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미셸 — "붉은 처녀"의 삶과 사상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 1830~1905)은 19세기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교사, 혁명가로, 파리 코뮌(1871)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한 명이다. "붉은 처녀(La Vierge Rouge)"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녀는 여성이 정치와 혁명의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던 시대에, 최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운 인물이었다. 그녀의 삶은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헌신과 끝없는 저항의 연속이었다.


출생과 성장 — 사생아에서 교사로

루이즈 미셸은 1830년 5월 29일, 프랑스 오트-마른(Haute-Marne) 주의 브롱코르(Vroncourt)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영주의 아들과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지만, 영주 가문의 조부모 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즐겨 읽고 시를 쓰는 문학적 감수성을 키웠으며, 볼테르와 루소 같은 계몽사상가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교사 자격을 취득한 그녀는 1856년 파리로 이주해 몽마르트르 지구에서 학교를 운영했다. 당시 공립학교 교사가 되려면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했는데, 미셸은 이를 거부하고 사립학교를 직접 세웠다. 그녀의 교실은 단순한 지식 전달의 공간이 아니라, 빈민과 노동자 자녀들에게 열려 있는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녀는 수업료를 받지 않거나 적게 받으며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쳤고, 이 시기에 이미 그녀의 사상적 지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파리 코뮌 — 혁명의 최전선에 서다

루이즈 미셸의 이름이 역사에 깊이 새겨진 것은 1871년 파리 코뮌을 통해서였다.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파리 시민들은 임시 자치 정부인 코뮌을 수립했다. 코뮌은 불과 72일간(3월 18일~5월 28일) 지속된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자치 정권으로, 이후 수많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미셸은 이 투쟁에서 가장 열렬하고 용맹한 전사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몽마르트르 여성 경비대를 조직하고 직접 총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지켰다. 간호사로 부상자를 돌보는 한편, 직접 소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코뮌의 이상, 즉 노동자의 자치, 교육의 무상화,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은 그녀의 신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피의 주간(Semaine sanglante)"으로 불리는 코뮌의 마지막 진압 과정에서 수만 명이 학살되었고, 미셸은 체포를 피하지 않고 스스로 자수했다.


재판과 유배 — 꺾이지 않는 의지

1871년 12월 재판에서 루이즈 미셸은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법정에서 "나는 사회의 적이다. 그러므로 나를 늑대와 함께 가두어라"라고 선언하며,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그녀는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오늘날 태평양의 섬나라)로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유배지에서도 그녀의 삶은 멈추지 않았다. 미셸은 현지 원주민 카낙(Kanak) 족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배웠다. 1878년 카낙 족이 식민 지배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켰을 때, 그녀는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몇 안 되는 프랑스인 중 하나였다. 유배지에서도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고, 식물을 채집하고 시를 쓰며 지적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유배 생활은 그녀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의 사상을 더욱 깊고 넓게 만들었다.


귀환과 아나키즘 — 끝없는 투쟁

1880년 사면령으로 파리에 돌아온 미셸은 더욱 급진적인 아나키즘 운동에 투신했다. 그녀는 표트르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같은 아나키스트 이론가들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1883년 파리에서 일어난 실업자 시위에서 빵집을 습격하는 군중을 이끈 혐의로 다시 투옥되었고, 이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하며 강연과 저술 활동을 벌였다.

그녀는 여성 해방 문제에도 적극적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나 부르주아적 여성 해방론에는 거리를 두었지만, 계급 해방과 여성 해방이 불가분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가난한 여성, 노동하는 여성, 식민지 원주민 여성의 삶에 주목하며, 혁명은 모든 억압받는 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삶과 유산

루이즈 미셸은 70대에도 강연을 다니며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05년 1월 9일, 강연 여행 중 마르세유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리로 운구된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시민이 몰려 애도를 표했다. 

루이즈 미셸은 억압에 맞선 저항의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기억된다. 그녀는 여성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했으며, 교육·아나키즘·식민지 해방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를 하나의 삶으로 엮어낸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녀의 삶은 "진정한 혁명가는 이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이즈 미셸 연보


1830년 5월 29일 오트-마른 지방 브롱쿠르 성에서 출생. 하녀였던 마리 안 미셸의 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성주의 아들 로랑 드마이로 추정. 아버지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자유주의적 교육과 사랑을 받으며 성장. 빅토르 위고와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


1851년 쇼몽에서 교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고, 이후 센에마른 지방 라니로 이동.


1853년 오들롱쿠르에 자유 학교 개교. 제국에 대한 충성 서약 거부. 1855년 오트-마른 지방 미예르에 학교 개교.


활동가 시절


1856~1868년 파리에서 집필 활동과 사회운동을 하며 교사로 활동함. 주요 저서:『어둠 속의 빛, 바보도 미치광이도 없는 세상』,『유형 지의 책』, 『에르만의 책』(1861),『삶과 죽음을 관통하며』(1864)


1868~1869년 조르주 클레망소의 지원을 받아 최초의 민중 무료 급식소 설립.


1870년 정치 활동이 본격화. 제국 타도 투쟁에 참여하고, 여러 야당 신문에 기고하며, 쥘 발레스, 외젠 바를랭, 테오필 페레와 함께 공개 집회 개최.


1870년 8월 15일 블랑키주의자 외드와 브리도를 지지하는 시위 참여. 1870년 9월 스당 전투 패배로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무너짐. 제3공화국 선포.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함. 굴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파리 시민들이 항복을 거부함.


1870년 11월 18구 경계위원회 의장으로 선출. ‘위기의 조국 클럽’에 적극 참여.


1871년 2~3월 티에르가 행정부 수반으로 선출되고, 파리 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르 언덕의 대포를 회수하기로 결정.


1871년 3월 28일 민중 봉기가 파리 전역에서 승리하고, 파리코뮌이 시청에서 선포됨. 국민의회는 베르사유로 도피.


1871년 4월 3일 베르사유 정부군이 파리를 공격함. 루이즈 미셸은 국민방위군 복장을 하고 이시 요새, 클라마르, 뇌이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 부상자 구호 활동.


1871년 5월 22~28일 ‘피의 주간’. 베르사유 정부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3만 명이 넘는 코뮌 지지자들이 학살됨.


1871년 5월 24일 어머니가 포로로 잡히자, 루이즈 미셸은 어머니를 석방시키기 위해 베르사유군에 자수. 베르사유와 아라스에 수감.


감옥과 유배 생활


1871년 11월 28일 루이즈 미셸이 깊이 사랑했던 코뮌 지도자 테오필 페레 처형.


1871년 12월 16일 루이즈 미셸, 군사법정에 출두해 스스로 사형을 요구함. 누벨칼레도니 유배형을 선고받음.


1871년 12월 21일 오베리브 감옥으로 이송되어 20개월간 수감 생활을 함. 주요 저서: 『새해의 책, 짧은 이야기들』 『어린이를 위한 이 야기와 전설』(1872)


1873년 8월 28일 로슈포르 항에서 ‘비르지니’ 호를 타고 누벨칼레도니로 출발함. 4개월간의 항해 끝에 누벨칼레도니에 도착.


