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나는 비 오는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영화를 공부하는 한 한국인 청년을 우연히 만났고, 영화를 학문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그의 남다른 열정과 포부에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그리고 그 열정과 꿈이 드디어 25년이라는 시간의 각고를 거쳐 <영화의 역사>라는 역작으로 탄생했음을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감동적인 일이다.

이 책은 단순히 영화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 아니다. 시네마토그라피라는 운동과 시간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발명품이 소리와 색채를 얻고 자본과 결합하여 리바이어든 같은 거대산업이 되기까지, 노동과 기술의 결합이면서 동시에 창작자의 생산품이 무한복제의 수익상품, 심지어 신식민지화의 대표상품이 되기까지, 렌즈를 통과한 빛이 만들어내는 현상이 삶과 세상을 읽는 철학이 되고 예술이 되고 가장 강력하게 대중을 사로잡는 이야기의 매체가 되기까지, 그 다채로운 영화의 정체성을 해부하고 복잡한 진화의 과정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영화의 역사를 이렇게 넓고 깊게, 이처럼 다층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책은 한국은 물론이고 저자 자신이 공부한, 영화를 발명했던 프랑스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김성태의 <영화의 역사>는 감히 기념비적인 역작이라 할 만하다. 마침내 우리는 영화를 이해하고 사유하기 위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언제나 찾아볼 수 있는 영화 관련 참고서를 한 권 얻게 되었다.

 

 

이창동(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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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힌 동성애자는 분홍 삼각형 표식이 주어졌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에게 미국으로 갈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동성애자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왜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일까요?


그리스 로마, 고대 성서시대와 기독교 시대, 중세와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입장과 관점에서 동성애 혐오의 양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근대에 들어, 과학과 의학, 이데올로기와 관료체제, 그리고 부르주아 시민사회가 형태를 달리하며 교묘하게 권리를 제한하고 소외시키며 혐오를 조장하는 매커니즘이 다른 혐오들, 인종차별, 성차별, 외국인혐오 등과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는지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호모포비>는 동성애 혐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를 집요하게 부정하고 배격하는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 볼 수 있습니다. 


"혐오는 혐오를 낳고 더욱이 여성과 아이, 약자로 흘러가는 매커니즘을 가진다. 특정 무언가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다. 혐오는 우리 모두에게 있기에 누구나 마주해야 하는 진실임을 잊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독을 권한다." 서점인의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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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영화이다. 언뜻 들으면 이상하게 느껴진다. '영화'의따옴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로는 영화 하나 뿐이어서 혼동이 인다. 이 한 단어 안에 최소한 크게 본다면 두 가지의 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시네마로서의 영화와 또 다른 것은 필름들을 지시하는 단어로서의 영화다. 즉, 여기 이 제목이 요구하는 대상은 필름들이 아니라 시네마이다. 


필름들은 무수하다. 여전히, 당연히, 어쩔 수 없이 쏟아지고 있다. 산업적 크기로 보아 영화는 아주 거대하다. 그 거대함이 자연스럽게 다양하고도 새로운 영화들(필름들)을 요구하고 있다. 그만큼 생산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때문에 필름들의 생산에 관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백년 전에 비해 생산량이나, 상품이 유통되는 영역이나 유통의 장은 너무나 넓어졌다. 다시 말해, 필름은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히치코크의 영화는 아직도 미국이나 프랑스나 극장에서 틀어지고 여전히 향수어린 관객들과 현재 이십대의 관객들과 영화의 재미에 빠지고픈 관객들을 끌어모은다. 단지 잘 만들어서? 미국의 어떤 할아버지는 그럴 것이다. 존 포드의 서부극을 보면서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용맹담을 기초로 손자에게 자랑스럽게 말할 것이다. 저게 미국이고, 저게 너희 증조 할아버지가 개척한 세계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고. 


