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힘은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에서.

 

간혹 한국에 오래 살고 있는 프랑스인들을 만날 때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프랑스에 대한 오해와 고정관념이 상당하는 것이죠. 프랑스적인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프랑스적인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낯설고 기이한 프랑스 문화와 그 흔적들

 

 

프랑스적인 것, 우리와 동질적인 프랑스적인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프랑스적인 것을 찾으려는 시도로 프랑스 도서를 번역 출간합니다.

 

불란서책방은 프랑스라는 국가적 정체성과는 무관하게 문화적 이질성을 탐색합니다. 20세기 초중반 한국 사회에 유입된 문화적 이질성의 상징적 의미를 담은 불란서라는 단어가 현실에서 소비된 경로나 양태는 부정성도 긍정성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불란서책방은 문화적 이질성의 가치를 회복하는 일을 하려 합니다. 그것이 곧 우리 문화의 내성과 진수를 보여줄 수 있는 바탕이 되겠죠.

 

감각을 번역합니다.

 

불란서책방은 잊힌 목소리, 낯설지만 아름다운 것, 오래된 질문과 새로 태동하는 감각을 번역합니다. 그 목소리와 감각들이 책의 형태로 다시 숨을 얻고, 독자가 그 페이지 사이에서 오래 머물며 빛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책이 건네는 한 줄의 빛을 믿으며, 그 빛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일을 이어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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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4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페스트 2026-03-17 12: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 다정한 문장에 기운이 납니다. !!
 

역사는 당대의 관습에 도전한 인물들로 가득 차 있지만, '붉은 처녀'로 알려진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만큼 반항 정신과 정의에 대한 헌신을 강력하게 구현한 인물은 드물다. 미셸은 1871년 파리 코뮌 당시의 혁명적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 성평등, 아나키즘을 열렬히 옹호한 인물이기도 했다.


용기, 희생, 불굴의 의지로 점철된 그녀의 삶은 사회 정의와 평등을 위한 투쟁의 영원한 증거가 된다. 파리 코뮌에서의 혁명적 역할부터 뉴칼레도니아 유배 생활, 교육에 대한 변함없는 옹호와 폭넓은 기여에 이르기까지, 루이즈 미셸은 영감을 주는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남아 있다.


1871년의 파리 코뮌은 혁명 운동사의 중대한 전환점이며, 루이즈 미셸은 그 중심에 있었다. 1830년 프랑스 브랑쿠르(Vroncourt)의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난 미셸은 오랫동안 정의감과 진보적 이상에 대한 헌신을 키워왔다. 이러한 가치들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혼란스러운 여파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국 몰락 과정에서 전면으로 부각되었다.

파리가 포위되고 시민들이 극심한 고난에 처하자 통치 계급에 대한 불만이 폭동으로 번졌고, 이는 1871년 3월 파리 코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미셸은 코뮌의 가장 열정적인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그녀는 정치적, 군사적 노력 모두에 깊이 관여하며 혁명적 이상에 대한 두려움 없는 헌신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코뮌의 방어를 책임지는 조직인 공안위원회에 합류하여, 평등과 정의에 대한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미셸은 특히 성평등과 노동계급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 목소리를 높였으며, 이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잠재력에 대한 그녀의 평생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녀의 역할은 정책 수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셸은 바리케이드에서 무기를 들었으며, 특히 코뮌의 반란이 처음 불붙었던 장소인 몽마르트르를 방어했다. 그녀의 용기와 헌신은 동료 코뮌 대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녀는 굴하지 않는 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871년 5월 '피의 일주일' 동안 코뮌이 잔혹한 탄압에 직면했을 때도 미셸은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으며, 이는 대의에 대한 그녀의 굴하지 않는 헌신을 증명했다.

코뮌 함락 후 미셸은 체포되었다. 그녀는 재판에서 "나를 살려둔다면, 나는 결코 복수를 부르짖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이러한 저항은 억압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그녀의 정신을 요약해 보여준다. 그녀의 형량은 먼 식민지인 뉴칼레도니아로의 추방이었다. 1873년 미셸의 뉴칼레도니아 유배는 그녀의 삶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이는 그녀의 혁명적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


유배 생활은 그녀의 정신을 꺾기는커녕 지적 성장과 연대의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맞서 싸우던 원주민 카낙(Kanak)족과 유대를 형성했는데, 그들의 투쟁은 정의와 평등에 대한 그녀 자신의 신념과 깊이 공명했다. 1870년대 카낙 봉기에 대한 미셸의 지지는 파리에서든 태평양에서든 모든 형태의 억압에 반대한다는 그녀의 폭넓은 헌신을 반영했다.


