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혼 - 기억 없는 시간
감성현 지음 / 네오북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

 짧지만 강렬한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다. 감성현의 수혼(輸魂)은 '나를 수', '넋 혼' 글자 그대로 '혼을 나른다'라는 의미다. 인간의 몸을 옷처럼 갈아입고 벗어버리는 존재인 수혼인. 수혼인은 인간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그들에게 인간의 법칙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혼'을 <수혼>을 통해 타인의 육체를 강탈하여 온갖 범죄를 일삼는다. 살인, 강간, 강도, 폭행 등 인간 이면에 감춰진 추악한 악행들을 수혼인은 서슴없이 겉으로 드러낸다. 그들이 강탈한 육체가 '온갖 악행'에 대한 강력한 면죄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죄의식'이란 없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면 그만이다. 자신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세상을 맘껏 조롱하며. 주인공 '연우'도 수혼인이다. 그에겐 여느 인간들처럼 사랑하는 부모님과 여동생이 있다. 그러나 차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여동생 '연희'만 남았다.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울부짖던 그날 밤, 머리 위로 수없이 쏟아질 듯 펼쳐진 별들이 죄스럽게도 아름답다 생각했다. 살려내야 한다는 그날의 울림은 연우에게 벗어날 수 없는 기억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후 연우는 119 구조대원이 되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래야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이렇듯 연우는 기존의 수혼인과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소설 속에는 명확한 이유나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유일하게 수혼인을 죽일 수 있는 존재인 '살해사' 무레르와 엘레테의 대화를 통해 유추할 뿐이다.

"수혼인 중에 선한 경우도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만 무레르, 수혼인은 인간으로부터 갖춘 탈바꿈을 통해 나타나잖아요. 인간이었을 때의 선함을 간직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p.87)

소설 <수혼>은 Teaser, Sequence, Trailer로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각각의 용어에 맞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Teaser> : 영화나 방송 예고편의 한 형식으로 영화의 장면을 조금만 보여주거나 전혀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상물.  <Sequence> :​ 일련의 연속적인 사건들. <Trailer> : 필름의 종료 지점에 부착하는 빈 필름. 필름에 수록된 이미지와 사운드를 보호하고 마지막 프레임까지 정확하게 영사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중 가장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는 것은 Sequence로써 수혼인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사고 현장에서 영문도 모른 채 용의자가 된 사람들. 명백한 물증 앞에 그들의 동일한 자백은 "기억나지 않는다"라는 말뿐이다.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왔던 마석은 우연치 않게 수혼을 경험하게 되면서 잠들어 있던 수혼의 정체성을 깨닫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그의 악행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면수심의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떠올랐다. '살해사' 무레르의 말처럼 "인간은 과연 선한 존재인가?"라는 물음엔 나조차도 쉽게 답을 할수 없었다. 소설 <수혼>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어렴풋이 수혼인의 존재를 눈치챈 형사 태훈과 마석의 대결, 연희를 지키기 위해 질주하는 연우와 무레르의 대결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특히 무레르를 쫓기 위해 <수혼>하며 질주하는 연우의 모습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가 <수혼>할 때마다 그의 뒤로 빈 껍질처럼 나뒹구는 인간의 육신, 다음 순간 전혀 다른 인간의 육신을 입고 무레르를 쫓아 질주하는 연우.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 속 장면을 쫓듯 나의 시선 또한 <수혼>할 대상을 찾아 질주하는 연우의 뒤를 쫓고 있었다. 사람을 살리며 살겠다는, 그 자신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죗값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던 단 하나. '연희'. 마지막 <수혼>후 무거운 육신의 옷을 입고 드디어 마주하게 된 '살해사' 무레르. 곧이어 그의 손이 연우가 입은 육신의 복부로 깊숙이 들어오는데...

마지막 장 Trailer. 이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되었다. '반전'이라면 '반전'일까? 그러나 소설 마지막 문장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내 나름대로 책 속 문장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 수혼을 하다 보면 그 끝에서 악마와 마주하게 된다. 그 악마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다. (p.175)

소설<수혼>은 200page가 조금 넘는 얇은 책으로 금방 읽어 버렸는데, 그 내용이나 시사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인간에 대해, 인간의 이면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 시간이었다. 그리고 각 장이 시작될 때마다 던지는 물음엔 '숨겨진 나의 욕망'이 드러날까 두려워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말해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훔칠 수 있다면

뭘 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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