1873년 12월 10일 뒤코 반도의 눔보에 정착함. 루이즈 미셸은 현지 원주민인 카나크 족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문화를 연구하며 교류했다. 1878년 그들의 봉기 때 이들을 지지함.


1879년 누메아에 학교를 개교함.


1880년 11월 파리 코뮌 가담자들에 대한 전면 사면령(7월)이 내려진 후, 유배자 전원 사면. 파리로 귀환.


사회 진보를 위한 투쟁


1880년 11월 21일 엘리제-몽마르트르에서 강연. 이후 수백 차례 강연 시작.


1881년 1월 4일 10만 명의 군중 앞에서 블랑키의 추도사를 낭독함. 1881년 7월 런던에서 열린 국제 무정부주의자 대회에 참석함. 주요 저서: 『마지막 파업』(1881) 『비참함』, 『청년 이본』, 『나딘』, 『프로메테우스』(1882) 『제국의 사생아』, 『민중의 딸』, 『농민들』 (1883),『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와 전설』(1884)


1882년 2월 24 일 마리 페레 사망.


1883년 3월 9일 에밀 푸제와 함께 앵발리드에서 실업자 시위(검은 깃발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시위)를 주도했다가 체포.


1883년 3월 체포된 후, 그해 6월에 6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1885년 클레르몽 중앙교도소로 이송됨. 1월 3일어머니 사망. 5월22일 스승이자 오랜 친구였던 빅토르 위고 사망,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함.


1886년 1월 17일. 대통령 특별 사면으로 약 2년 10개월 만에 출소. 르 발루아-페레의 빅토르 위고 거리 89번지에 거주. 주요 저서: 『카나크족의 전설과 서사시』(1885),『인간 미생물』,『회고록』 (1886),『새로운 시대』,『마지막 사상』,『칼레도니아 회상』(1887)


1888년 1월 22일 르아브르에서 연설 중 피에르 뤼카에게 총격을 받아 부상당함.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고소를 거부함. 주요 저서:『순환체계에 따른 백과사전 강독』,『붉은 수탉』,『새로운 세계』,『시대의 범죄들』


1890년 4월 30일 생테티엔과 비엔에서 강연.


1890년 7월 29일 런던으로 망명(~1905) 샤를로트 보벨과 함께 학교를 개교. 주요 저서:『점령』,『가불레트의 딸들』


1895년 세바스티앵 포르와 무정부주의 신문 《리베르테르》를 창간. 1896년 7월 27일 런던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 참석. 무정부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의 분열을 목격.


1897년 세바스티앵 포르, 샤를로트 보벨과 함께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강연 활동.


1898~1903년 장 비옹과 함께 프랑스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하고, 이후 에르네스트 지로와 함께 알제리에서도 강연함. 인권 결사에 가입함. 주요 저서: 『코뮌: 역사와 회상』, 『꿈』, 『코뮌』(1898년)


1904년 5월 16일 폐렴으로 고통받으며 유언장을 작성함. 테오필 페레의 묘 근처, 르발루아-페레 묘지에서 어머니 곁에 묻히기를 요청. 주요 저서:『코뮌 이전』


1905년 1월 9일 마르세유의 오아시스 호텔(현재의 DUC 호텔)에서 별세. 1905년 1월 21일 르발루아-페레에서 장례식이 거행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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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고통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젯거리다. 고통을 자각하는 건 동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의 뇌는 물리적 고통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 구조 사이의 연결성을 의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보다 치명적이다. 동물은 고통에 즉물적으로 반응하다가 극에 달하면 죽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강구해왔다. 그래서 고통이 완화되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기계와 섞여 변형되는 인간의 몸


신체의 고통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만물에게 불가피하다. 바이러스나 병원체에 의해서든, 사고에 의해서든, 또는 애초에 몸이 지닌 자기 재구성 과정의 한 방식으로든 고통은 상시적이다. 고통에 대한 불안이나 암시는 정신적 스트레스로도 이어진다. 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혹은 사고나 자연재해에 희생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삶의 기본 전제마저 되짚게 만들기도 한다. 그에 대한 대처 능력을 마련하려는 것 자체가 때로 더 큰 고통을 생산하기도 한다. 고통은 삶의 기본 조건과도 같다. 그래서 고통은 모든 철학과 과학의 주요 전제가 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그로 인해 변형되는 인간의 물리적 형질 및 신체와 기계 문명 사이의 기묘한 접합 또는 분열 양상에 대해 줄곧 탐구해 온 감독이다. 


그의 영화는 짐짓 뚱딴지같으면서도 초지일관하는 면이 있다. 작품 대부분이 SF나 B급 호러 사이 어디에선가 혼자만의 괴이한 공간과 물질(특히 인체)을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SF나 호러 전문 감독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다. B급 호러의 형식을 취한 초기 작품들도 특유의 신체 변형과 기계 문명의 뒤틀린 비전을 독특하게 뒤섞은 묵직한 메시지로 독창성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그 괴이한 독창성이 온갖 편견과 숭앙의 갈림길이 되었다. “내 영화가 난해하다고? 이 사람아, 세상이 더 난해해!”라며 느긋하고 건조하게, 옆구리 쿡쿡 찌르는 듯한 일침을 나로선 꽤 즐기는 편이다. 


그중 <크래시>(1996)는 내게 아직도 각별하게 남아있다. 크로넨버그가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G. 발라드의 문제작(1973년에 초판이 나왔다)을 그대로 영상에 옮긴 작품이다. 소설이 발표됐을 때도, 영화가 개봉됐을 때도 극심한 논란이 일었다. 역겹고 비틀리고 왜곡된 성 관념으로 인간을 모욕하는 작품이라는 악평도 드셌다. 결국 엽기적인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지 않겠냐는 비난인 것인데, 영화화되기 직전 제임스 발라드는 이런 발언을 했다. 