뉴칼레도니아에 머무는 동안 미셸은 이후 그녀의 활동을 정의하게 될 이데올로기인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유배 기간 동안 광범위한 글을 썼으며, 진화하는 정치적 신념을 명확히 하고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기록한 저작들을 남겼다. 이 글들은 유배지의 상황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정의와 혁명 이론에 관한 폭넓은 담론에도 기여했다.

미셸은 1880년 사면을 받아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아나키즘을 완전히 수용했으며 억압받는 자들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뉴칼레도니아에서의 시간은 그녀의 결단력을 약화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전 세계의 불의에 맞선 투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녀의 이해를 깊게 만들었다.


루이즈 미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가장 일관된 주제 중 하나는 교육의 변화시키는 힘에 대한 믿음이었다. 파리 코뮌에 참여하기 전에도 미셸은 교사로 일하며 무상 세속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는 교육을 권한 부여의 수단이자, 개인들, 특히 소외된 공동체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구조에 도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았다.

코뮌 활동 기간 동안 미셸은 이러한 이상을 반영한 정책들을 옹호했다. 접근 가능하면서도 세속적인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그녀의 우선순위였는데, 지식은 종교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가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서의 그녀의 활동은 교육을 개인적 성장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위한 도구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미셸의 활동은 교육을 넘어 더 넓은 사회 정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그녀는 성평등, 노동자의 권리, 빈곤층의 곤궁을 대변하며 일관되게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의 편에 섰다. 프랑스 귀국 후 그녀의 연설과 저술은 이러한 대의를 더욱 증폭시켰고, 그녀를 아나키스트 운동의 저명한 인물로 만들었다.


루이즈 미셸의 유산은 그녀의 생애를 훨씬 넘어 이어진다. 그녀의 용기와 이상은 수많은 운동과 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녀를 저항과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프랑스의 아이콘으로 남아 있으며, 학교, 거리, 심지어 지하철역에도 그녀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그녀의 자서전 '루이즈 미셸 회고록(Mémoires de Louise Michel)'을 포함한 저술들은 그녀의 삶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제공하며 혁명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연구되고 있다.


루이즈 미셸의 영향력은 프랑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육, 평등, 정의에 대한 그녀의 옹호는 전 세계적으로 공명을 일으키며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에 영감을 주고, 역경에 맞서는 회복탄력성의 힘을 상기시킨다. 혁명가, 페미니스트, 혹은 아나키스트 중 어떤 모습으로 비치든 미셸은 불굴의 저항 정신을 구현한다. 루이즈 미셸의 삶은 용기와 지성, 그리고 정의에 대한 흔들림 없는 헌신이 담긴 놀라운 이야기다.


파리 코뮌에서의 지도력부터 뉴칼레도니아 유배, 교육에 대한 옹호, 그리고 폭넓은 유산에 이르기까지, 미셸은 사회 운동사의 거인으로 우뚝 서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평등과 정의를 위한 투쟁이 결코 쉽지 않지만 언제나 추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저항과 희망의 상징으로서 루이즈 미셸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감을 주며, 그녀가 소중히 여겼던 원칙들에 뿌리를 둔 세상을 상상하고 그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루이즈 미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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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12월 16일 베르사유의 군사법정(제4군사법정)에서 파리 코뮌 관련 혐의로 재판을 받은 루이즈 미셸의 최후 진술은 일명 “사형요구 연설”입니다. 이 연설에서,  “나를 풀어주지 말고, 함께 싸운 동지들과 같은 운명을, 더 나아가 사형을 달라”

“내가 당신들 앞에 있는 것은 혁명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만약 나를 살려준다면, 나는 패배한 자들을 위해 복수를 외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들이 다시 자유의 투사들을 죽이려 한다면, 나는 내 형제들처럼 죽기를 원합니다. 만약 내 목숨을 요구한다면, 나는 그것을 아낌없이 바칠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것은 ‘범죄’가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선 정치적 행동이며, 그 책임을 온전히 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러니, 빅토르 위고가 그녀에게 헌사는 시를 썼겠죠. 제목은 <남자보다 위대한>.

오늘의 그 누군가의 재판을 보니, 맞습니다. 분명 어떤 남자보다는 위대합니다.


또 하나의 일화, 루이즈 미셸 저격 사건.




