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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평점 :
처음 온다 리쿠의 작품을 접한 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이었다. 조금은 난해한 듯하면서도 그 독특함이 좋아 그 뒤로 온다 리쿠의 팬이 되었고 그녀의 작품들을 하나씩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단편 모음집인 '나비' 그리고 '삼월 시리즈', '굽이치는 강가에서', '한낮의 달을 쫓다', '불안한 동화' 등등 한 권씩 그녀의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꼈던 감정은 몽환적 미스터리가 녹아있는 '기시감' 같은 묘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녀의 작품들은 꽤(?)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이번에 읽은 '밤의 피크닉'은 여느 청춘소설들처럼 부담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아주 멋진 작품이었다. 10대의 마지막 시절, 졸업을 앞둔 고교생들이 모교의 연례 행사인 '야간보행제'에 참석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야간보행제'는 24시간 동안 총 80km를 걷는 어찌 보면 극한의 체험이자 행사이다. 전반부는 각 학년별로 학급끼리, 후반부는 '자유보행'으로 함께 걷고 싶은 사람과 걸을 수 있는데, 이 '야간보행제'가 주는 특별함은 일상을 벗어난 비일상의 공간이며 시간이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공간과 시간 속이었다면 차마 말하지 못 했을 속 깊은 이야기들을 신비로운 밤하늘 아래를 함께 걷게 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분명 그런 순간들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농밀하면서도 짙은 어둠이 깔리는 밤은 모든 풍경을 그리고 우리를 너그럽게 감싸 안는 시간의 힘을 갖고 있다.
비밀을 간직한 소년과 소녀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다채로운 이야기들과 온다 리쿠만의 그리움이 느껴지는 풍경 묘사들이 '야간보행제' 를 배경으로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처음 걸을 때의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은 중반부를 지나면서 점점 육체적 고통과 한계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골인 지점을 향한 그들의 간절한 열망과 희망은 이곳 등장인물들의 이야기 흐름과 맞춰 흘러간다. 처음 서로에 대해 느꼈던 분노, 상처, 두려움 그리고 호기심과 동경은 함께 걷는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점점 이해와 화해로 소년과 소녀의 심경 또한 변화되어 간다. 지난밤에 함께 나누었던 대화와 미묘한 교감들이 서서히 날이 밝아 오면서 마치 오래전 꾸었던 아스라한 꿈처럼 멀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저 멀리 보이는 목표지점을 향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는 소년과 소녀의 가슴속에는 그동안 숨기고 털어놓지 못 했던 가슴속 어떤 응어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반짝거림으로 가득참을 느낀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라는 별명답게 젊은 시절의 그리움과 청춘의 반짝임을 '야간보행제'라는 소재를 통해 그녀만의 감성으로 따뜻하게 풀어 낸 '밤의 피크닉'.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내 가슴속에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청춘과 학창시절이 문득 그리워졌다. 순수했지만 그 시절 그 나이 때의 고민과 상처로 힘들어했었던 그 반짝였던 순간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책 속 울림을 준 문장들]
보행제가 끝나버리면 이제 이 코스를 달리는 일도 없겠구나.
도오루는 왠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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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코는 반짝거리는 수면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걷는 것은 좋아했다. 이런 식으로 차가 없고 경치가 멋진 곳을 한가로이 걷는 것은 기분 좋다.
머릿속이 텅 비어지고, 여러 가지 기억과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붙들어두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더니 마음이 해방되어 끝없이 확산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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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코는 시계(視界)를 평평하게 메우는 참억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야기에 몰두하여 가끔 얼굴을 들었을 때 본 몇 가지 풍경이 각인되어 있을 뿐,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하게 몇 장면은 마음속에 남는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랬다. 올해 남는 광경 중에, 이 참억새밭이 포함될 게 틀림없다.
두 번 다시 지나가지 않을 대수롭지 않은 풍경이지만, 이 한순간은 아마도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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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말이지. 타이밍이야...
굳이 마음을 차단하고 얼른 계단을 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아프리만큼 알지만 말이야.
물론 너의 그런 점. 나는 존경하기도 해. 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든다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는 거야.
네게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 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그때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해...
어떻게 하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좀더 흐트러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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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감각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순간인데, 당시에는 이렇게도 길다.
1미터 걷는 것만으로도 울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긴 거리의 이동이 전부 이어져 있어, 같은 일 분 일 초의 연속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어느 하루 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농밀하며 눈 깜짝할 사이였던 이번 한 해며,
불과 얼마 전 입학한 것 같은 고교생활이며, 어쩌면 앞으로의 일생 역시 그런 '믿을 수 없는' 것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아마 몇 년쯤 흐른 뒤에도 역시 같은 말을 중얼거릴 것이다.
어째서 뒤돌아보았을 때는 순간인 걸까. 그 세월이 정말로 같은 일 분 일 초마다 전부 연속해 있다는 걸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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