 두꺼운 하드 커버지에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표지에 이끌려 읽게 되었는데 내용도 참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접하게 된 정세랑 작가님의 <보건교사 안은영>. 제목만 보면 도대체 어떤 내용의 소설일까? 싶을 정도로 독특한데, 표지 또한 귀여운 듯 섬뜩한 느낌이 공존하는 것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결국 읽게 되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총 10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있으며, 안은영은 제목 그대로 M고등학교의 보건교사이자 퇴마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데, 오! 개인적으로 이런 소재들을 큰 거부감 없이 좋아하는 편이라 문득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이우혁 작가님의 <퇴마록>이 생각나기도 했다. 뭔가 한국괴담과 어우러진 진중하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지는 스토리와, 악에 맞서 싸우는 퇴마사의 활약을 기대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엇! 뭐지? 다소 가볍고 엉뚱하면서도 약간은 유치한 듯 느껴지는 이 분위기는? 뭔가 불안하다. 불안해. 그도 그럴 것이 안은영 그녀가 사용하는 무기가 <비비탄 총>과 <플라스틱 장난감 칼>이다. 일단 여기서 1차 멘붕. (물론 아이들 장난감 같은 이 무기로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기들에 그녀 나름의 힘이랄 수 있는 어떤 '기'를 주입해서 싸우긴 하지만 말이다.) 책 구입 시 미처 확인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앞표지에 너무 집중했나 보다.) 책 뒤표지의 소개 글을 읽어보니 <본격 학원 명랑 미스터리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이라고 떡하니 쓰여있는 것이 아닌가. 아... 내가 생각했던 느낌의 책이 아니구나 싶었지만 일단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첫 에피소드는 학교 지하에 봉인되어있던 압지석(壓池石)의 봉인이 해제되면서 거대한 잉어같은 생물이 학생들을 위협하는 장면인데, 보건교사 안은영이 그 생물을 퇴치하고, 학생들을 구하는 내용이다. 이때 그녀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이 있는데, 같은 학교 한문교사이자 설립자의 손자인 홍인표이다. 어렸을 적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긴하지만, 안은영은 홍인표 주변에 보호막 같은 거대한 아우라가 형성되어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의 손을 잡는 것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한다. 이런 스킨십 덕분일까? 보건교사 안은영과 한문교사 홍인표는 썸을 타는 사이가 된다.
'꼭 죽은 사람들만 보는 건 아니었다. 산 사람들이 더 기분 나쁜 걸 많이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이 학교 떠다니는, 공기 가득한 나체의 환영들 같은 것 말이다. 아아, 사춘기 애들은 정말 싫어. 은영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깔때기 칼로 휙휙, 아이들의 야한 상상을 휘저어 없앴다. 벌써부터 취향이 가지가지기도 하지. 그러니까 결국 은영이 보는 것은 일종의 엑토플라즘,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하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들의 응집체다.' - 14page
'해가 갈수록 더 느끼는 점이지만 사람이 직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직업이 사람을 고르는 것 같다. 사명같은 단어를 기본적으로 좋아하지 않으므로 수긍하고 받아들였다기보단 수월한 인생을 사는 걸 일찌감치 포기했다는 게 맞겠다. 병원에 있을 때는 힘든 파트만 다녀서 지금보다도 더 너덜너덜했다. 몇 년쯤 하고 나니 새벽의 병원 복도에서 기나긴 싸움을 하는 게 박찼다. 그래서 대학 때 따 놓은 보건교사 자격증을 활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호러와 에로 중에 고르라면, 단연 에로다.' - 15page
학원 명랑물이라 그런가? 사춘기 아이들이 내뿜는 정제되지 않은 기운들을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는 에로에로 에너지로 표현하고 있다. 정세랑 작가의 표현력과 발상엔 나름 감탄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있었던 사춘기 시절. (하..까마득하구나..벌써 ㅠ) 남녀공학이라 가까이서 남학생들을 상대할 수 있었는데, 한바탕 체육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몰려드는 남학생들의 몸에 밴 찐득찐득한 땀 냄새가 교실을 가득 채웠고, 이에 질세라 터지듯 발설되는 음담패설까지 숨 막히도록 어질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했던 남학생에 대해선 나름의 환상을 품기도 했었던 그 시절.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들의 이런 질척질척한 에로에로 에너지를 싫어하면서도 보건실로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서슴없는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느낌의 책은 아니었지만 분명 정세랑 작가만의 유쾌하고 쾌활한 분위기가 있는 책이다. 소재 하나하나가 독특하고 신선하다. 다만 읽으면서 뭔가 살갗을 간지럽히는 미묘한 느낌과 함께 좀처럼 이 소설 속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 수 없었던 건 내 개인적인 성향과 취향 때문이겠지.
