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이재익 지음 / 답(도서출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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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 친구와 함께 길을 걷다, 길을 잃어버려 잘못 들어서게 된 대전의 어느 골목길.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지 얼마 안 되었던 나에게 그 골목길의 풍경은 참으로 생경했다. 붉은 조명등 아래 투명한 유리창을 전경으로 누군가를 기다리듯 일렬로 앉아 있는 여성들의 모습. 그러면서도 어딘가 낯익듯한 풍경, 어디서 봤더라? 그래! 내가 아는 유일한, 머릿속에 바로 떠오른 풍경은 정육점이었다. 아, 이곳이 말로만 듣던 홍등가구나. 도시의 두 얼굴이자, 인간의 욕망이 어둠처럼 흐르는 홍등가 뒷골목의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난 여자임;) 내가 알고 있던 도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꽤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난다.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꽤나 보수적이다. 특히 性과 관련된 부분에선 더더욱.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돈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몸을 뭇 남성들에게 판다는 행위 자체를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것이 현재 솔직한 내 마음이기도 하다. 물론 어느 것에나 예외는 있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어쩔 수 없이 이런 시련을 당해야 했던 여성들의 경우 말이다. 가깝게는 일본군에 의해 희생당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렇고, 지금은 조금 덜 할지 모르겠지만 인신매매로 강제로 사창가에 끌려가 도망치지도 못하게 막대한 빚을 지게하고, 몸을 팔게 했던, 여성들의 기구한 삶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이런 경우들은 물론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페이지 터너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이재익 작가의 소설 <영등포>는 이런저런 사연들을 간직한 채 영등포 뒷골목으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영등포>라는 공간 자체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영등포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거대 쇼핑몰 타임 스퀘어, 도시에 어둠이 내리면 화려한 불빛은 잠을 깨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영등포 뒷골목 또한, 또 다른 양상으로 불을 밝힌다. <초대형 쇼핑몰은 세련된 디자인과 조명을 뽐내고 있는데 등을 맞댄 사창가의 모습은 20년 전 미아리 골목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기괴했다. 수십 년 세월의 간극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은 채로 공존하고 있다니. 한쪽은 극도의 안온함, 다른 한쪽은 극도의 음험함.<25페이지>> 영등포 뒷골목에서는 모든 사람을 네 개의 이름으로 부른다.  일을 하면 아가씨. 일을 도와주는 여자는 이모. 일을 도와주는 남자는 삼촌​. 이곳을 방문하는 남자 손님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오빠. 이것이 영등포 뒷골목, 나름의 규칙이자 생리이다.

​소설 <영등포>의 시작은, 비 오는 어느 날 영등포 뒷골목에서도 사람 좋은 '삼촌'이라 불렸던 '도영철'이 배 밖으로 창자가 흘러나온 상태로 잔인하게 살해된 채 발견된 장면이다. 경찰은 '도영철'이 잔인하게 살해된 점을 미루어 깊은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사건으로 보고 영등포 뒷골목 관계자들을 상대로 수사를 시작한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구형사는 당시 목격자였던 아가씨 미선을 만나 상황을 전해 들으며, 그녀에게 남모를 연민의 정을 느낀다. 삼촌 '도영철'이 관리했던 업소의 주인이자 '미선'의 포주인 '도영희', 또 다른 삼촌 '상태', '바보 민식이 삼촌', '조폭 출신 어린 삼촌' 등을 찾아가 탐문수사를 벌이는 구형사. 얼마 후, 아파트 자택에서 이남순이라는 할머니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목이 졸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알고 보니 이남순 그녀 역시, 한때 영등포 뒷골목 포주로서 많은 업소들을 거느렸었고, 이때 벌었던 돈으로 부동산 투자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도영철'이 살해당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살해당할 당시에도 비가 오고 있었고, 영등포 뒷골목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나돈다. 비 오는 날 삼촌이 살해당했고, 이모가 살해당했다. 그다음 차례는 아가씨? 그간의 상황과 수사를 토대로 범인은 '영등포 뒷골목'의 생리와 지리를 잘 아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으나, 잠정적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들의 알리바이가 너무도 명백한 상황이라 수사는 난항을 겪는다.  

'도영철'과 '이남순'의 연결고리를 찾던 구형사는 '도영희'를 통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도영철'과 '이남순'이 영등포 뒷골목으로 흘러들어 오기 전 청량리 588에서 함께 일했었고, 인신매매를 했었다는 사실과 그 첫 피해자가 바로 자신, '도영희'였다는 이야기. <도영철이 살해당했을 때 도영희가 보인 미묘한 반응도 그런 기괴한 관계의 반증이었으리라. 처음엔 인생을 망친 원수였다가 한 식구가 되었다가 동료로 변한 관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재료의 맛하고는 전혀 달라진 술처럼, 골목에서 발효되어 버린 관계 <74페이지> 그렇다면 범인은 '도영희'인가?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거구의 '도영철'을 죽일 수 있을까? 그런 와중에 세 번째 희생자가 나타난다. 복부에 칼이 찔리고, 성기가 잘린 채 살해 당한 남자, 영등포 뒷골목의 오빠로 불리는 중년의 남자 손님. 범인의 윤곽은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가고, 급기야 미선이 '범인에게 납치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게 되는데...'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구형사. 과연 그녀도 구하고 범인도 잡을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성매매 여성'에 대해 안 좋은 시각을 갖고 있었던 나조차도 미선의 속사성을 알고 나니, 그녀가 무사하길 바랐다. 제발 조금만 버텨주기를, 제발.

​PS : 타임스퀘어가 생긴 지 5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영등포 뒷골목에서는 밤마다 붉은 불이 켜지고 20년, 30년 전의 방식 그대로 성매매가 이루어집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낡은 집집마다 질기디질긴 밤이 되풀이되는 것이지요. 이곳이 사라지기 전에 책을 내고 싶었다던 작가님의 말씀. 소설 <영등포>를 통해 어떤 감동과 주제의식을 느끼기보단, 그저 재미있게 이야기를 썼고, 독자들 역시 그저 재미있게 읽어주었으면 했다는 작가님의 말씀. 때문에 나 역시 구구절절 어떤 주제의식에 대해선 말하지 않으리라. 그저 삶의 또 다른 음지에서 질기디질기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기억하는 것으로 서평을 마치겠다.  

<책 속 밑줄>

몇 번이나 들락거렸던 골목이지만 오늘따라 왠지 들어가기가 내키지 않았다. 빗줄기 속으로 뿌옇게 번져있는 붉은빛이 몸에 묻어서 뭔가를 오염시킬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골목 사람들의 질척이는 인생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인신매매로 끌려와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창녀로 살다가 업주가 된 여인. 조직에서 밀려나 업소를 맡은 어린 조폭,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알 수도 없는 동네 바보, 그리고 아내의 손을 닮은 그녀까지. 구형사의 걸음걸음에 골목 사람들의 얼굴이 밟혔다. <10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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