 "나는 『크래시』 도처에서 자동차를 하나의 성적 이미지로써 현대 사회의 삶에 대한 총체적 은유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소설은 성적 내용과는 별도로 꽤나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크래시』가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한 최초의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라 여기고 싶다. 어떻게 보면, 포르노그래피는 가장 옥죄고 무자비한 방식으로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이용하고 착취하는지를 다룬 가장 정치적 형태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 『크래시』 (제임스 발라드, 김미정 옮김, 그책, 2011) ‘들어가는 말’에서 


50년 전에 쓰인 원작 소설과, 3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자동차와 섹스하며 기존 도덕률을 무참할 정도로 까뭉개는 그 작품의 강렬도는 여전히 유효하고 치명적이다. 남녀가 대놓고 보란 듯 벌거벗은 채 살을 섞는 영상은 이제 포르노그래피 축에도 못 낀다. 세계의 모든 사건과 사고를 전하면서 서로를 “이용”하고 “착취”하는 가상 시스템의 전파력 자체가 무엇보다 농밀한 포르노그래피의 전시장인 것이다. 정치가, 언론이,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른 테크놀로지의 이념이 현재 그러하다. <크래시>는 그렇게 벌어지고 깨진 ‘틈’을 훤히 들여다보라고 쓰이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포르노그래피의 노예였다. 포르노그래피는 의외로 모든 걸 보여주지 않는다. 보지 말라고 눈 감게 하거나, 듣지 말라고 귀를 막는 게 포르노그래피의 진짜 목적이다. 내가 나임을,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순간, 망념의 쇼가 끝나고 진짜 인생이 시작될 테니까. 진짜 인생이 가득해지면 가짜로 꿀을 바르고 가짜로 피를 바른 것 앞에서 당신의 욕망은 세상의 ‘진짜’를 알려고 들 테니까. 그때, 세상은 멸망한다. 가치 판단은 없다. 멸망은 여전히 ‘근미래’다. 가깝지만, 아직 알 수 없는 미래. 이미 세상은 미래마저 잡아먹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크로넨버그는 집요하고 줄기차다. 인간의 육체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를 뒤섞은 그만의 독특한 과학적이고도 묵시록적인 은유 체계가 <미래의 범죄들>로 향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 진화의 끝. 이 영화는 그가 평생(벌써 여든을 훌쩍 넘겼다) 만들었던 영화의 종합판으로 여겨진다. 


노년 거장, 자신의 작품들을 종합하다


2022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되어 기예르모 델 토로가 격찬했다는 뉴스 한편엔 영화 시작 10분 만에 극장을 뛰쳐나간 관객이 수두룩했다는 소식도 있다. 과연 크로넨버그 영화다운 반응이다. 한국 개봉은 아직 예정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을 여담 삼아 얹자면, <폭력의 역사>(2007) 이후 그의 페르소나가 된 비고 모텐슨은 이 영화에서 실제로 외모가 크로넨버그를 연상케 한다. 말을 타다가 허리를 다쳐 영화 중 절반 이상을 누워있는 연기로 일관했다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적확하기도 하다. 그가 연기한 행위예술가 사울 텐서는 여러모로 크로넨버그 자신의 모습이라 여겨졌다. 괴이하고 묵시록적인 주제를 상상 그 이상의 영상 테크닉으로 충격을 안겨주는 예술가의 초상. 이 영화가 왠지 자전적이라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영화는 어느 바닷가에서 시작한다. 옆으로 뒤집힌 채 바다에 반쯤 침몰한 배(유조선?)가 보이고 한 아이가 갯벌에서 숟가락으로 진창을 뒤적거리고 있다. 멀리서 아이의 엄마가 아이에게 외친다. “아무거나 먹으면 안 돼!” 아이는 일견 평범해 보인다. 이 대사가 뭘 의미하는지는 얼마 안 가 밝혀진다. 곧이어 아이가 화장실에서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비스킷인 양 야금야금 뜯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참다못한 아이 엄마가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그러면서 인간의 장기 변화로 인한 식성 및 성격, 나아가 신체의 변형을 모티프 삼아 행위 예술을 구현하는 사울 텐서의 작업장이 나온다. 


사울은 인간의 장기 형태로 꿈틀대는 침대에서 잠을 자는 중이다. 레아 세두가 연기한 조력자 카프리스가 곧바로 등장한다. 아무거나 먹는 아이와 사울의 퍼포먼스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밝히는 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생략하겠다. 그 이후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은 스토리를 알려주는 것으로 힌트를 얻을 게 거의 없는 영화이다. 그의 작품은 직접 체험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감상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체험은 단순히 객석에 앉아 눈과 귀를 열어 두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너무 황당하고 엽기적이어서 되레 내가 죽을 때까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몸속 내장들을 들여다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걸 어찌 일설로 다 안내할 수 있으랴. 


인간은 욕망으로 진화하여 욕망으로 종말한다


크로넨버그는 2013년 <코스모폴리스>를 만든 적 있다. 하루 종일 거대한 리무진에서 생활하며 온갖 투자를 통해 뉴욕을 지배하는 젊은 자본가가 주인공인 영화다. 이 영화 역시 그저 상류사회의 호화판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다. 크로넨버그는 일명 ‘바디호러’라 불리는 스타일의 영화 외에도 <스파이더>(2005), <폭력의 역사>(2007), <이스턴 프라미스>(2008) 등 인간의 심리 기저에 잠복한 폭력성과 피해의식, 그리고 그것들을 점점 극대화시키는 세계 전체의 체계와 자본의 음모 등을 끈적끈적하게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애증 관계를 기묘한 심리 스릴러로 표현한 <데인저러스 메소드>(2012)는 그나마 온건(?)한 편에 속한다. 앞서 <미래의 범죄들>이 크로넨버그 영화의 종합판 같다는 건 그런 의미다. 


기계 문명과 인간 사이의 죽이고 살리고 먹고 먹히면서 첨단과 파멸을 공유하는 설정, 그리고 그 안에 내재한 인간의 원시적 섹슈얼리티와 폭력성에 대한 진단, 자연적 진화를 지나 점점 다른 물질로 변해가고 있는 인간에 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통찰들. 그런 주제를 믿기 힘든 물질들을 재구성해 각성케 하는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미 자신도 모르게 얽혀있는 세계의 첨예한 음모에 질려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어느 심원한 밑바닥에서 캐어낸 진귀하고 색다른 구성체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속도를 제어하는 각성의 진미를 느껴버린 사람 또한 별반 다를 것 없다. 세계는 이미 인간이 나아갈 바를 인간 스스로 정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 시발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었고, 그 종말 역시 인간의 욕망을 폭력으로 대체하는 인간의 오만에 의할 것이다. 


기계들이 있고 인간이 있다. 인간의 과학적 확증과 오만을 통해 만들어진 기계들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기계 문명이 진보할수록 거기서 발생한 본질적 폐해들이 거꾸로 증명된다. 그리고 그러한 역류가 악과 정의에 대한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며 인간 자체를 병들게 한다, 문장이 복잡한가. 사실 자체가 복잡한 것인데, 인간 대부분은 그 사실 자체의 복잡성에 대해 숙고하는 걸 괴로워한다. 아무리 기계가 인간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켜 줄 수 있더라도, 모든 병이 그렇듯, 근본 치료는 인간이 왜 병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거쳐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성찰 자체가 만병통치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역시 인간에겐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복잡한 존재의 사슬을 잠시나마 일깨워주는 장면이 있다.