1888년 1월 22일 루이즈 미셸은 르아브르(Le Havre)에서 강연하던 중, 피에르 뤼카(Pierre Lucas)라는 인물이 쏜 6.5mm 구경의 권총 탄환 두 발 중 한 발을 왼쪽 귀 뒷부분에 맞았습니다. 당시 의사들은 총탄 제거 수술을 권유했지만 뇌 근처의 총탄을 제거하는 수술이 매우 위험했기에 루이즈 미셸은 수술보다 총탄을 그대로 두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1905년 1월 9일 마르세유에서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약 17년 동안 머릿속에 그 총탄을 지닌 채 활동을 이어갔고 사망 후 진행된 부검에서 실제로 두개골 내부에 박혀 있던 총탄이 발견되었습니다. 뇌 조직을 직접적으로 손상시키지는 않았으나, 뼈와 밀착된 상태로 약 17년 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죠.

그녀는 머릿속에 박힌 총탄으로 인해 평생 간헐적인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이를 "나를 쏜 불쌍한 자가 준 선물"이라 말했습니다.

루이즈 미셸은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이 사건의 법정에 나타나 자신을 쏜 범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단지 시대의 피해자일 뿐"이다. "그는 나를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불행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을 뿐"이라며 가해자의 무죄 석방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나는 이 총탄을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루이즈 미셸은 자신에게 총을 쏜 피에르 뤼카(Pierre Lucas)를 단순한 범죄자가 아닌,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희생자'로 본 것이죠. 

그녀는 판사에게 "그를 처벌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또 다른 불행을 만드는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고 결국 뤼카는 정신 이상 판정을 받아 감옥 대신 수용 시설로 보내졌습니다. 뤼카가 수용 시설에 갇히자 그의 가족이 생계가 막막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루이즈 미셸은 자신의 적은 강연료와 인세를 쪼개어 뤼카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냈고  뤼카에게는 위로의 편지를 보내 그가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고 합니다. 가해자를 증오하기보다 그 가족의 고통을 먼저 살핀 루이즈 미셸. 

1905년 1월 9일(혹은 10일), 그녀가 마르세유에서 사망한 후 시신은 파리로 운구되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은 1월22일, 국가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인파가 몰렸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파리 시내에만 최소 10만 명에서 12만 명의 시민들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운구 행렬을 지켜본 인파를 포함해 25만 명 이상으로 추산하기도 합니다.)




마르세유에서 파리 리옹 역에 도착한 그녀의 관은 붉은 깃발과 검은 깃발(아나키즘의 상징)로 뒤덮였습니다. 노동자, 여성, 빈민층뿐만 아니라 당대의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루이즈 미셸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장례식 당일 파리의 공공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인파가 몰려 경찰조차 통제 포기 상태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유해는 파리 외곽의 르발루아-페레(Levallois-Perret) 묘지에 안치되었습니다. 혹 이곳을 들르신다면 꼭 찾아보시길. 루이즈 미셸과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친구 마리 페레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루이즈 미셸 회상록 

#루이즈미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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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즈음, 이 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조금씩 조금씩 만들었습니다. 회고록인 만큼 본문 안에 많은 인물들에 대한 보충 설명들도 필요할 듯 공부하는 셈치고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루이즈 미셸, 누구인지 모르는 분도 대부분일 거 같습니다. 이 사람에 관한 책도 국내엔 없습니다. 프랑스나 유럽 미국에서의 명성과 이력에 비해 이 쪽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죠. 루이즈 미셸의 이름을 단 파리 지하철 역과 전국의 학교나 문화센터가 200여개 이상인 것으로 봐선 그들에겐 남다른 사람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파리 코뮌을 다루는 역사과정과 시민 교육과정에선 필수적으로 다루는 사람입니다.
삶이 온통 ,,,뭐랄까...싸움이었고 패배였던 사람이랄까...이토록 가슴저린 회고록, 교정을 맡아준 분은 끝내 눈물을 쏟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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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미셸은 18861월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 무렵 그녀는 이미 전설적인 존재였다. 폴 베를렌이 그의 시 루이즈 미셸을 찬양하는 발라드에서 표현했듯이, 그녀는 "잔 다르크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녀는 "성 세실리아였으며, 가난한 이들의 수호천사이자, 그들의 거칠고 가냘픈 뮤즈"였다.

 

이제 50대 후반이 된 미셸은 지칠 줄 몰랐다. 그녀는 시를 짓고 여러 권의 난해한 소설을 썼으며, 끊임없이 연단으로 향했다. 석방된 이듬해 여름, 그녀는 줄 게드, 폴 라파르그, 수시니와 함께 "살인 및 약탈 선동" 혐의로 다시 한번 기소되었다.

