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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바다
김재희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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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소생하는... 그해 봄날, 나는 살인자의
'누나'가 되어 있었다. 나, 희영에게 그해 봄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파스텔 톤의 투명한 제주 앞바다를 연상케 하는 표지 속 한
소년의 뒷모습은 그해 봄 '진실이란 것'을 유리어항 속에 감춰 둔 것처럼 보였다. 보이지만 외면해 버리는 것, 깨진 유리 조각에 마음이 베여
아픈 것, 가냘프고 처연한 것. 어항 속 '진실'은 그렇게 부유하는 듯했다. 2014년 6월 16일 희영은 제주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날로부터 10년 만이었다. 2004년 6월 희영의 동생 '준수'는 살해 용의자가 되어 체포되었다. 집 앞에
몰려든 사람들, 경찰들, 신경을 울리는 사이렌 소리. 모든 것이 현실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같았던 그날, 희영과 그녀의 엄마 김순자의 가슴에
새겨진 것은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이었다. 그만큼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른 가족을 두고 있다는 것은
천형처럼 희영과 김순자를 옭아매고 붙들어 버렸다. <p74> 그 후 동생 준수는 구치소에서 목을 메
자살했다. 그 전날 희영에게 자신의 결백을 고백한 후에... 그의 나이 17세였다. 그런 희영에게 제주도는 가슴
시린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기억하고 싶지 않았지만 잊히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한담해변가의 녹색 물빛, 새별 오름의 푸르뎅뎅한 풀빛과 억새풀이 바람에 잔잔하게 나부끼는
모습, 그리고 말들이 목초를 뜯어 먹는 모습들. 건초더미에서 나는 마른 냄새, 각종 잡풀들에서 나는 생생한 풀내음은 여전히 코밑을 근질거리면서 기억을 더듬게 했다. 제주의 사람은 잊었지만 제주의
풍광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p83> 눈을 감기 전 엄마는 희영에게 준수의 결백을 부탁했다. 10년이란 세월 동안
아들의 결백을 주장하며 홀로 싸웠던 엄마였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게시글 하나. 2004년도 살인 사건과 2014년 새롭게 발생한 살인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한 글이었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두 사건은 같은 장소, 비슷한 범행 수법 등을
근거로 연쇄 살인 사건임을 암시함과 동시에 유력한 용의자로 바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 오영상을 지목하고 있었다.
2014년 6월 16일 희영은 '진실'을 찾기 위해
그렇게 제주도, 바다 게스트 하우스로 떠난 것이다. 도망치듯 제주도를 떠난 후 10년이란 세월을 살아가면서 희영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인터넷상에서 무분별하게 떠돌던 가족사진. '살인자의 가족',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은 희영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쉬이 들어갈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외롭고, 아프고 힘든 시간들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바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현우'는
유일하게 자신의 아픔과 속마음을 내비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어떻게도 위로가 안 되겠지만, 불행이 있고 나서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영적인 성숙과 더불어 인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대요."<p114> 어두운 터널 속에 갇혀 방향감각과 판단 능력을 상실한 체
오로지 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빛만을 의지하며 걷고 있던 희영에게 '현우'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불어 넣어 준다. 홀로 오영상 주변을 조사하던
희영은 결국 현우의 도움을 받으며 함께 사건을 추적해 나간다. 그리고...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밝혀지는 비밀을 마주한 순간! 깨진 유리어항 조각에 베인 상처를 보게
될 것이다. 후회와 외면했던 시간들의 아픔을 동반한 선연한 핏빛 물방울.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을 보인 건 김재희 작가님의
이번 작품 <봄날의 바다>가 처음인 것 같다. 주인공 희영의 시선을 좇아 나 역시 한동안 제주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때론 그
풍광에 압도되어, 때론 희영의 처연한 마음에 압도되어.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낙인을 짊어지고 살았을 희영의 마음이 아파서, 동생 준수에 대한
회한과 후회의 마음이 아파서. 그리고 엄마를 떠나보내던 날 세상에 온전히 혼자가 된 희영의 모습이 아파서.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하는 서정적 배경 속에 감추어진 쪽빛
비밀. 이 문장처럼 <서정 스릴러>라는 타이틀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더불어 이 세상 어딘가에
희영처럼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시간이기도 했다. '가해자의 가족'이란 결국
또 다른 '피해자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것을.
<책 속 밑줄>
: 신 김치, 상한 나물 반찬 몇 가지 외에 텅 비어
있는 냉장고. 희영은 그제야 혼자 남았다는 것이 사무치게 다가왔다. 차라리 고시원에서 혼자 살 때는 이렇게 외롭지 않았다. 하늘 아래 엄마가 그 고통을 나눠서 진다는 생각에 그래도 버티고
살아나갔다. 싸우고도 엄마였고, 화가 나서 소리쳐 외쳐도 엄마가 그
자리에 있었고, 욕을 들어도 엄마였고 서로에게 모진 말로 상처를 주고받아도 엄마가 있었고 부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완전히 혼자가 된 것이다.
<p190>
: 고통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고 그로 인해 한 단계 성숙해진다는
말은 얼마나 가혹한 말인가. 만약에 신이 더 나은 생을 위한 아픔을 기꺼이
감수하겠느냐고 묻는다면 희영은 그 아픔을 겪지 않고 그냥 이대로 일상을
살아가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p205>
: 비자나무의 코를 찌르는 상쾌한 냄새가 어디선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밤하늘 구름에 가렸던 하현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 상황에 왠지 어울릴 것처럼 보였다.
수백 년을 살아온 비자나무에 비하면 우리 사람의 생은 얼마나 짧은 것이냐고
말해주던 현우의 음성이 귓가에 낭랑하게 울렸다. 하지만 희영은 인생이 짧고 시간이 흘러가고, 그렇게 살아도 아깝게 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 그리고 아픈 마음은 절대로 잊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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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제주도의
하늘을 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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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들이 목초를 뜯어 먹는
모습들.
책 속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떠올랐던 사진이다.
제주도에서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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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바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 짙은 풀내음, 드넓은
하늘.
가을 녘에 찍은 사진이지만 언젠가, 봄날의 제주도를
다시 찾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