이들 영화들도 모두 오락영화이다. 그렇다면 다른 영화들보다 더 잘만들었으니까 그럴까? 아니다. 시네마가 하는 일을 잘 감당하고 있어서 그러하다. 인간의 삶을 투영하고 그것이 지닌 가벼운 재미거나 깊고 심오한 면이거나간에 그것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능에 충실해서이다. 그게 시네마의 기능이고, 이었다. 이 책이 고민하는 영화란 바로 그 시네마이다. 시네마가 이러한 일을 했기에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서 떠들고 시네마의 자식인 개개의 필름들의 가치를 매겼으며 즐기고 신나했다. 언제나 시네마는 삶에 빛을 프로젝트해서 그것을 빛나게 만드는 기능을 해왔다는 말이다. 그게 일반적인 상업영화들이다. 예술 영화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기쯤 되서부터 시네마는 어쩐지 이제 제 기능을 다하지 않는 듯하다. 아드레날린에만 목적을 지니고 있고, 한 터럭이라도 삶을 슬쩍 환기시키는 일은 사라졌다. 잘 만들어진 상품이기는 하지만 <매트릭스>가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보는데만 빠져들도록 만든다. 그 영화가 담고 있다는 세계에 대한 해석은 사실 영화를 보면서 온데 간데 없어진다. 그것은 나중에 첨언된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수와 영웅과 기독교와 설화들을 뒤범벅해서 재미있게 만든 서사에 지나지 않는다. 

보고 소비되는 것, 필름들은 더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변질되었다. 소비되기 위해, 팔리기 위해 존재한다. 모든 물건이 그렇지 않은가고 물을 수 있지만 경제의 기본원칙도 생각해보지 않은 말이다. 모든 상품은 단지 팔리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많이 사용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많이 사용될 수 있을 만한 기능을 지니고 있으니 잘 팔리는 것이고. 오늘날의 영화에겐 무언가 빠져있다. 많이, 오래도록 사용되는 가치는 잃어버렸다. 그것이 우리 삶을 투영하고 있고, 웃기게 만들어서 재밌어서 보는 것도 아니고, 감칠 맛나는 액션으로 우리 삶의 부조화, 정의를 교정하는 것이어서 보는 것도 아니고, 당대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 있어서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볼만해서, 두 시간동안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 있어서 보게 되는 상품, 그런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거창한 이론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몇몇 영화들에 대한 헌사를 던지는 평론의 모음집도 아니다. 아주 단촐해보이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빨리 주파할 수 있는 두께를 지닌 쉬운 책이다. 그저 생각의 길이 수월수월하게 쓰여있는. 하지만 이 책은 사실 수많은 함의를 담고 있는 의외로 묵직한 책이다. 물론, 독해는 쉽다. 알아듣기쉬운 언어로 쓰여있으며, 살짝 생각을 해보면 납득이 가는 언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단순한 언어들은 하나같이 줄기차게 지난 백년동안 시네마가 무엇이었는지, 왜 필름들이 시네마로서 기능해야 하는지를 써놓고 있다. 상품들은 역사가 없다. 소비품목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시간의 적체물이라는 의미 이외에는…… 


예컨대, 우리는 tv라는 형태를 기억할 뿐, 이십년전의 tv프로그램에 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프로그램은 그저 시간을 통과한 풍경 이미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tv의 역사란 프로그램의 역사가 아니라 시청자와 대화해온 방식으로서의 tv의 역사이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영화의 역사는 필름들, 영화들의 역사였다. 그럴 수있었던 이유는 시네마라는 필름을 생산하는 방법으로서의 영화가 엄연히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이 말이다. 영화(필름)는 이야기를 던진다.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을 담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흥미있을 수도 있고, 아주 심오한 내면을 건드리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나 상관없다. 다 좋다. 다만, 여하간에 그것은 우리에 대해 말을 한다. 우리가 사는 방식과, 우리가 웃는 방식, 우는 방식 등등. 시네마는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종족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필름들이 우리의 기억을 만들고 우리의 반성을 형성하고 우리를 즐겁게 하고 우리를 애석하게 해주었다. 그것은 우리의 을 채우는 것이다. 삶의 일부 시간을 잊게하거나 소비하게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래서 필름들, 프로그램들로서의 필름들이 뇌리에 남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시네마란 무엇이며, 그것을 본다는 행위와 그것에 대해 말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이 책은 바로 그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명쾌하게 제공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도 성찰의 시간이 왔다. 우리가 어떤 영화들을 남길 것인지, 영화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해보아야 할지. 늘 떠들어온 것 같지만 투박하고 두터운 이론서, 이해하기 힘든 평론집, 까다로운 심오함을 지닌 어떤 영화들의 범주에 머물러 왔다. 이 책에서는 그러지 않는다. 