인간은 잘못 만들어진 로봇인가


​눈과 입을 꿰맨 채 온몸에 수십 개의 귀가 붙어있는 댄서가 춤을 추는 장면. 굉장히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느낌마저 든다. 보지도 먹지도 못하게 구속된 육체로 수십 개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과연 어떤 소리일까. 춤은 격렬하기도 나긋하기도 하다. 댄서는 아무 표정이 없다. 물론, 수십 개의 귀는 사울이 인공적으로 장착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퍼포먼스가 그렇듯, 이것은 그저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사실, 자본과 정치가 작동하는 체계도 쇼의 속성을 지녔다. 그리고, 영화도 당연히 쇼다. 그런데 그 쇼가 이미 몸과 정신에 내장된 실체처럼 세계라는 장기판을 들었다 놨다 하는 세상. 진실도 정의도 악도 폭력도 그렇게 꾸며지고 가공된다. 인간은 이제 만들어 붙여진 수십 개의 귀처럼 인간 스스로를 가공하고 고통을 위장한다. 위장함으로써 없애려 한다. 인간은 이제 잘못 만들어진 로봇과도 같다. 죽음을 물질화한 것을 먹고, 물질이 된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각은 역시 각자의 몫이다. 




 

 

 

 



극장, 극장에는상훈이형이있다, 극장에는상훈이형이있다봉준호김지운킴스비디오김용만대표김시선오늘의시선박정범추천사불란서책방영화이야기영화책알라딘북펀드, 김지운, 니체, 디오게네스, 루소, 루이부뉘엘, 루이즈미셸, 미셀옹프레, 미학, 배우연기자배우수업메소드배우훈련연기수업연기학과배우지망생, 뱀파이어, 봉준호, 북펀드, 불란서책방, 사르트르, 사회학, 서양미술, 성소수자, 세계영화사, 슬픔의긍지, 시네마, 시네필, 시도니가브리엘콜레트, 에세이산문집양극성장애불안장애메니에르수면장애정병일기한정선, 여성, 여성혁명가, 연기배우배우수업연기훈련연기학과연극영화연기자, 연기배우배우수업연기훈련연기학과연극영화연기자연기입시, 영화, 영화리뷰, 영화비평, 영화사, 영화에세이, 영화에세이영화영화리뷰영화의이해영화이야기, 영화의역사, 영화의이해, 영화이론, 영화이야기, 영화학, 예술, 예술가, 욕망의모호한대상, 입체주의, 입체파, 젠더, 조르주브라크, 철학, 철학자의뱃속, 최면, 칸트, 콜레트, 파리코뮌, 페미니즘, 펠릭스발로통, 푸리에, 프랑스문학, 프랑스소설, 프랑스여성, 프랑스역사, 프랑스혁명, 피에르루이스, 피카소, 한상훈, 현대미술, 호모포비, 화가, 회고록, 회상록, 회화, Col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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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처음 어둠에서 탄생했다. 물론, 역사에 기록된 바로는 18951228일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상영한 것이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뤼미에르(Lumière)’을 뜻한다). 그들은 세상이라는 어두운 벽면에 새로운 문명의 빛을 쏘았다고도 할 수 있다. 정확히 130년 전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이 아니다. 영화는 본래 어둠 속에 빛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화관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영화가 지금도 그렇다. 영화 감상의 태도 및 생태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은 OTT 채널 감상 등 가정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어떤 물리적 조명(照明)의 유무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일종의 비유나 상징으로 여겨도 된다. 또는 그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내 고집을 투사하는 것이라 봐도 부인하지 않겠다. 단지, 내게 영화란 어둠을 먹고 사는 물질적 환영이라는 사실만 강조하고 싶다.

 

나는 영화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 종사자도 아니다. 그저, 오랫동안 시를 쓰고 때로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영화와는 아주 가까울 수도 있고, 때론 상반되거나 빗나갈 수도 있는 예술적 지향을 지닌 사람일 뿐이다. 자신을 스스로 어떠어떠한 사람이라 규정하는 건 지나친 자기 비하나 자기 치장에 가까울 것이나, 내가 종종 이 세상의 중심에서 어느 정도 엇나간 위치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그 엇나간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 모음집이자, 엇나감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에 대한 감상이라 해도 무방하다.

 

영화보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하고 황당무계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이다. 딱히 요즘만 그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소위 상식과 표준이라는 것 자체를 오도하고 호도하는 일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되레 상식과 표준의 본질을 따져 묻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상식과 표준자체가 때론 인간을 억압하고, 눈 귀를 가리며, 사지를 친친 감아 버리기도 한다. 영화는 그 이상한 현실의 역설을 역상으로 되비추는 거름판과도 같다. 그래서 생각해 보는바, 영화는 오히려 더 현실보다 낯설고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함으로써 현실이 가려버리는 어떤 흑막(?)들을 거꾸로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영화들은 그런 기준으로 내게 포착된 작품들이다.

 

반복건대, 영화는 어둠에서 처음 탄생했다. 어둠은 현실이 감추고 있거나 현실을 감추고 있는 무언가의 흑막과도 같다. 누가 조작했는지, 혹은 어떻게 사람의 눈 귀를 가리면서 허상의 빛에 홀리도록 만들었는지를 새삼 따지는 건 별로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세상에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어둠은 항상 존재한다는 근본 사실만 따져본다. 시공 포괄하여 세계는 어둠 속에서 작동한다. 삶과 세계의 이면과 후면이 모두 쉬이 판별할 수 없는 어둠 속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누군가 총을 쏘듯 빛을 쏜다. 현실에서 떼어낸 듯 여겨지는 어떤 형상과 소리와 이야기들이 허공에서 빛의 너울로 일렁인다. 현실을 투영했다는 그것으로 오히려 현실을 뒤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내가 영화를 감상하는 기본이다. 내게 영화는 망상의 거울과도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나의 현실이기도, 나의 꿈이기도 하다. 그 모든 사념을 배반하는 심정으로 독자들은 이 책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하시라.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총 한 자루를 건네는 기분이다. 탄창엔 총알이 단 한 발 남았을 수도, 꽉 차 있을 수도 있다. 방아쇠를 당기면 진짜 죽을 수도, 다시 살 수도 있다. 죽든 살든, 새삼 현실도 영화도 더없이 낯설어진다면 이 책은 그나마 효능 있는 물건으로 누군가에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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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붉은 처녀'로서 명성을 얻은 루이즈 미셸은 프랑스 좌파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대영박물관에 앉아 팜플렛을 쓰고 있을 때, 미셸은 파리의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프랑스 정부군과 맞서고 있었다. 그녀의 동시대 인물들이 이제 막 식민주의를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뉴칼레도니아의 죄수 신분으로 1878년 카나카(Kanaka) 봉기에 참여했다. 


