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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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속 주인공 '임순관'은 도서출판 '시민들'의 대필작가이며 34살의 자폐적 성향을 갖고 있는 평범한 듯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남자이다. 첫 장을 넘기면 '우리'라는 제3의 화자가 '임순관'이 죽은 후 남긴 화살과 일기장을 발견하고, 왜 그가 일기장을 파기하지 않았는지 그 나름대로의 해석과 정당성을 부여하며 '임순관'의 일기로 소설은 시작된다. 4월 7일부터 5월 11일까지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독자는 '임순관'의 일기를 통해 그가 어떻게 '악의 화신'으로 변모해 가는지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일기라는 형식은 자기 고백적 성향이 아주 강한 개인적인 것임과 동시에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비밀스럽고 은폐적인 성향이 강한 기록물이다. 때문에 일기 속 '임순관'의 사유를 따라가다보면 그 안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독'에 서서히 스며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있어 스스로 흠칫 놀라기도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혐오', '세상에 대한 불협화음과 분노', '망상에 기인한 구원자로서의 응징과 처벌' 등 그의 일기속 이야기는 결코 발견되어서는 안 되는 '금서'처럼, 내 속 어딘가 숨어있을 '악'이라는 것 또한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들켜버려서는 안 될 치부같아서 읽는 내내 조바심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순관'의 일기를 읽다 보면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관여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인물은 '희대의 살인마' 손철희이다. (그가 죽인 사람들은 세상 사람 모두가 죽길 원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손철희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은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라 한다. 그저 그런 쥐새끼들을 더 죽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말한다.) '임순관'은 그의 자서전을 대필하기 위해 '손철희'가 있는 교도소를 왕래하며 그와의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손철희의 사형은 집행되고 그의 죽음과 함께 '임순관'은 비로소 세상을 심판할 구원자로서 각성하게 된다. 두 번째 인물은 '악'과는 대조적이랄 수 있는 '선'의 표상인 '너무나 착한 그의 누이'이다. '임순관'은 그녀와의 만남 그리고 그녀의 눈물을 불편해한다. 어쩌면 '임순관'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일말의 '양심' 혹은 '선'이라는 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흔들리고 요동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 번째 인물은 젊고 부유하고 아름다운 '민초희'이다. 대필작가로서 그녀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그녀와 만나게 되는 데 그 와중에 '임순관'과의 모종의 거래를 하게 된다.

 '민초희' 역시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심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인물들을 자신의 호텔로 초대하여 그들의 맨 얼굴을 드러낼 수 있게 해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최근에 보았던 영화 '내부자들'이 생각났다. 인간이란, 자신을 지켜보는 세상의 눈이 없다면 얼마나 추해지고 타락해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민들, 도서출판 시민들의 사장 홍, 두 남매를 버린 그의 아버지, 임순관에게 또 다른 각성의 계기를 준 집배원 등 다양한 인물들과의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일기 속 등장인물들이기 때문에 몇몇은 그의 환상이나 망상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 일 수도 있다.)

 작가의 말  “내가 조명하고자 한 것은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달라붙어 있는 악마의 얼굴이었다. 그 악마의 얼굴이 인간의 진짜 얼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악마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살고 있긴 하지만 언제나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 악마를 키우고 손과 발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공기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다. 독이 퍼진 공기 속에서는 숨을 쉬는 것이 곧 독을 들이마시는 행위이다. 그런데 또 바꿔 생각하면 숨을 쉬는 그 행위를 통해 우리는 독을 공기 속에 내뿜기도 하는 것이다”를 인용해보면 기본적으로 이 소설은 인간의 '성선설'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경 말씀 중에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8장 3절이라는 말씀이 있다. (희대의 살인마 손철희, 임순관의 유년시절은 아버지라는 존재로 방치되고, 학대되었다.) 인간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세상이라는 공간의 다양한 변수와 환경 속에 노출되면서 은밀하게 녹아있는 '독'에 중독 되고, 마신 독은 다시 내뱉어져서 누군가에게 스며든다. 때문에 '독'은 순수한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나 다 가지게 된다. 다만, 사회적인 질서와 법규 그리고 인간 자신의 기준과 이성에 의해 '독'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깊은 곳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과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가끔은 그 '독'을 참지 못해 뱉어내고 드러냄으로써 그는 발각되고 세상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판한다. [이승우의 소설 '독']은 아직 뱉어지지 못한, 또는 뱉지 않은 '독'을 저 깊은 곳에 갖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임순관'이라는 인물을 투영하여 뱉어냄으로써 인간의 심연 속  '악의'를 일깨우고 있다. 문득 소설 '팔묘촌' 속 긴다이치 코스케의 말이 떠오른다. "저희들 보통 사람은 정신적으로는 끊임없이 살인을 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만약 우리의 행동이 아닌 우리의 생각, 우리의 정신, 우리의 심연 속 '악'을 심판할 수 있는 어떤 장치가 있다면,  그런 심판대가 있다면, 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