기초적으로 영화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나 전공의 심연에 푹 빠져있는 이론적으로 사실상 모호한 전공자들에게나 다 두루 필요한 책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래, 영화는 이런거였지 하고 무릅을 치게 만들고 생각해보게 만드는 짧은, 쉬운, 맛나는 전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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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발로통 소설 [유해한 남자]의 리뷰를 발췌해봅니다.

#유해한남자


*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대사들에 리듬이 있듯 발로통의 문장에는 숨겨진 리듬이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몹시 시각적이다...

유해한 남자 속 발로통은 여전히 '파격'이라는 말을 벗어던지지 않는다. 그의 그림처럼 시점 또한 다양하게 던져둔다. 다양한 시점들이 가져오는 생동감. 어느 시점에 눈을 맞추느냐에 따라 진행이 달라지는 시간의 흐름처럼 그의 글이 그렇다...이 남자. 진심으로 유해하다. 뭔가 옭죄고 있는 것이 있다면 풀어헤치라고 큰 소리가 아니라 귓속말로 속살거린다. 거부할 수 없게스리..

사이즈 업 한 아아 한 컵 옆에 놓고 하염없이 읽기 좋은 책이네.(RS)


* 폭주 하는 전차를 타고 있는 듯한 상황에서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어야 했던...그렇게 억울하거나 비참해져야만 했었던 기억들이 책을 읽으며 울컥울컥 튀어나와 숨이 턱턱 막혀 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모르게 간직하고 있어야만 하는 비밀스런 이야기들은 나를 유해한 여자로 만들어버린다.(KJH)


* 나로 인해(화자) 무슨 일이 또 생겨 누군가가 죽을까봐 불안해서 빨리 책을 읽어버리고 싶었었다.(MYM)


* 실존주의적 암호로 가득한 소설이다. 지은이 화가 펠릭스 발로통은 괴재(怪才)가 틀림없으며 '뜨거운 남프랑스의 카뮈'가 아니라 '서늘한 스위스의 카뮈'라고 할 만하다. 남프랑스는 카뮈의 고장은 아니다. 그는 지중해의 고독의 아들이며 남프랑스는 향유와 열정의 알퐁스 도데의 고장이다. 이 소설은 새 천 년의 이방인이다.(HDW)


* 펠릭스 발로통은 허우 샤우시엔의 <빨간 풍선>을 보고 처음 알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 전 읽었던 쥘 르나르의 <홍당무>를 다시 읽자 내가 펠릭스 발로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홍당무> 삽화를 펠릭스 발로통이 그렸던 것이다. 펠릭스 발로통의 그림을 볼 때마다 색감이 아름다워 마음이 충만해 지는 기분을 느꼈는데 동시에 쓸쓸함도 느꼈다. 어떤 그림이든 여운이 오래 남았다. 그가 쓴 소설 <유해한 남자>는 펠릭스 발로통의 그림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줄 것이다. 죽을 줄 알면서 살아가고 이별할 줄 알면서 사랑을 하는 아이러니.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공감 말이다(MC)


* 디테일과 생경함이 신선한 자극을 준다. 풍경, 사물, 움직임 등을 묘사할 때 바람과 빛, 질감과 색감까지 고집스럽다. 화가의 소설이란 이런 것이었다.(KS)


* 펠릭스 발로통의 소설 <유해한 남자>의 자크 베르디에는 자신에게 부여된 살인자의 운명에 대항해 자기 삶의 종식을 기획한다. 그는 석양의 그림자 살인으로 다음 세기 전무후무한 정오의 태양 살인의 전조가 된다.

