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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박동을 듣는 기술
얀 필립 젠드커 지음, 이은정 옮김 / 박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왜 사랑이 그렇게 어려워야
하죠?"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 악이든 선이든 - 이미 갖고 있는 개념에 비춰 다른 사람을 판단하죠. 사랑도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에 부합하는 것만 사랑이라고 인정해요.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죠. 다른 모습은 불편해하고, 그래서 의심하고 의혹을 품죠.
그래서 상대를 비난하죠.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정하죠.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특이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일 뿐이에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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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page -
얀 필립 젠드커의 장편소설 '심장박동을 듣는 기술'은
제목부터 표지까지 참 인상적이였다. 책을 받고 났을 때엔 그 두께감에 적잖히 놀랐다. 약간의 흥분과 설렘을 안고 책을 읽어 나갔다. 두께감에
비해 책 자체의 여백도 꽤 있는 편이였고, 행간의 넓이도 넓어 생각보다 빨리 읽혔다. 물론 얀 필립 젠드커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흡입력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책을 썩 빨리 읽지 못하는 내가 단 이틀만에 이 책을 다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었을 때엔 우 바의 정체에
놀랐고, 책 속 우 메이의 많은 가르침에 감명을 받았고, 틴 윈과 미밍의 사랑엔 가슴이 저려왔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기약없는
기다림속에서도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고 믿음으로 자신의 생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조금은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색깔의 사랑이라는 것도.
줄리아는 어느 날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버지의
행방을 찾기위해 어머니가 준 '단서'하나에 의지해 아버지의 고향인 미얀마로 떠난다. 뉴욕의 변호사 출신인, 어쩌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삶을
산 아버지가 자신을 포함한 가족 모두를 버리고 왜 미얀마로 떠나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며 상심했을 것이다. 그러한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도착한 미얀마의 소도시 깔로에의 작고 허름한 카페에서 '우 바'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를 통해 자신이 알지 못했던 50년전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면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심지어 아버지가 한
때는 장님이였다는 이야기와 함께.
틴 윈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이웃의 수치부인에게
키워진다. 후천적으로 발병한 장애로 틴 윈은 장님이 되고 이전에 그가 알고 지냈던 세상은 어둠속으로 가라앉고 만다. 그런 틴 윈을 수치는
수도원의 우 메이에게 데려가고, 마찬가지로 장님인 우 메이는 틴 윈의 정신적 스승이 된다. 그를 통해 틴 윈은 장애에 굴복하지 않고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워나간다. 소설 속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미얀마의 소도시 깔로. 그곳에서 온 청력을 기울여 자신의
세상을 한 발 한 발 넓혀나가는 틴 윈의 모습은 인상적이였다. 시각이 온전한 사람들은 결코 들을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소리도 틴 윈은
들을 수 있게 된다. 나비들의 날갯짓 소리, 땅 속 동물들의 달음박질 소리, 심지어는 소리만으로 나무의 종류까지 구별해 낸다. 큰 키와 약간 마른 체형을 가진 틴 윈의 보기좋은 갈색빛 피부, 롱기를 걷어 올려 비로 질퍽해진 땅의 표면을 발바닥의 촉감으로 느끼며 움직이는
모습 등등은 책을 읽어가는 내내 내게 하나의 영상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 미얀마라는 곳을 단 한번도 가본적이 없지만 그곳의 환경과 그 속에 살아 숨쉬는
틴 윈의 모습은 마치 내가 그곳을 가본 것처럼 느껴져 계속해서 그곳의 틴 윈의 이미지는 나를 따라다녔다. 수치와 우 메이, 그리고 수도원의
많은 동료들은 친절하고 다정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아니 그보다 틴 윈의 가슴속 깊이 남아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을 끌어 올리기에 그들은 충분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단조롭지만 조용하고 규칙적인 어떤 소리를 듣게 되고 그 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에 틴 윈은 운명처럼 미밍이라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가 들었던 그 소리는 미밍의
심장박동소리였다.
미밍은 작고 용기있으며, 현명하고 아주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선척적인 장애로 걷지 못하고 기어다녀야만 했다. 그러나 그 모습조차도 미밍은 전혀 추해보이지 않았다.