 

그녀는 정부가 "도둑과 살인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 혐의를 받았다. "도둑은 체포되고 살인자는 죽임을 당한다. 그들을 물속에 던져버려라!" 미셸은 정확히 그 단어들을 사용했다는 점은 부인했으나, 그 어조만큼은 정확하다고 인정했는데 이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배심원단은 그녀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유죄 확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감옥에 보내는 것은 정부에 심각한 당혹감을 줄 수 있었기에 결국 그녀는 다시 수감되지 않고 사면되었다.

 

18881, 미셸이 르아브르에서 연설하던 중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브르타뉴인이 그녀를 쏘았다. 왼쪽 귀 뒤에 박힌 총알 부상은 잘 아물지 않았고, 한동안 그녀의 건강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게도, 미셸은 가해자의 재판에 출석하여 그가 악한 사회에 의해 미혹된 것이라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고,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미셸 생애의 이 시기는 블랑키스트 운동의 정점과 일치했다. 이 정치적 현상은 좌파에서 시작되어 세월이 흐르며 우파로 이동했으며, 3공화국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 특히 마지막에는 독일에 대한 복수를 원하는 이들을 하나로 묶었다. 미셸의 일반적인 원칙대로라면 이 운동의 최종 단계에 반대해야 했으나, 그녀는 개입을 피했다. 아마도 그녀의 친구 앙리 로슈포르가 열렬한 블랑키스트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인 게드처럼 미셸 역시 블랑키 운동을 그저 부르주아들의 투쟁일 뿐이며, 따라서 혁명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미셸은 제3공화국이라는 공통의 적을 둔 무정부주의자들과 왕당파들의 일시적인 동맹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녀를 통해 왕당파들은 무정부주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을 전달했다. 일부 왕당파들은 1917년 독일인들이 레닌을 이용했듯이 분명 미셸을 이용하고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일으키는 어떤 혼란이든 왕당파들의 명분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셸은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 상황에 전적으로 만족했다. 이제 그녀의 주요 적은 왕당파들이 아니라, 그녀가 혐오했던 '기회주의적' 공화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긴 '현실적 개혁주의자-가능주의(Possibilist)'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오늘날 보통 점진적 사회주의자로 분류되는 가능주의자들은 소규모 개혁을 통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완화하고 체제 내에서 권력을 쟁취하기를 희망했다. 미셸은 사실 가능주의자들이 부르주아를 자신들로 대체하려는 것 이상의 목표가 없다고 믿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지하는 소소한 개혁들은 사회 혁명을 지연시킬 뿐이라고 생각했다.

 

1889년 제2인터내셔널 창설 과정에서의 문제들은 이러한 이론적 차이를 잘 보여주었다. 1인터내셔널은 외부의 탄압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이미 수년 전부터 빈사 상태였다가 1876년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소멸 이후 제1인터내셔널은 생전에는 얻지 못했던 실효성 있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고, 프랑스 혁명 100주년인 1889, 이를 재건하기 위해 파리에서 가능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두 국제회의가 동시에 개최되어 대의원들이 양쪽을 오갔다. 미셸은 조직이나 조직 정치에 대한 관심 부족 때문인지 이 회의들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의 혼란스러운 창립 과정에서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노동절(May Day) 시위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1880년대 후반까지 미셸은 가난한 이들이 사회 혁명을 달성할 수단으로 '대파업(La grande grève)'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산업과 상업의 모든 분야를 중단시키고 마침내 사회 혁명을 이끌어낼 것"이었다. 대파업에 대한 꿈에도 불구하고, 노동절 시위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제한적이었다. 시위의 목적이 민중의 봉기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좌파를 홍보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셸은 더 이상 군중을 확신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분명 그녀는 점점 더 '행동에 의한 선전'과 소수 엘리트에 의해 고무되고 이끌리는 직접 행동에 대한 믿음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미셸은 늘 그래왔듯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었고, 1890년 노동절 시위 참여를 준비하던 중 행사 전날 체포되었다.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인 그녀는 감방의 가구들을 부수었고, 당국은 그 행동을 구실 삼아 그녀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수용하려 했다. 불분명한 이유로 내무부 장관 콩스탕이 직접 개입하여 수용 절차를 중단시키고 그녀를 석방했다.

