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루이스(Pierre Louis)는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서 마지막 철자 's'를 발음할 때면 분노에 휩싸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결국 성을 갈아치우기로 한다. 그래서 루이스를 루이로만 발음하게끔 철자 i 를 y로 바꾸고 그 위에 점까지 두 개를 찍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루이스라 부른다. (Pierre Louÿs)
피에르는 감각적인 사람이었는데 특별히 감각적이었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사랑은 감각의 시'라 썼던 보들레르의 제자가 말라르메라면 말라르메의 제자는 피에르 루이스다. 그러나 루이스는 마치 감각이야말로 사랑의 시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감각은 시적 상상력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몸은 감각을 실현하는 감각기계가 되었다. 감각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 중의 하나가 시가 되었고, 소설이 되었고, 익살과 풍자가 되었다. 거기엔 윤리나, 생의 의지 따위는 없다. 사랑이 윤리와 동의어인 세상에서 감각이라니. 관능의 감각이라니.
피에르 루이스는 관능의 삶을 살았다. 그는 색정광이었다. 독자들이 이 단어에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지 궁금하다. 누군가가 색정광이라 알려지면 그 사람의 책을 선택할 확률이 높을 것인지 현저하게 줄 것인지 알 수 없다. 성에 대한 상부구조와 토대가 극렬하게 불화하는 우리 사회에서 사드의 작품도,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도 다들 읽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출판사가 대놓고 이 사람들을 색정광이라 칭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세기 어느 색정광의 빛나는 소설', 이런 문구는 본 적이 없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원제는 여인과 꼭두각시)>은 피에르 루이스 사후에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발간된 세기의 걸작, 수잔 손탁이 포르노그라피의 예술적 성과라 평가한 <세 자매와 어머니>, 그리고 하드코어에 가까운 풍자집 <어린 소녀들의 가정교육 지침서> 와는 다르게 그의 생전에 매우 공식적인 통로를 통해서 출간되고 이후에도 공식적으로 대표되는 소설임을 밝혀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쓰고 나니 조금 더 비겁해진 느낌이다.
피에르 루이스 전문가 장 폴 구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다. 피에르 루이스는 섹스의 끝이 어디인지 느끼고 싶었다. 인간의 성생활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섹스에 몰두했다. 일상적인 성생활의 모든 측면과 깊이를 경험해보고 싶었고 그것을 시와 사진으로 옮겼다. 상상력은 판타지와는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피에르 루이스의 상상력은 성적 판타지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환상과 상상은 분명 다른 것이다. 환상이 정서적인 측면이라면 상상은 다분히 이성적인 측면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는 느끼고 상상한다. 자신의 글과 사진, 섹스는 차이가 없다. 상상력의 윤활유일 뿐이다. 그가 이른 나이에 거의 절필했던 이유가 아닐지 짐작해본다. 당시 35만 부라는 막대한 성공을 거두고도 자신의 존재를 숨기거나 사생활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피했었다. 사생활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책 따위는 출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는 평생 읽고 썼다. 사람들은 피에르 루이스를 상상하는 인간이라 수식했다.
일종의 유희처럼, 말장난처럼, 특정한 분야의 감각에 집중되었으나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가 출현했다. 스타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물들을 바라보는 절대적인 방식이라 했던 플로베르에 따르면 피에르는 플로베르의 후예다. 물론 발자크의 후예는 아니다. 자신의 단편 소설 <가짜 에스더>(욕망의 모호한 대상)에 발자크를 등장시켰지만.
피에르는 중학교에서 만난 앙드레 지드의 첫 책에 서문을 썼고 두 번째 책에는 표지까지 만들어 줬다. 10대에 이미 수백 편의 시가 그의 노트를 채웠다. 우리가 한 번쯤 들어본 프랑스 시인들, 말라르메나 베를렌느, 르 콩트 릴 등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청소년 피에르를 무척 좋아했던 모양이다. 지드와 피에르 루이스는 몇 년 후 결별하게 되고 평생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게 그러니까…. 앙드레의 성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봤다.
피에르가 스무 살 즈음에 지드와 함께 런던으로 가서 오스카 와일드를 만난다. 오스카는 피에르를 무척 좋아했다. 연정을 품은 건 아니었다. 오스카가 자기 희곡 살로메를 피에르에게 헌정했지만 이년 후에 피에르는 오스카에게 엄청난 실망을 하고 떠나게 된다. 오스카의 호텔에 침대 하나에 배게 두 개, 그리고 앨프리드 더글러스가 있다는 것을 피에르는 용납하지 못했다. 오스카는 심지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 나는 단지 친구를 원할 뿐인데 참 어렵군, 그럼 나는 연인만 있을 팔자인가…." 슬픈 이야기.
피에르 루이스는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던 걸까? 거참 자기는 사포를 그렇게 좋아하고 레즈비언 이야기를 시로 써서 당대의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면서 말이지.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되고, 남자와 남자는 안 된다 이거지? 이게 아직 내게 남은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한 가지 더, 피에르와 드뷔시 사이의 우정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그리스 레즈비언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시 <빌리티스의 노래> 중 3편에 드뷔시가 곡을 붙였다. 몇 년 후엔 이 둘의 관계도 끝나는데 이유는 드뷔시가 바람을 피워 부인과 이혼하고 젊은 여자에게 가버리자 피에르가 분노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피에르의 보수적 기질은 당시의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프랑스를 완전히 양쪽으로 쪼갠 그때 반 드레퓌스 진영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귀족의 혈통을 고집했다.
피에르는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시기에 주변과 절연하고 칩거에 들어간다. 그리스 고전문학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던 중에 당대의 유명한 논쟁을 촉발한다. “몰리에르는 코르네유 최고의 걸작”이라는 표절 논쟁. 시인이자 소설가, 고대 그리스 문학 전문가였고 10여 개의 외국어, 무려 중국어도 할 줄 알았던 이 르네상스인에게 글쓰기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는데, 그건 즐거움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고, 뭔가 대단히 올바른 주장을 펼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 성찰도 아니면서, 성장은 더욱 아니었고, 그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결코 아니었으며, 특별한 이유, 써야 할 이유가 있거나 혹은 그런 이유를 애써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기가 느끼는 감각, 그걸 표현하고 싶다는 유일한 소망은 있었겠지만. 결국 쓰는 건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쓰는 게 삶이 되면 그런 삶은 참 가엾은 삶이 될 거라는 터무니없는 상상도 해본다.
“그녀의 눈과 손가락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온몸이 하나의 얼굴처럼, 얼굴 그 이상으로 풍부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으로 뒤덮인 얼굴은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어깨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갈라진 엉덩이에 미소가, 물결치는 허리엔 두 뺨의 홍조가. 그녀의 가슴은 두 개의 커다랗고 검은 눈처럼 앞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욕망의모호한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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