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자유까지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과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1830년 5월 29일 사생아로 태어난 루이즈 미셸은 오트마른(Haute-Marne)에 있는 반쯤 허물어진 요새화된 저택에서 어머니와 친조부모의 손에 자랐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에티엔 샤를 드마이(Etienne-Charles Demahis)는 귀족의 후손이었으나,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화주의적 지지의 표시로 자신의 성을 '드 마이(De Mahis)'에서 덜 화려한 '드마이(Demahis)'로 바꾸었다.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인인 마리 안(또는 마리안) 미셸과 더 이상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그의 아들 로랑 사이에서 루이즈가 태어났을 때 브롱쿠르(Vroncourt) 마을의 시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루이즈는 마치 적통인 드마이 가문의 손녀처럼 양육되었고, 친조부모가 사망한 후 여교사가 되어 처음에는 오트마른에서, 나중에는 파리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혁명적인 꿈을 꾸기 시작했고, 루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2제국이 황혼에 접어들 때 급진적인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1870년 보불전쟁과 프로이센의 파리 포위 공격 당시, 그녀는 수 세기 동안 불만을 품은 빈민들이 거주해 온 몽마르트르 지역 혁명 단체의 주요 일원이었다.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파리 시민들이 정부가 자신들의 공화국을 훔치려 한다고 믿고 반란을 일으킨 파리 코뮌 기간 동안, 미셸은 사건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며 봉기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떠올랐다.


‘피의 일주일’ 1871년 5월 베르사유 정부군이 코뮌을 진압했을 때, 미셸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1873년 죄수 호송선을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이송되었다. 6년 동안 수도 누메아 인근의 형벌 식민지에서 가혹한 조건 속에 살았으며, 이후 수도에서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며 지냈다. 여론의 압박에 따라 정부가 코뮌 가담자들에게 내린 1880년 일반 사면령 이후,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와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미셸이 귀국했을 때 거대한 대중 집회가 그녀를 맞이했으나, 그녀가 혁명진영 내에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는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에 무지했고, 급진 세력 내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얻은 인물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그 어떤 '전설'에게도 내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얻는 대중적 지지는 여전히 엄청났으며, 이후 몇 년간 파리와 지방, 그리고 해외에서 열린 그녀의 강연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 소란을 이룰 정도였다.


1882년 미셸은 치안 문란 죄로 체포되어 2주간 감옥에서 보냈다. 이어 1883년 봄, 앵발리드에서 열린 ‘빵과 일자리’시위 직후, 그녀는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깃발을 들고 파리 전역에서 군중을 이끌었다. 그녀는 폭동을 일으키고 추종자들에게 빵집 약탈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재판에서 실질적인 변론을 거부한 그녀는 6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년 후 사면된 그녀는 단호하게 강연과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며, 급진적인 대중은 그녀를 '위대한 시민(la grande citoyenne)'으로 예우했다. 1890년부터 1905년까지 영국에 머물며 유럽을 돌며 강연 투어에 나섰으며 1905년 그녀가 사망했을 때도 강연 투어 중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수만의 인파가 참여한 가운데 프랑스의 3대에 걸친 혁명 정서가 거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즈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린 시절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품었던 막연한 동정과 이후 유토피아적 혁명에 바쳤던 막연한 헌신을 거쳐 무정부주의라는 신념에 도달했다고 선언한다. 그녀는 훗날 자신의 무정부주의로의 전향이 죄수 호송선 비르지니(Virginie)호를 타고 뉴칼레도니아로 가던 넉 달의 항해 중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개종시킨 나탈리 르멜(Natalie Lemel)과 여정을 함께했었다. 미셸은 회고록에서 1883년 1월 무정부주의자들의 '리옹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녀는 회고록에 "나는 그곳에 기록된 모든 사상을 공유한다"라고 적으며 해당 문서의 전문을 인용했다.


하지만 미셸의 무정부주의는 이론적이라기보다 감성적이었다. 사실 그녀는 당대와 과거의 혁명 저작물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녀가 라메네(Lamennais)를 읽은 것은 확실하며, 프루동(Proudhon)을 읽었을 가능성도 크다. 블랑키(Blanqui)나 바쿠닌(Bakunin)의 사상은 당시 널리 퍼져 있었기에 당연히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들의 저작을 직접 읽었을 가능성은 낮다. 마르크스주의는 회고록에서는 거의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데, 이는 그녀가 마르크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이 회고록 출간 수년 후인 1890년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유권에 대한 관점, 착취에 대한 인식, 과학의 역할에 대한 주장, 그리고 인류의 근본적인 선함에 대한 비전에서 전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사회 혁명에 대한 염원에서도 그녀는 그 형태와 성격에 대해 일관적이었다. 즉, 혁명이란 불의와 착취에 대항하여 민중이 일으키는 자발적인 봉기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민중의 자발적 봉기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간접적으로나마 그녀가 많은 무정부주의자가 택했던 테러의 승인에서 한 발 비켜나가게 한다. 암살은 도구로서 아주 가끔만 언급한다. 한 번은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살해하는 것을 논했고, 또 다른 때는 아돌프 티에르를 암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두 사람을 살해하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준비는 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하게, 그녀가 폭발물을 사용한 유일한 사례는 동상을 폭파하려다 실패한 시도뿐이었다. 그녀는 "폭군 살해는 폭정의 머리가 하나이거나 기껏해야 적은 수일 때만 실용적이다. 그것이 히드라(머리가 여럿인 괴물)일 때는 오직 혁명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다"라고 적었다. 그녀는 혁명의 모든 지도자가 혁명을 완수하는 과정에서 전사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도 언급했는데, 그래야만 민중이 살아남은 참모진과 다툴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면 어떻게든 무정부주의적 꿈이 실현되리라는 것이었다.


E. H. 카(E. H. Carr)의 적절한 표현을 빌려 "낭만주의 교리의 논리적 결말"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는 정의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 핵심—개인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모든 형태의 정치 조직에 대한 혐오, 인간의 타고난 선함에 대한 믿음—은 미셸의 생각과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미셸이 무정부주의를 찾은 것인지 무정부주의가 미셸을 찾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회고록을 집필할 당시 그녀는 진보가 필연적이며, 정부는 그 어떤 정부든 악하다는 점을 확고하게 믿었다. "권력은 악이다"라는 그녀의 진술은 모든 무정부주의 체계의 핵심을 형성한다.