<임순관의 일기속 나에게 스며든 문장들>




- 열 개가 나빠도 나쁘고, 하나가 나빠도 나쁘다. 그러나 열 개가 나쁜 것과 하나가 나쁜 것이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요는 그 나쁨이 얼마나 나쁘냐, 누구에 대해서 나쁘냐일 뿐이다. 이 사람에게 선인 것이 때때로 저 사람에게는 악이다. 이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저 사람을 해롭게 해야 하는 것이 인생사다. 이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기 위해 저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불변하는 것, 정해진 것, 고정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19page>



- 내가 타고 있는 것은 세월이다. 세월은 나의 의지를 묻는 일없이 정해진 길을 간다. 세월은 흐른다. 흐르는 것이 세월의 본질이다. 모든 것이 잠들어도 시간은 잠들지 않는다. 모든 것이 멈춰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흐름이 시간의 본질이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오늘의 시간은 어제로부터 흘러왔고, 내일의 시간은 오늘을 거쳐 흘러간다. 어제는 오늘 속으로 들어와 살고, 오늘은 내일 속으로 들어가 섞인다. 그 세월 안에서 아무리 발악을 해도 나의 의지는 세월 밖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세월에 제동을 거는 일 따위는 아예 불가능하다. 세월의 승객에게 필요하고 가능한 한 가지는 단지 버티는 것이다. 갈 때까지 가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멈추면 같이 멈춰 서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25page>


 

- 자폐적인 사람의 협소한 세계를 염려하는 것이야말로 난센스다. 자폐적인 사람의 세계가 협소하다고? 자폐적인 사람의 세계는 다른 어떤 사람의 세계보다 넓고 광활하다.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자폐적인 사람의 세계를 염려한다. 염려하는 척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공간 말고는 다른 세계가 불필요하기 때문에, 자기 세계가 그만큼 크고 넓기 때문에 외부로 나가는 문을 닫는 것이다. 자폐의 크고 넓은 공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걱정들을 하고, 하는 척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둥 소란을 떨지만, 정작 자폐적 성향을 가진 당사자는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는다. 그의 공간에는 없는 것이 없고, 그는 갈 수 없는 곳이 없다. 그의 시간은 무궁하고 영원하다. 꿈속의 시간과 공간이 그런 것처럼 그의 세계에서도 이곳과 저곳, 지금과 나중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광활하고 무한하다. 이 절대적인 자유의 세계가 얼마나 유혹적인지 아는가. 여기에 맞들 인 자는 웬만해서는 자폐의 세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지금 이곳이 가장 넓고 자유로운데, 무엇 때문에 더 좁고 더 부자유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아무 데도 나가지 않을 것이고, 아무하고도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91page>


 

- 요청하지 않은 선의처럼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있을까. 선의라는 이름의 부당한 간섭과 참견이야말로 내가 가장 못 견뎌하는 것 가운데 하나이다. 나 자신이 이웃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만,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웃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들이 나에게 관심을 보일 이유가, 선의라는 이름의 공적쌓기, 그로 말미암은 자기만족을 빼면,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만족은 그의 만족이지 나의 만족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내 문을 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합당한 이유를 들어 나를 설득해보라. 장담하거니와, 나는 설득되지 않을 것이고, 내 이웃들은 내 집 문을 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외톨이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살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는 혼자 사는 사람 나름의 규범과 양식과 놀이가 있기 때문이다. <125page>



- 나는 나의 아버지라는 위인에 대해 눈곱만큼의 애정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혈육이라는 명분을 내세울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다 뭐란 말인가. 혈육이기 때문에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그처럼 불합리하고 야만적인 인습이 어디 있을까. 사람은 자신이 의식적으로 행한 적극적인 행위, 곧 작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상황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고, 그러므로 온당한 일이 아니다. 내가 나의 아버지를 택했는가. 내가 나의 아버지의 상황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아버지가 나를 택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택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굳이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일 것이다. 나는 아니다. 그런데 이 더럽고 야만적이고 불합리한 인습은 나더라 책임을 지라고 아우성이다. 아버지는 아무런 적극적인 행위도 하지 않는데, 그런데도, 아버지야 그러든 말든 아들인 너는 책임을 지라고 한다.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이런 불합리를 내가 왜 수긍해야 한단 말인가. <226page>


 

- "나는 저 사람들에게 본색을 드러낼 공간을 제공했어요. 이곳이 아주 은밀하고 세상의 눈으로부터 단절된 안전한 공간이라는 믿음이 저들로 하여금 가면을 벗게 한 거죠. 가면을 벗으면 민얼굴이 나오지요. 여러 개의 가면을 벗어야 민얼굴이 나오는 사람도 있긴 해요. 너나 할 것 없이 민얼굴은 혐오스럽지요. 누구도 민얼굴을 해가지고 세상에 나다닐 수 없어요. 그러니까 가면을 쓰지요. 어떤 사람은 여러 개의 가면을 쓰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 이곳은 세상이 아니거든요. 자기네들 말고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거든요. 자기네들 말고는 비난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죠.그런데 자기들은 자기들을 비난하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똑같으니까. 똑같이 민얼굴이니까. 똑같으면 비난할 수 없어요. 우리는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만 비난해요. 잘 봐요. 똑바로 잘 보라고요. 그렇게 해서 나타난 민얼굴이 저거예요. 저것이 본색이에요. 본색은 혐오스럽고 치욕이고, 슬픈 거예요." <26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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