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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인 1
최지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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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인'이란 무엇인가? 조금은 생소한 단어인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흡혈귀' 또는 '뱀파이어'의 또 다른 이름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흡혈귀라는 비속한 명칭 대신 아주 오래전, 불로불사의 열혈 전사 '하일랜더' 즉, '고지인'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사실 흡혈귀나 뱀파이어의 경우 동양보다는 서양 쪽이 더 잘 어울린다 할 수 있다.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사실 여부를 떠나 어원이나 기원 및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는 곳이 바로 서양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스토리 진행상 조선 또는 동양권 국가에서 자체적으로 흡혈귀의 존재가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보통 서양과의 교류나 접촉을 통해 흡혈귀의 존재가 유입되는 형식이다. 그것이 스토리 진행상 또는 이해하고, 바라보는 입장에서도 덜 어색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지인'의 경우도 그렇고 작년에 종영한 '만화가 원작'인 드라마 '밤을 걷는 선비'또한 그렇다. 단순히 두 작품만을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만큼 흡혈귀라는 존재는 동양권에서는 어색한 존재임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흡혈귀 또는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숙하고 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영원한 젊음, 매력적이고 창백한 얼굴에 붉은 입술, 영원불사, 불상불사의 운명. 모든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 말은 육체적으로 영원한 젊음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면 흡혈귀나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 '젊음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정말로 이런 삶을 부여받는다면 과연 행복할까? 그 삶은 축복일까? 더불어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는 흡혈 갈증까지 더해진다면? 분명 그런 삶은 극도로 고독하고 철저하게 외로운, 저주받은 불행한 삶일 것이다.
"이따위 영생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우리의 영생은 다른 이의 목숨을 앗는 데서 비롯되네. 극악한 저주일 뿐이지." p.154
소설 '고지인'은 기독교 역사 및 로마 역사에 팩션을 가미하여 '고지인'의 탄생과 배경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때는 조선 후기 1654년 효종 재위 시절 '제주도 연쇄 살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종사관 '염일규'가 급파된다. 주인공 '염일규'는 조선 중기 인조 재위 시절, 가문이 숙청의 대상이 되어 멸문지화를 입었다. 그의 형은 소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이었는데, 역모로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소현세자의 측근으로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일로 가문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되었으나, 후에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간청으로 당시 어린 '염일규'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효종의 배려로 성인이 된 '염일규'는 '시구문(시체를 내가는 문)' 밖 치안과 경비를 맡아 보는 하급 관리로나마 호구지책을 마련하게 된다. 역적의 자식으로 죽음을 피한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지만, 매일매일 시체를 마주해야 하는 삶은 그의 마음을 헛헛하게 했다. 그래서 일까? 주인공 '염일규'는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는 망나니 삶을 지속한다. 그래야만 이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하멜이 표착한 제주에 의문의 변사체가 연이어 발견되면서 '염일규'는 종사관이라는 높은 벼슬을 재수 받아 제주로 떠나게 된다. 그 누구도 유배지와 다름없는 제주로 가길 원치 않았으니까. 제주에 도착한 '염일규'는 의문의 사건을 조사하며 만나, 자신을 도운 관비 '아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결국 그의 아이까지 갖게 된 '아리'. 한편 감금되어 있던 하멜 일행 중 '나선인' 한 명이 탈출과 동시에 연쇄 살변도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데, 제주 목사와 '염일규'는 서로의 거래 조건으로 이 사건을 종결 짓는다. 어느 날 조정으로부터 하멜 일행을 한양으로 압송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염일규'는 '아리'와 함께 제주를 떠난다.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아리'와 함께 숨어 살기로 결심한 '염일규'. 그러나 제주에서 탈출한 줄로만 알았던 '나선인'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염일규'는 그에게 목이 물려 쓰러지고 마는데... 가까스로 '고지인'인 왜인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염일규'. 그는 그 왜인으로부터 '고지인'에 대해 알게 되고 자신도 '고지인'이 되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고지인'이 된 '염일규'의 목숨을 노리는 또 다른 '고지인' 흑도. 과연 '염일규'는 끊임없이 인간의 피를 갈구하는 이 저주받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자신의 목숨과 사랑하는 여인 '아리'를 지킬 수 있을까? '염일규'의 목숨을 노리는 또 다른 '고지인', '흑도' 그는 누구인가?
제2권으로 이어지는 '고지인'은 향후 두 남자 '염일규'와 '흑도'의 대결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조선이라는 실제 역사적 배경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쓰인 '고지인'. 조선 중기에서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서인과 남인들의 붕당정치는 심화되고 변질되는데,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을 필두로 조정에선 권력싸움이 한창인 시절. 소설 '고지인'은 그 시대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고지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실제 역사적 배경에 '고지인'이라는 존재를 더해선지 흡입력 있고 빠르게 읽힌다. 다만 완결이 아니기 때문에 1권에선 큰 긴장감은 없지만 흑도의 출현과 더불어 2권에선 두 남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사뭇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배경이 조선시대인 만큼 '한자 어구'와 '주석'들 때문에 스토리를 이해하며 빠르게 읽어나가는 데 약간의 걸림돌이 되긴 했다. 나의 무지를 탓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책 속 밑줄>
그래도 시체들을 태우고 해거름쯤 돌아올 때면 아무래도 헛헛한 게 사내의 심정이었다.
그때마다 그립고 고픈 건 따뜻한 여인네의 품,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근처의 색주가를 찾았다.
몸 파는 계집들의 푹신한 젖무덤에 얼굴을 묻으며 그는 여태껏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마음을 묻고 기댈 만한 상대로는 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와 상대하는 계집들도 몸뚱이로는 그를 안아주되 가슴으로 품으려 들지는 않았다. p.23
이고르는 결코 선하다고 할 수 없는 악인이었다. 그러나 흑도의 악성은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이고르는 설마 흑도가 자신의 목과 영기마저 노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염일규의 뒤를 쫓으며 영기를 노렸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흑도의 사냥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서둘러 녀석보다 강한 힘을 갖춰야 했던 것이다.
약한 놈은 강한 자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양육강식의 세계, 그것이 고지인들의 생태계였다.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