그녀는 역사를 자유로운 인류가 어떻게든 노예화되어 온 이야기로 보았으며 과거에 대한 관심은 미래에 대한 희망만큼이나 컸다. 과거에 대한 그녀의 비전이 비록 신화와 괴물로 가득 찬 낭만적인 것이었을지라도, 그것은 미래에 대한 그녀의 낭만적인 꿈과 쉽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녀에게 과거와 미래는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안타깝지만, 미셸의 희망—그리고 역사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라는 낭만적인 꿈은 미래의 물결이 아니라 쇠퇴해가는 세력이었다. 수치상으로 볼 때 프랑스에서 무정부주의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1890년대의 폭력 사태 이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의 기간이었으나, 그 수십 년 동안 무정부주의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힘은 노동자 자치조직, 다양한 노선과 전략을 품은 노동총연맹(CGT), 그리고 정파 간의 내분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루이즈 미셸이 꿈꾸었던 무정부주의, 즉 사회 혁명과 착취의 종말로 이어지는 형태 없는 민중 봉기는 세부 사항과 방법론을 둘러싼 화해 불가능한 말다툼 속으로 사라졌다. 그 꿈은 흩어지더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미셸은 이론가가 아니었던 것처럼 조직가도 아니었다. 시위와 조직을 구상하는 초라하고 어두운 방들은 미셸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녀는 1882년 한 연설에서 "모든 혁명이 불충분했던 이유는 그것들이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조직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는데, 가까운 시점에 가난하고 착취당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압도적인 수와 의지의 힘, 그리고 그들 명분의 정당성을 통해 구체제가 자신들 앞에서 시들어 버리게 될 것이라고 단호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론가도 조직가도 아니었던 미셸은 프랑스 급진파들 사이에서 또 다른 역할을 채웠다. 베를렌은 그녀를 "잔 다르크에 가까운 인물"이라 불렀다. 무정부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분명 낭만주의자였던 빅토르 위고는 어느 시의 초고 제목을 '루이즈 미셸'이라고 지었으며, 「남자보다 위대한(Viro Major)」으로로 제목이 바뀐 이 긴 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는 이들은 알리라... 모두를 위해 바쳐진 당신의 나날들, 밤들, 심려들, 눈물들을, 타인을 돕느라 스스로를 잊어버린 당신을, 사도의 불꽃과도 같은 당신의 언어들을, 비인간적인 모든 것들을 향한 당신의 긴 증오의 시선을, 그리고 당신의 두 손으로 녹여주던 아이들의 발을..."


위고는 미셸이 영웅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은 일은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위고는 미셸이 다음과 같은 존재라고 결론지었다.

"...두 정신이 뒤섞인 존재 ...거대하고 폭풍우 치는 심장 밑바닥에서 보이는 별과 같은 것들의 신성한 혼돈 ...불꽃 속에서 보이는 광채


당신은 여인의 몸을 하고 있지만, 그 영혼은 위대한 남성(Viro Major)보다 더 거대하다."


모든 운동에는 예언자와 입법자, 죄인과 변절자, 순교자와 성인이 필요하다. 프랑스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미셸은 순교자이자 성인—즉, '붉은 처녀'였다.


미셸의 지적 호기심은 엄청났고 지식에 대한 갈증은 갈구해도 끝이 없었다. 그녀의 회고록 전반에는 음악, 악기, 교수법, 동물 학대, 여성의 지위, 카나리아 제도에서 통용되는 화폐, 곤충, 카나크 원주민 인류학, 날씨, 식물학 등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주제들이 흐르고 있다. 목록은 끝이 없다. 어린 시절 그녀는 자신의 탑 방에 동물 해골을 수집했다. 파리에서 여교사로 지낼 때는 바쁜 수업 일정에도 불구하고 물리, 화학, 역사, 심지어 법학 수업까지 청강했다. 감옥에서는 책과 시를 썼고, 뉴칼레도니아에서는 동식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파파야 나무의 황달병 예방 접종을 실험하기도 했다.


그녀가 회고록에서 드러낸 내면의 삶은 분명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전설, 맹수, 민속 영웅들이 그녀의 환상 속에서 뒤섞였으며, 그녀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을 결코 구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초기 생애가 "꿈과 학업으로 이루어진" 시기였으며, 이는 삶의 두 번째 부분인 "투쟁의 시기"를 위한 준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파리 포위전과 코뮌이라는 깨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대로 행동했다. 꿈과 행동은 하나였으며,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 둘은 외견상 구분이 불가능했다. 어린 시절에 놀이처럼 상연했던 교수대 연극의 연설을 그녀는 1871년 재판관들 앞에서 실제로 쏟아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드라마를 만들고 그 안에서 주연을 맡기 마련인데, 미셸은 자기 자신을 연기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드루이드 여사제, 발키리, 베스탈 처녀(성스러운 처녀)로 여겼으며, 기이한 악령과 신비로운 환영 등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그녀의 실재 삶 속을 지나갔다. 1860년대의 어느 날, 그녀는 친구 빅토린과 함께 어린 시절 집 근처의 깊은 숲속을 걸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숲속을 거의 소리 없이 가로지르며 늑대 한 마리가 그들 곁에서 발맞추어 걸었다고 한다. 늑대가 정말 그곳에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1860년대에는 오트마른 지역조차 늑대의 수가 적었으나, 그 맹수는 미셸의 마음속에 분명하고 진실하게 존재했다.


본문의 주요 준비 과정이 감옥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셸이 공적인 기록이 있는 사건들을 서술할 때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다. 뉴칼레도니아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투옥되지 않았을 때조차 매일 경찰 요원들의 감시를 받았다. 그들의 보고서가 남아 있기에, 1881년부터 1883년까지 그리고 1886년부터 1889년까지의 그녀의 삶은 객관적이지는 않을지언정 뒷받침할 만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어린 시절과 여교사 시절에 대해서는 그녀의 기억이 거의 유일한 기록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일부 태도들은 오직 그녀의 입을 통해서만 진실로 남을 것이다. 아마도 미셸은 환상을 구축한 뒤 그것을 실현하며 살았거나, 혹은 회고적으로 환상을 활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회고록 집필자 외에 자기의 삶을 다시 한번 살 기회를 얻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셸은 회고록이 빠지기 쉬운 자기과시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우며, 심지어 자신의 중요성을 소홀히 다루기까지 한다. 그녀는 코뮌 기간 여성 감시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파리 포위 공격(파리 포위전-보불전쟁) 당시 그녀는 조르주 클레망소의 도움 덕분에 약 200명의 아이를 보살피며 일상적인 복지를 책임졌고 그 일을 아주 잘 해냈으나, 그녀의 회고록에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비록 그녀의 재판 중 하나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뉴칼레도니아 유배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런던에서 열린 크로포트킨의 국제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석했다. 그녀는 그 여행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곳에서의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때때로 그녀의 회고록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장엄한 몸짓으로 매혹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그것이 정확한 사실이 아닌 경우도 있지만, 1886년의 이러한 서술들은 루이즈 미셸이 자기의 삶을 진정으로 바라보았던 방식이거나, 혹은 타인에게 드러내려 했던 방식을 나타낸다. 그 효과란 그녀에세 선전의 의미일 것이며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 회상록은 미셸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뜬 상황에서 쓰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쉰여섯 살의 이 혁명가는 모든 것을 혁명에 희생했다. 아마도 자신이 처한 현재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아를 훗날의 혁명가 모습으로 소급하여 만들 수밖에 없었을지도. 이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할아버지의 볼테르적 가르침 덕분에 처음부터 단호하게 반교회적이었다고 자신을 묘사하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겉보기에 적절히 종교적인 아이였다. 경건한 고모의 열렬한 가르침을 통해 그녀가 신비주의적 가톨릭에 매료되었던 흔적들이다. 이는 훗날 혁명가로서 열정에 모종의 신비로운 에너지를 발휘한다. 


