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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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한 표지에 이끌려 읽게 된 소설 『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라는 이름의 ​홍콩 작가이다. 국내에 13.67이라는 작품이 먼저 소개되었으나, 출간 시기는 『기억나지 않음, 형사』가 더 빠르다고 한다. 때문에 그 이후의 작품인 『13.67』이 재미나 완성도 면에서 더 높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음, 형사』부터 읽어 보기로 했다. 그래야 다음 작품인  『13.67』에서 더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요즘 홍콩 작가뿐 아니라 중국 작가들의 걸출한 작품들이 국내에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동안 추리소설은 대부분 일본 작품들을 많이 접해 왔었는데 이렇게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요즘이 참 즐겁다.

방 한가운데 두 구의 시체가 피범벅이 되어 누워있다. 남자와 여자. 부부인 듯, 심지어 여자는 잉태를 한 상태였다.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아이. 누가 이렇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가? 서술자 '나' 쉬유이는 반드시 진실을 밝히겠다 다짐하며 처참한 사건 현장 한복판에 서 있다. 언뜻 죽은 여자의 눈이 살짝 움직인 것 같다. 그리고 그녀의 고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한마디 "수고해요." 웃는 시체도 아닌 말하는 시체라니... 지독한 숙취인 듯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 쥐고 차 안에서 눈을 뜬 쉬유이. ​어제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주머니 속 수첩에 적힌 '둥청아파트'. 쉬유이는 지난주 홍콩섬 웨스턴 서덜랜드가에 있는 둥청아파트 3층에서 발생한 부부 살인 사건을 기억해 낸다. 다만 진범은 따로 있을 거라는 '묘한 위화감'만이 쉬 사라지지 않을 뿐 무거운 머리를 이끌고 근무지로 향한다. 어쩐지 주변 풍경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런 감각을 '미시감'이라 했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판정을 받았을 때 선택적으로 특정 기억을 잃거나 단기 기억상실증이 생기기도 한다고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이런 장애를 앓는 경찰관은 적잖기에 강한 의지로 극복하면 그만이라 생각한다. 웨스턴 경찰서 정문 앞에 도착한 쉬유이. 문득 전광판에 쓰인 날짜를 본다. 2009년 3월 15일. 이상하다. 그가 기억하는 올해는 분명 2003년이다. 그런데 왜? 그러고 보니 지나왔던 거리의 풍경도, 자신이 서 있는 경찰서의 모습도 어딘가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지난 6년 간의 기억이 없다. 도대체 지난 6년 동안 쉬유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쉬유이는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가며 '아청'이라는 잡지사 기자와 함께 '둥청아파트' 살인 사건을 다시 추적하기 시작한다.

소설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이렇듯 '나'라는 서술자 '쉬유이'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만 중간중간<단락>이라는 파트가 내지의 색깔도 달리해서 '쉬유이'의 과거와 또 다른 인물 '옌즈청'의 이야기로 전개되기도 한다. 옌즈청 또한 쉬유이와 마찬가지로 어릴 적 끔찍한 사고의 영향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스턴트 맨으로 활동하며 가끔 단역으로 영화에도 출연하는 옌즈청은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 슬픔을 간직한 자아를 억제하며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선택한 '또 다른 자아'의 가면을 쓴 채 살아간다. ​일종의 자기방어인 셈이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죽어버린 아버지와 이모. 이런 상처와 충격 속에 홀로 남겨진 옌즈청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고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은 린젠성이었다. 그러나 그는 '둥청아파트' 살인범으로 현재 죽고 없다. 그가 범인일리 없다는 강한 생각과 함께 옌즈청 역시 '둥청아파트' 살인 사건의 진실 규명을 위해 사건에 한 발짝 다가간다. 하나의 같은 사건 선상 위에 서 있는 두 남자 쉬유이와 옌즈청! 

결국 '둥청아파트' 살인 사건의 진범은  쉬유이에 의해 밝혀지고 소설은 끝을 맺는가 싶었는데....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은, 아직 진범의 해석 과정조차 헷갈려 허우적 되고 있는 나에게 2연타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엔 '믿고 싶은 기억'과 '잊고 싶은 기억'이 있었다.

기억을 담당하는 우리의 뇌는 참으로 신비롭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 기억과 망각 사이. 우리가 인지하는 의식의 세계는 무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어떤 '진실'을 잊기 위해 기억을 조작하기도 한다. 그것이 '잊고 싶은 진실'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조작된 기억을 '진실'이라 믿으며 살아가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찬호께이의 『기억나지 않음, 형사』 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인 뇌(기억)를 소재로 작가만의 문장력과 강한 흡입력으로 완벽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듯하다. 또 한편으론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홍콩의, 현재 도시문명 속에 매몰되어 버린 인간성에 대한 고발도 엿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잊어야만 하는, 잊고 싶은 기억의 편린들은 이런 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이토록 천박한 도시다. 살인, 강도, 납치, 강간, 뭐든지 나와 상관없으면 시민들은 방관자적 입장에서 사건을 감상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모두 냉혈동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대사회의 인간은 공감능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이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냉혹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는 더 쉽게 유통되고, 우리는 세상일에 점점 더 마비된다. 어쩌면 세상에 나쁜 일이 너무 많아서 냉혹해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 겹 또 한 겹의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서 이 `번화한 사회`에 적응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방관자적 입장에서 사물을 보아야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 <12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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