일단 가장 아쉬웠던 것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보여주었던 약간의 궁금증과 긴장감이 (스케일 면에서도) 뒤로 갈수록 점점 힘이 빠진다는 것이다. 알록달록하고 팽팽한 풍선 하나를 손에 들고 걷고 있는데, 점점 바람이 빠지면서 그 형태를 잃어버리는 느낌이랄까? 물론 커다란 사건 뒤엔 조금은 일상적이고 가벼운 이야기들로 호흡을 변화시켜준다는 점에선 괜찮을 수도 있겠으나, 개인적으론 보건교사 안은영과 홍인표의 활약을 더 기대했던 터라 실망도 컸던 것 같다. <오리 선생 한아름>, <레이디버그 레이디>, <온건 교사 박대흥> 등의 에피소드에선 보건교사 안은영이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한다 하더라도 큰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다. <레이디버그 레이디>에선 뭔가 엄청난 존재와의 조우를 기대했던 나에겐 다소 실망적이었다. (그동안 스릴 넘치고 자극적인 것들을 읽다 보니 그럴 수도 ㅋ) 뭔가 나타날 듯, 보일 듯 떡밥을 던져주긴 하지만 결국,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의뢰인 본인 마음의 병이었던 것으로 결론이 나버려서, 긴장감에 흘렸던 땀들이 예기치 않은 강력한 바람에 의해 증발하듯 허무하고도 서늘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전학생 옴>에피소드의 주인공 백혜민이 옴잡이라는 설정은 독특하고 다소 충격적이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옴을 먹고 사명을 다하면 때이른 죽음을 맞이하여 환생하는 존재, 옴잡이. <온건 교사 박대흥>에피소드는 앞서 말했듯 안은영이 등장하진 않지만 지금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는 국정교과서와 관련된 에피소드로 나름 의미 있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교사 본연의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선택이 아닌, 기득층의 정당성을 부여할 목적으로 편찬되고 집필된, 즉 국민을 기만하는 정치적 판단을 강요하는 선택에 있어서 작가 정세랑은 <박대흥>이라는 캐릭터를 내세워 주술적인 방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그들을 교장에게 보내버리는 ㅋ : 이 부분은 정말 읽어봐야 함)
아쉬움을 간직한 상태로 마지막 장을 덮고, <작가의 말>부분을 읽었는데, 이 말을 읽는 순간 소설 전체에서 내내 내가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뭐랄까? 괜히 작가에게 무례하게 군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면서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그래 쾌감, 어쩔 땐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긴장감이나, 진중함이라는 무게를 걷어내고 가볍게, 유쾌하게, 유치하게 굴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너무 무겁게만 소설을 대하려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작가님께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흰 옷자락이 펄럭일 때는 잠시 흠칫했지만, 손전등을 들고 춤을 추고 있었던 건 보건 선생이었다. 한 손에는 손전등, 한손에는 웬 무지개 색 깔때기를 들고 허공을 정신없이 휘젓고 있었다. - 24page
그리고 철망에 붙어 선 보건 교사는 뭔가를 향해 장난감 총을 격하게 쏘고 있었다. 인표가 서둘러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비비탄 총에 어울리지 않는 격발음이 들리긴 했다. "이 못생긴 새끼, 죽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 36~37page
나에게 2차 멘붕을 안겨주었던 <보건교사 안은영>의 전투씬인데 <작가의 말>을 읽기 전까진 눈살을 찌푸리고 읽었었는데, 다시금 읽어보니 웃음이 날 정도로 안은영 그녀가 사랑스럽기도 했다. 상상 속이긴 하지만 내가 안은영이 되어 에로에로 에너지를 끊임없이 발산하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비비탄 총>을 연신 쏘아대거나 (반동으로 어정쩡한 스쿼트 자세가 되기도 하고 ㅋ) <장난감 칼>을 미친 듯이 휘두르는 모습을 그려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날은 화창했고, 푸른 하늘 끝 그 어딘가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했던 사춘기 시절의 내 모습이 얼핏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