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오랜만에 깊은 사색을 갖고 읽은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둔기로 맞은 것 같은 느낌과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느낌을 받은 책은 실로 오랜만이다. 그동안 재미와 흥미 위주로 책을 읽어 온 나에게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답과 깨달음을 전해준 책이기도 하다. '책은 도끼다' 는 저자 박웅현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울림'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또 그 '울림'을 전달하기 위한 목표로 쓴 책이라 한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책 속의 책들을 통해 깊은 '울림'과 '감동'을 받았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책은 도끼다? 선뜻 그 의미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에게 도끼라는 존재는 하나의 공구이고 그저 무서운 흉기로만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저자의 말에 소개되어 있는 카프카의 글을 통해 그 깊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 1904년 1월 프란츠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
카프카의 변신을 아직 읽어보지 않은 나이기에 당연히 알 수 없었던 문장이고 의미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느꼈던 전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의 얼어붙은 감수성을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하는 책. 그동안 숱하게 책을 읽어왔다고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진정 나에게 도끼가 되어 준 책을 과연 얼마나 읽어 왔는지를 생각하니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저자 박웅현에게 그런 도끼와도 같은 '울림'을 준 책들이 그 책을 쓴 저자와 함께 '책은 도끼다'에 소개되어 있다. 김훈, 최인훈, 이오덕, 이철수, 유홍준, 밀란 쿤데라, 알랭 드 보통, 시인 고은, 김화영, 알베르 카뮈, 장 그르니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톨스토이 등등이다. 위 저자들이 쓴 책에서 박웅현에게 '울림'을 준 '아름다운 문장'들을 소개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책은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울림'을 단 번에 발견할 수도 있지만 여러 번 읽어 발견하기도 한다는 박웅현은 음식을 꼭꼭 씹어 먹듯 책을 깊이 있게 읽는다고 한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밑줄을 칠 만큼 얼마나 많은 울림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우리가 흔히 범하고 있는 '다독 콤플렉스'를 버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문장'들을 하나씩 만날 때마다 그 책의 전체를 읽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 -

+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라는 김훈 작가님의 이 문장 하나에 생각난 사진이 있어 같이 올려본다.
구례 산수유 축제 때 직접 찍은 사진이다. 그저 꽃이 귀엽고 앙증맞아 찍었을 뿐인데
김훈 작가님의 문장을 음미하며 사진을 바라보니 정말...
내 안에서 뜨겁게 느껴지는 어떤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
목련은 등불 켜듯이 피어난다. (...) 목련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 김훈 자전거 여행 중 -
마찬가지로 이 문장을 읽었을 때에도 깊은 '울림'과 함께 머릿속에 목련의 피고 지는 풍경이 그려졌다. 그리고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났다. 목련처럼 등불 켜듯이 환하게 세상에 태어났다가 목련이 떨어지는 모습처럼 펄썩, 그렇게 암으로 돌아가신 나의 엄마가... 이렇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많은 풍경들과 일상의 모습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발견하는 눈을 갖고 있느냐 갖고 있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시이불견 청이불문 : 시청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견문은 깊이 보고 듣는 것) 그렇기 때문에 책은 무뎌진 우리의 가슴에 풍부한 감수성과 울림을 전해주고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갖게 해준다. 더불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서 깊게 사유할 수 있는 시간 또한 허락해 준다. 책을 읽음으로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하나둘씩 작은 울림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거나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해석하고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
.
.
ps
아는 만큼 세상을 본다는 말이 있다. 일전에 읽으려고 계획했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인데 그냥 읽었다면 아마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다행히 이 책의 끝 부분에 책의 각 주인공들이나 여러 가지 어려운 의미들을 저자 박웅현은 아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 부분을 읽고 나니 좀 더 쉽게 위 책 읽기에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 역시 피카소의 그림이 왜 그렇게 감동을 주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라는 책을 읽고 피카소의 그림에 대해 이해하게 됨으로써 그의 그림에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의 말을 인용하면) "책을 읽고 나면 그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것들이 레이더에 걸린다는 겁니다. 회로가 재설정되는 거죠. (...) 그렇게 잡히는 게 많아지면 결국 삶이 풍요로워지는 것이고요, 이것이 행복의 포인트가 되는 겁니다."

책은 그 자신만이 발달한 감수성으로 우리를 예민하게 하고
우리의 숨겨진 촉각을 자극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