미밍은 틴 윈이 그녀를 자각하기 전부터 수도원에서 틴 윈을 보았었다. 그리고 언젠가 틴 윈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을 알았다. 그 둘은
운명처럼 만나 서로의 눈과 다리가 되어 주었다. 그 둘의 만남은 4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그 시간속에서 그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매일 매일 틴 윈이 보고 싶었지만 미밍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다림을 통해 자신들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었으며 그 기다림조차도 미밍은 행복했다. 틴 윈은 미밍을 통해 그녀가 그려주는 세상의 소리들을 더 확장해 나갈 수 있었고, 미밍은
틴 윈의 등에 엎혀 더 많은 곳을 다닐 수 있었다. 애초부터 그 둘은 둘이 아닌 그저 하나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 둘의 장애는 장애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의 아픔을 묵묵히 받아들일 위로가 되어 주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여느 때처럼 틴 윈은 미밍을 업고 비를 피할
오두막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쏟아지는 빗소리에 묻혀 서로의 영역을 갈망하고 붙잡으려는 그들의 몸부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느 사랑과
다를 바 없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일어설 수 없다고해서 그들이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우리처럼 그들도 사랑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들만의 색깔로 다르게 채워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폭우속의 격정처럼 틴 윈과 미밍은 헤어지게 된다. 미얀마라는 공간적 배경이 주는 또 한 가지는 바로 그들은 미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점성술사의 예언으로 틴 윈의 먼 친척 뻘 되는 고모부는 틴 윈을 데려간다. 틴 윈은 곧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머나먼 수도 양곤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치료를 받아 눈을 뜨게 되고, 더 머나먼 뉴욕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 사이 미밍과 틴 윈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지만 그 편지들은 중간에서 고모부로 인해 가로채이게 되고 답장을 받지 못함에도 그 둘은 여전히 서로를 잃지않고 사랑을
노래한다. 마지막 틴 윈에게 미밍은 단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되지만, 그것은 고모부의 계략으로 씌여진 편지였다. 하지만 미밍은 틴 윈을
원망하지 않았다. 틴 윈은 뉴욕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지만 그건 전적으로 그의 의지는 아니였다. 그러나 미밍에게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
순간에 그를 버틸 수 있게 한 유일한 안식처는 그의 가정이였을 것이다. 이 부분은 줄리아에게 들려주는 우 바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 또한 이해하게
된다. 줄리아 역시 아버지의 배신으로 생각했던 일들이 우 바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가 아버지이기 이전에 한 남자로서 느꼈을 고통과
아픔을 마주하며 그를 이해하게 되고, 용서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마음은 점차 흐려지고, 아버지는 미밍을 사랑했던
것처럼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과 어머니, 가족들을 사랑했단 걸 알게 된다.
우 바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줄리아는 아버지를 만나게
되길 고대하지만, 우 바는 서두를 필요 없다고 한다. 틴 윈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미밍의 심장박동 소리를 느낄 수 있었고 그녀를 찾아 미얀마로
왔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우 바에게 줄리아는 한 통의 봉투를 건네 받는다. 그 속엔 어딘가 낯이 익은, 그러나
짐작은 가지 않는 어떤 남자가 미밍옆에 서 있는 사진들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미밍과 그 남자도 늙어가지만 미밍의 아름다움은 여전하고 그
남자도 곧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그 작은 충격을 확인하기위해 우 바에게 달려가지만 우 바는 그저 아무말 없이 웃으며 이야기는 끝난다.
미얀마의 후텁지근한 날씨, 온갖 동물들의 소리가 앞마당에서
들리는 집의 구조들, 미밍이 손수 짠 롱기를 입고 기어가는 모습,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틴 윈의 집중하는 얼굴 표정, 그리고 미밍의 작은
가슴을 느끼며 그녀를 업고 달리는 틴 윈의 뒷 모습, 빗속을 가로 질러 언덕을 오르는 그들의 모습,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결코 원망하지 않는
그들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에 영상이 되어 둥둥 떠다녔다.
한편의 슬프지만 아름다운 영화를
본 것처럼 내 가슴은 미얀마의 뜨거운 열기만큼이나 뜨거워져 진정시키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