프랑스로 돌아오자마자 미셸은 곧바로 급진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 기간 중 그녀의 친구 마리 페레(Marie Ferré)가 사망했으나, 미셸에게 사건의 정점은 리옹에서 열린 '66인의 재판(Trial of the Sixty-eight)'이었다. 정부는 크로포트킨과 고티에를 포함한 많은 지도자를 파멸시킴으로써 무정부주의 운동을 꺾으려 했다. 미셸은 재판 초기에 영국에 있었으나 마지막 단계에 참석했고, 비록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수감자들과 동일시했다. 66인의 유죄 판결 이후 그녀는 무언가 해야 한다고 느꼈다. "내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허용된 자유를 사용해 지구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뻗어 나갈 새롭고 거대한 인터내셔널을 소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겁함의 공범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순교를 갈구하고 있었고, 1883년 4월 앵발리드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정부는 야만적으로 반응했고, 형식적인 재판 끝에 그녀에게 6년의 독방 구금형을 선고했다. 이는 범죄에 비해 너무나도 불균형한 형량이었기에 보수적인 신문들조차 항의할 정도였다.


어머니의 쇠약해진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셸은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그리고 유죄 판결 이후에도 최소 두 차례 어머니를 병문안할 수 있는 가석방 허가를 받았다. 클레르몽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도 어머니를 뵙기 위한 외출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매우 이례적인 절차였다. 미셸의 전기 작가 에디스 토마스(Edith Thomas)는 이 에피소드를 논하며 19세기가 "우리 시대보다 훨씬 더 인도적인 시대였다"라고 평했다. 미셸은 1884년 12월 초, 당국이 그녀를 어머니와 가까운 파리 교도소로 이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나흘 후 내무부 장관은 미셸이 두 명의 경찰관 감시하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녀의 회고록만으로는 알기 어렵지만, 미셸은 1884년 12월 11일부터 1885년 1월 3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한 달 동안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미셸의 감정은 항상 격렬했다. 그녀의 회고록 페이지 곳곳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점철되어 있으며, 어린 시절을 묘사할 때는 친척들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후 젊은 여성 시절에는 자신을 따라 파리까지 온 줄리 롱샹(Julie Longchamps)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세월이 흘러도 제자들에 대한 미셸의 애정은 식지 않았다. 첫 번째 재판 당시 정부가 그녀에게 제자가 없었다고 주장하자 그녀는 격분하며 반박했는데, 정작 그보다 훨씬 더 큰 거짓말들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 그녀는 성실하고 상상력 풍부한 교사였던 것으로 보이며, 외부의 증거들도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예를 들어, 누메아에서 카나크족을 가르치는 데 쏟은 그녀의 헌신은 회고록에 자부심으로 담겨 있다.

미셸의 동정심은 사회의 모든 약자, 즉 가난한 이들, 노인들, 죄수들, 그리고 여성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녀는 초기 페미니즘(protofeminism)을 발전시켰으나, 이는 곧 더 포괄적인 급진주의로 융합되었다. 미셸은 사회 문제를 명확히 직시했으며, 여성뿐만 아니라 많은 집단이 착취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하여 여성에 관한 회고록의 한 장은 사회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가 "좋은 동반자로서 인생을 함께 걸어갈 것"을 호소하는 톤으로 변한다. 혁명이 일어난 후에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인류 전체의 권리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어느 인종이 으뜸인지를 두고 인종들이 다투지 않게 되는 것처럼, 어느 성별이 우월한지"에 대해 더 이상 논쟁하지 않을 것이다. 동물을 향한 잔혹 행위에 대한 미셸의 혐오감은 약자와 착취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연결되어 있다.


 "새끼가 짓밟힌 새부터 전쟁으로 보금자리가 파괴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회고록에서 어머니에 대한 감정 다음으로 가장 격렬한 감정은 테오필 페레(Théophile Ferré)를 향해 있다. 그녀는 그와 그의 처형에 대해 자주 언급하지만, 그 감정이 인간 페레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탄압이 초래할 수 있는 결과의 상징으로서의 페레를 향한 것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페레를 그의 연인으로 보기도 한다. 페레의 누이 마리(Marie)와 미셸의 따뜻한 우정이 테오필에 대한 감정의 결과인지 아니면 그와 별개인지는 불분명하나, 미셸과 마리 페레의 삶은 영구적으로 얽혀 있었다. 마리는 미셸이 집회에 참석하거나 유배 중일 때, 혹은 여행이나 투옥 중일 때 미셸의 어머니를 돌보는 것을 도왔고, 두 사람은 수년 동안 활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다. 미셸이 자신의 시집과 스크랩 자료들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 덕분이었으며, 그중 상당수가 회고록에 포함되었다. 블랑키 서거 기념일 시위 직후 미셸이 체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가 사망했다. 미셸은 회고록에 마리의 장례식 기록과 앙리 로슈포르가 보낸 찬사의 편지를 수록했다.


하지만 미셸의 정서적 삶의 중심은 어머니였다. 미셸은 어머니가 "공유하지 않았던" 자신의 견해 때문에 어머니가 겪은 고통의 대부분을 자신이 초래했음을 인정했다. 평생 어머니는 딸의 빚을 갚기 위해 애썼고 애정과 소소한 선물들을 쏟아부었다. 그 보답으로 루이즈는 자신의 불행을 어머니에게 숨기려 애썼고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편안하게 해드리고자 노력했다. 미셸은 "우리 혁명가들은 가족에게 행복을 거의 가져다주지 못한다"라고 한탄한다.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 미셸은 어머니의 장례식 기록 전문을 실었다. 그녀가 깨닫지 못한 사실은, 어머니의 시신을 따라 파리를 가로질러 르발루아 페레 묘지까지 행진했던 수천 명의 사람이 어머니뿐만 아니라 루이즈 자신에게도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실질적으로 미셸의 회고록은 어머니의 죽음 시점에서 끝을 맺으며, 그녀는 상실로 인해 황량해진 정신 상태로 이듬해 출판을 위해 원고를 완성했다. 현실은 가변적이며, 회고록 저술가가 해야 하듯 자신의 마음의 과정을 되짚어보는 것은 회상이 소환되는 순간에 존재하는 햇빛이나 그림자를 통해 과거의 사건을 바라보는 일이다. 혁명적 대의에 대한 미셸의 헌신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그림자 아래서도 확고했으나, 만약 그녀가 슬픔의 충격 속에서 회고록을 쓰지 않았더라면 잃어버린 과거에 대해 향수와 슬픔을 덜 드러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또한 우리 몫이 아니다.


미셸이 이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 것은 1883년에 시작된 그녀의 세 번째 수감 기간 중이었으나, 자료 수집은 그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시작한 오트마른의 역사와 같은 초기 저작물들도 가지고 있었으며, 뉴칼레도니아 항해 중에 기록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일기'에 대해 감질나는 언급을 남기기도 했다.