 

* <유해한 남자>, 원본 언어인 프랑스어 이외에 영어 번역본과 스페인어본이 있고, 그리고 한국어본이 생겼다. 전 세계 단 4개의 언어로 번역되어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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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피에르 루이스의 저작인데 국내에 피에르 루이스 저작은 이 책 단 하나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애문학 작가에게 프랑스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주었으니 얼마나 훌륭한 성애작가란 말인가. 훌륭한 성애와 관능을 보여주는 작가의 유일한 한국어판 도서. 이 책은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이 소설의 원제는 <여인과 꼭두각시>, 풀어보자면 여인과 그 여인에게 조종당하는 남자, 정도가 된다. 이를 원작으로 루이 브뉘엘이 역사에 남을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을 만들었다.

물론, 루이 브뉘엘 영화 외에도 이 소설이 원작인 영화들이 여러 편 있다. 대표적으로 1937년작 마를렌 디트리히 주연, 조셉 폰 스턴버그 감독의 <악마는 여자다>가 있다.

한 여자에 집착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일종의 페티쉬라 할 수 있는 영화(보기)의 속성, 특히 남성 감독(관객)과 여배우의 관계에서 잘 드러나는 영화 자체의 속성에 부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루이 브뉘엘 영화가 역사에 남는 이유는 이 관습적인 이야기를 장르적 재현/ 영화의 관습에 가두지 않고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고 갔기에 가능했다. 한 인물(여주인공)을 두 명이 연기하는 것으로 이제 이 이야기는 영화가 지닌 페티쉬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기반영적이면서도 온전히 남자에게 촛점을 맞추는 영화가 된다.

19세기 부르주아 남성의 내면과 욕망의 분명한 대상인 팜므파탈의 이야기는 루이 브뉘엘의 손을 거치면서 불분명하고 어두운 욕망으로 가득한 20세기 부르주아 남성이 진정 위험한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영화가 되었다.


문학평론가 도널드 와트는 피에르 루이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express pagan sensuality with stylistic perfection"

조금 거칠게 옮겨보자면 "완벽한 문체(?)로 이교적 관능을 표현하는".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피에르 루이스 소설 중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출판될 정도로 아주 얌전한 소설이라 할 만하다. 당시 30만부 이상을 판매한 그의 시집<빌리티스>, 파리 사람들이 식당이나 카페에 일단 모이면 누구나 시집 <빌리티스>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전한다. 심지어 '플로베르 이후 완벽한 프랑스 산문의 등장'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피에르 루이스는 그 시집이 출간될 때 완벽하게 자신을 숨겼다. 고대 그리스에서 전해내려오는 시들을 모았다고만 했던 것이다. 나중에 이래저래 결국 밝혀지긴 했지만, 이렇게 피에르 루이스는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글을 평생 써나갔지만 대중에게 발표하는 것에 회의적이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사생활이었다. (19세기 벨에포크의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공적 영역/사생활의 완벽한 분리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사후에 출간된 소설 <<세 자매와 어머니 Trois filles et leur mère>>, 그리고 <<어린 소녀들을 위한 가정 교육 지침서>>로 역사상 가장 뛰어난 포르노그래피 작가로 추앙받게 된다. 수전 손택은 조르주 바타유의 <눈 이야기>와 더불어 <<세 자매와 어머니>>를 성애문학의 빛나는 성과로 꼽고 있다.


피에르 루이스의 소설집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표제 소설 외에 3편의 짧은 이야기가 함께 묶여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새로운 즐거움>은 매혹적인 이야기다.

어느 날 저녁 시인에게 환영인 듯 실제인 듯 기묘한 복장의 아름다운 여인이 홀연히 나타난다. 아르테미스의 시녀이자, 제우스가 아르테미스로 변해 사랑을 나눌 정도로 아름다운 칼리스토가 시인의 작은 방에 방문한 것. 칼리스토는 무덤에서 나와 문명 세계를 여행하는 중이다. 시인과 칼리스토는 푸른 새벽이 올 때까지 문명과 발전, 각자 자기 시대의 가치로 논쟁을 펼칩니다. 아주 짧고 간명하지만 또 미묘하게 육감적이다.

그 외에 사제가 고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는 금기와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 <X양의 고해>는 반전의 묘미가 있고요, 발자크가 등장하는 <가짜 에스더>는 소설의 인물이 실제 인물이 되어가는 과정의 광기가 번득인다. 감각과 스타일의 귀재 피에르 루이스의 현대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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