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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평점 :
짙은 녹음과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는 계절, 여름. 그러나 만약 여름을 비추는 태양이 없다면 여름은 그저 여름이라는 이름만을 가질 뿐 혹독한 추위 속 찬바람만 부는 한겨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그런 존재다. 아이들이 자라 무성하게 숲을 이룰 수 있도록 양질의 빛을 제공해 주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존재, 마치 태양처럼 말이다.
<여름의 겨울>속 '나'와 '나'의 동생 질은 가장 따뜻하고 안락한 보금자리여야 할 집이 그들에겐, 매 순간 살얼음 판을 걷는 것 같은 불안함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공간일 뿐이다. 사냥과 TV, 술 외에는 관심이 없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에 길들여져 무기력해진 어머니까지. 두 아이를 보호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줘야 할 태양은, 어른은, 부모는 그들의 세계엔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혹독하고 추운 계절, 긴긴 겨울만이 있을 뿐.
반면 '나'는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 질을 사랑한다. 어쩌면 추운, 이 계절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 동생 질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비극은 예고 없이 아이들 앞에 나타났다. 아이스크림 할아버지의 끔찍한 사고를 목도한 '나와 질. 이 생경하고도 생생한 사고는 이후 아이들의 삶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위태로운 여름의 한 가운데를 걷고 있는 아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바로 부모님이었다. 그들의 따뜻한 품 안, 따뜻한 손길, 따뜻한 숨결이 담긴 위로의 말 한마디.
"단지 곧 깨어날 악몽을 꾼 것뿐이라고,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 단 한 마디의 말.
그러나 '나'와 질은 폭력과 무기력이라는 각자의 감각 속에 갇힌 부모로 인해 방치되고 유폐된다. '나'는 동생을 지키려 하지만 '나'역시 위로가 필요한 어린아이일 뿐. 결국 동생 질은 자기 자신을 잃고 해소되지 못한 두려움과 공포, 트라우마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고 만다. 아버지의 전리품들이 가득 쌓여있는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도 좋지 못한 환경이랄 수 있는) '시체들의 방'은 동생 '질'의 유폐 장소가 된다. 그 스스로가 유폐한. 머릿속 악의(하이에나)가 둥지를 틀고 조금씩 조금씩 질을 갉아먹어가면서 질은 아버지와 같은 잔인한 폭력의 길을 걸어간다. 주위에 희생양이 될 것들은 충분함으로.
'나'는 시간 여행을 결심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이스크림 할아버지의 사고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니 최소한 그 사고를 목도하지만 않았다면 질을 내 동생 질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나뭇잎 사이로 비춰드는 한 줄기 햇살처럼 빛나던 질의 눈동자, 포근하고 따사로운 질의 머릿결, 그 아이의 순수한 미소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기에.
이후 과거로의 여행이 불가능함을 막연하게나마 깨닫는 '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나'. 영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과학과 수학 두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고, 챔피언과 깃털이 사는 집 아이들을 돌보면서 '나'는 자신만의 돌파구를 찾는다. 폭력이 지배하는 집으로부터, 아버지의 감시로부터 벗어나 스스로를 구원할 돌파구를. 하지만 폭력이 난무하는 가정에선 늘 그렇듯 시한폭탄은 언제든 터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와 질, 그리고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에 '나'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냥감이 되어 참가하게 되고 크게 다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공포가 '나'에게서 포식자를 키워내고 '질'은 상처 입은 누나로 인해 아주 잠깐이지만 예전의 반짝이는 모습을 보인다.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와는 달리 폭력의 굴레에 쉽게 굴복하지 않는 '나'는 공포를 삼키고 분노를 내뱉는 포식자를 앞세워 아버지에게 대항한다. 그러나 '나'의 대항은 강인한 마음과는 달리 여름날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녀 앞에 잔인하게 내던져진 삶과 죽음의 기로에 '나'는 '질'은 무기력하기만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상대로 고통받은 육신과 상처 입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 두렵지 않았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내 죽음을 받아들였다. 나는 삶이 나에게 선사한 그 모든 경이로움을 보았다. 공포를 보았고,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승리했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질을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약하지 않았다.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270page
김창옥 작가님의 책 제목 <당신은 아무 일 없던 사람보다 강합니다>라는 문장을 좋아한다. 실연, 사별, 이별, 수많은 고통과 슬픔을 겪어 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분명 어떤 면에선 강할 거라 믿는다. 아직 어린 '나'와 질. 그 속에서 싹튼 포식자와 하이에나는 잠들지 언정 쉽게 떠나진 않겠지만, 혹독했던 만큼 차갑고 시린 시련의 계절을 결국엔 이겨내리라 믿는다. 앞으로 시작될 그들의 인생 2막에.
차갑고 두꺼운 땅을 뚫고 나온 맹아는 오랜 웅크림 속에서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결국엔 저항하고 저항하여 대지 위로 초록빛 얼굴을 내민다. 마치 <여름의 겨울> 속 '나'처럼. 그러다가 언젠가 그 고통의 세월이 잊힐 만큼 아름다운 꽃을 만발하겠지. 이제는 나 역시 이 어린 소녀를 보내줘야 할 것 같다. 더 넓고 넓은 세상 속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