1885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미셸은 일종의 신경 쇠약을 겪었으며 이는 그녀의 회고록이 파편화되고 일관성이 떨어지게 된 분명한 이유 중 하나였다. 두 부분으로 나뉜 본문 전체에 대략적인 연대기적 개요가 흐르고는 있지만, 이야기와 일화들은 단계적인 서사보다는 단어 연상에 따라 나타난다. 또한 이 회고록은 사실적인 기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문은 그녀의 꿈에 대한 감정적인 묘사, 행동을 촉구하는 고무적인 부름, 그리고 다수의 시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다른 아이디어로 가볍게 옮겨간다.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독자에게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원문에서 그녀는 "나의 세 번째 체포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앞선 두 번의 체포 과정을 서술해야겠다"라고 쓰기도 했다. 회고록은 향수와 고양된 감정, 서사와 예언 사이를 격렬하게 오간다.


1888년 1월, 미셸이 르아브르에서 연설하던 중 광신적인 가톨릭교도 브르타뉴인이 그녀를 쏘았다. 왼쪽 귀 뒤에 박힌 총알 부상은 잘 아물지 않았고, 한동안 그녀의 건강은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러나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게도, 미셸은 가해자의 재판에 출석하여 그가 악한 사회에 의해 미혹된 것이라 주장하며 선처를 호소했고,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다.


루이즈 미셀은 1890년 노동절 시위 참여를 준비하던 중 행사 전날 체포되었다. 분노와 좌절감에 휩싸인 그녀는 감방의 가구들을 부수었고, 당국은 그 행동을 구실 삼아 그녀를 정신 이상자로 몰아 수용하려 했다. 불분명한 이유로 내무부 장관 콩스탕이 직접 개입하여 수용 절차를 중단시키고 그녀를 석방했다.


미셸은 즉시 영국으로 떠났고, 1890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이후 그곳의 사건들은 그녀의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미셸은 이 무모한 전쟁이 사회 혁명의 시작을 가져올 기회라는 점에 기뻐했다. 그녀는 1904년 2월과 3월 초 프랑스에서 더 많은 강연을 했으나, 그 후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회복되었고, 대중이 치명적일 것이라 예상했던 그녀의 병세가 널리 알려진 후 전설적인 인물을 보기 위해 과거처럼 엄청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아마 사람들은 이제 전설을 보러 온 것일 뿐이었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모여 그녀에게 박수를 보냈다. 연말에 그녀는 알제리로 떠났고, 프랑스로 돌아오던 중 마르세유에서 병이 났다. 이 병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1905년 1월 9일, 그녀는 마르세유의 호텔 드 로아지스(Hotel de l'Oasis)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그녀가 좋아했을 법한 장관 중 하나가 되었다. 적기와 수많은 꽃, 그리고 노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무정부주의자, 반종교 단체 대표 등 2,000명의 조문객과 함께 장례 행렬은 마르세유에서 묘지까지 1킬로미터에 달했다. 추모식이 프랑스 전역과 런던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1월 20일 그녀의 유해는 이장되어 파리로 옮겨졌고, 이틀 후 르발루아 페레(Levallois-Perret)에 있는 어머니 곁에 묻혔다. 언론은 이것이 빅토르 위고의 사망 이후 최대 규모의 장관이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군중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려다 벌어진 대학살은 또 다른 '피의 일요일'로 영원히 각인되었다


오늘날 미셸의 고향인 브롱쿠르(Vroncourt)에는 그녀의 동상이 서 있고, 마을을 지나는 거리에는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다. 르발루아 페레에 있는 그녀의 묘지는—1905년에 묻힌 곳이 아니라 1936년 인민전선 시절에 옮겨진 새 묘지이다—여전히 익명의 손길이 놓아둔 꽃들로 채워져 있다. 그녀의 이름을 딴 지하철역과 거리도 만들었지만, 둘 다 파리 시 경계 바로 바깥에 걸쳐 있다. 그녀는 이제 전설이다. 그녀가 그 전설의 일부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루이즈 미셸은 영웅적이었으나, 그녀 자신이 말했듯


"영웅적인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저 사건에 매료될 뿐이다."


흔히 하나의 사건에 대해 여러 버전의 서술이 존재했는데, 이는 드문 경우이지만 큰 틀에서 항상 서로 일치하면서도 각기 새로운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 있었다. 몇몇 시들은 서사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아 생략했다. 게다가 미셸의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있다. 물론, 에디스 토마스는 미셸의 "가장 훌륭한 시는 단연코 그녀의 삶"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미셸은 분명 이 회고록의 후속편을 쓸 의도가 있었다. 이 책을 출간하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으나, 결국 실현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녀의 시와 편지들을 제외하면, 여기에 실린 『루이즈 미셸 자필 회고록(Mémoires de Louise Michel écrits par elle-même)』이 혁명가이자 시인, 그리고 몽상가였던 매혹적인 여성의 가장 주요한 자전적 기록이다.


1886년 이 회고록을 출간했을 때 그녀는 쉰여섯 살이었으며, 여전히 많은 세월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언급했던 두 번째 회고록을 쓰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녀가 남긴 이 회고록은 인간의 꿈을 향한 기념비로 서 있다. 변방의 보잘것없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가 자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자유까지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음을 교조적 이론이 아닌 마음에 이끌려, 미셸은 자신의 회고록과 삶을 통해 증명했다.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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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에서 다음 해 1월로 넘어가는 어디쯤에서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맘먹었습니다.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좀 힘들겠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어서 해야지 해야지 하고 마음만 분주했습니다. 2025년 4권의 책을 만들면서 틈틈히 번역을 했고 지난 해 12월 말에 초고를 만들었습니다.


3개월 동안 달려왔습니다. 이제 책이 손에 들어왔고요.

음, 루이즈 미셸의 삶을 들여다보면 볼 수록 삶이란 어쩔 수 없는 고통이라겠지만 그 고통이란 또 삶을 빛나게 할 것이란 걸 확신하게 됩니다.


루이즈 미셸은 결과가 아니라 신념을 지키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승리임을 온몸으로 웅변합니다. 타인의 시선과 평판에 매몰되지 않고 세상의 기준이 아닌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삶을 정의하는 태도, 길들어진 풍요 속에 머물지 않고 위험하더라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남기 위해 온 존재를 걸었던 여성의 이야기는 온갖 역경에도 세상이 정해준 한계를 거부하고 스스로 삶을 창조할 용기를 얻으려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이야기일지도.

 

날카로운 비수 같은 문장과 부드러운 위로와 공감으로 채워진 이 회고록은 누구라도 그 어떤 곤경에 처했다 하더라도 루이즈 미셸에게 기대볼 수 있는 최고의 멘탈 지침서로도 손색없습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뜨거움’, 누군가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거나 불가능한 이상에 투신하는 열정이야말로 기술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시대에 되새겨야 할 미덕이 아닐까요. 루이즈 미셸처럼 비합리적일 만큼 뜨거운 정의감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인간의 기록을 읽으며 우리의 본질을 확인해봅니다.



나의 생애는 아주 뚜렷하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두 부분은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데, 전반부가 오로지 꿈과 학문의 시기였다면 후반부는 오로지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마치 고요했던 시기의 열망들이 투쟁의 시기에 생명력을 얻어 살아난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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