 

미셸은 즉시 영국으로 떠났고, 189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아마도 거의 성공할 뻔했던 정신병원 수용 절차가 그녀를 겁나게 했을 것이다. 수용되는 것은 그녀가 수년 동안 품어온 공포였다. 어쩌면 그저 지쳤을 수도 있다. 어쨌든 영국은 외국 망명객들의 전통적인 안식처였고, 불랑제 운동 붕괴 후 망명한 로슈포르도 그곳에 있었다. 로슈포르는 그녀에게 생활비를 대주었고, 크로포트킨은 가능한 도움을 주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녀는 개인적인 접촉을 통해 영국의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 애썼으며늘 그렇듯 수중에 돈이 생기면 요청하는 이들에게 즉시 나누어 주었다런던의 최악의 슬럼가에서 "선한 여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무정부주의가 가장 악명을 떨쳤던 1890년부터 1895년 사이, , 한 번 짧게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 시기는 프랑스가 매일같이 폭탄 테러의 공포 속에 살던 때로, 1892년 봄 라바숄의 폭파 사건부터 189312월 하원 의사당 폭발, 18942월 카페 테르미누스 폭발에 이르기까지 가장 잔혹한 기간이었다. 미셸은 여성과 아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폭탄 테러에는 반대했지만, 무력 사용 자체는 계속해서 승인했다. 그녀는 라바숄을 "현대 전설의 영웅"이라 불렀고, 나중에는 하원 의사당 폭파도 승인했다.

 

1895년 미셸은 프랑스로 돌아와 7개월 동안 강연을 하고 시를 썼다. 이듬해 여름 그녀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제명을 확정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미셸은 그 진행 과정과 마르크스주의 정통성의 강요에 경악했다. 그녀는 그 회의가 "가장 훌륭하고 지적이며 헌신적인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라도 그가 대체하는 그 누구보다 더 나빠질 것임을 증명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오류성을 주장하고 파문을 일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능주의자들과의 결별처럼, 미셸과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단절도 완전해졌다.

 

1897년 봄, 67세가 된 미셸은 프랑스 전역을 도는 대규모 강연 투어를 가졌다.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으나, 미셸은 비밀 재판과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는 했어도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신념이 일시적으로 약해졌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40년 동안 혁명을 설교하거나 그 죄로 감옥에 갇혀 지내왔다. 게다가 청중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점점 쇠약해지는 건강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025월 프랑스에서 새로운 강연 시리즈를 시작했고, 런던에서의 짧은 휴식을 제외하고 1903년까지 이어갔다. 당시 그녀가 수년 동안 매료되었던 러시아는 혁명의 직전에 와 있는 듯 보였고, 특히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그곳의 사건들은 그녀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단호한 반군주제주의자였던 미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 없는 전쟁이 사회 혁명의 시작을 가져올 기회라는 점에 기뻐했다. 그녀는 19042월과 3월 초 프랑스에서 더 많은 강연을 했으나, 그 후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회복되었고, 대중이 치명적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녀의 병세가 널리 알려진 후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과거처럼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제 전설을 보러 온 것일 뿐이었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모여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말에 그녀는 알제리로 떠났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마르세유에서 병이 났다. 이 병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190519, 그녀는 마르세유의 호텔 드 로아지스(Hotel de l'Oasis)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좋아했을 법한 장관 중 하나가 되었다. 적기와 수많은 꽃, 그리고 노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무정부주의자, 반종교 단체 대표 등 2,000명의 조문객과 함께 장례 행렬은 마르세유에서 묘지까지 1킬로미터에 달했다. 추모식이 프랑스 전역과 런던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120일 그녀의 유해는 이장되어 파리로 옮겨졌고, 이틀 후 르발루아 페레(Levallois-Perret)에 있는 어머니 곁에 묻혔다. 언론은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의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바로 그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군중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벌어진 대학살은 또 다른 '피의 일요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는.

 

오늘날 미셸의 고향인 브롱쿠르(Vroncourt)에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고, 마을을 지나는 거리에는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다. 르발루아 페레에 있는 그녀의 묘지는1905년에 묻힌 곳이 아니라 1936년 인민전선 시절에 옮겨진 새 묘지이다여전히 익명의 손길이 놓아둔 꽃들로 채워져 있다. 당국은 그녀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과 거리도 만들었지만, 둘 다 파리시 경계를 바로 넘어서 그 바깥에 걸쳐 있다.

 

그녀는 이제 전설이다. 그녀가 그 전설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루이즈 미셸은 영웅적이었으나, 그녀 자신이 말했듯 "영웅적인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사건에 매료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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