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고가 일어났던 밤이었다. 세상은 마치 모든 것이 잠든 듯 고요했지만, 나는 침대에 누운 채 내 몸 전체를 덮고 있는 짙고 무거운 어둠을 또렷이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내 안에서 멈추지 않고 울려 퍼지는 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있었다.
“너는 이제 끝났어.”
“너는 이제 끝났어.”
“너는 이제 끝났어.”
그 목소리는 단순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몸 깊숙한 곳, 뼛속까지 파고들며 내 존재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내 몸 깊숙한 어느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그 냉소에 가득 찬 소리가 반복되었다. ‘끝이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나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입술을 가다듬으려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의 공명은 곧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을 떠나야 하며, 언젠가 떠날 것이라는 절박한 갈망으로 변했다. 나는 그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갈망을 붙잡고 살아남으려 애썼다. 그리고 말 그대로 생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P34)


“나는 손가락으로 색들을 어루만지면서, 그 색의 힘 속에 빨려 들어갔다.”
서른둘의 나이에 한국을 떠났다. 파리에서의 8년. 그녀는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다. 『물질이여 안녕』은 생사의 투쟁 속에서 흔들리던 시간을, 창작을 통해 돌파해 온 과정을 담았다. 예술이라는 가능성의 장에서 ‘살아 있음’이란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변신의 서사를 펼쳐낸다. 고독과 몰입, 진동하는 색. 버려진 사물, 죽은 화가와의 영혼의 만남,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하는 과정은 독자에게 창작의 환희와 진동을 고스란히 전한다.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것들에게 바치는 인사, 물질이여 안녕.
“예술이 아니었다면 끝내 세상에 매개될 수 없었을 사람. 예술이 사람을, 사랑을 구원한다는 것은 진짜다.”
파리 15구 막다른 골목, 지붕에 구멍이 뚫린 채 105년을 버텨온 집, 저자는 이 집을 "르 라브 라브(Le Lab Lab)"라 부르며 8년을 살았다. 이 책은 그 집에서 일어난 일들의 기록이다. 정원 지하실에서 발견한, 이미 세상을 떠난 인도 피리 연주자의 방치된 그림들을 되살려낸 영혼의 협업. 코로나 봉쇄 속에서 나눈 이방인 아티스트들과의 교류. 그리고 마침내, 오래된 나무판에 그린 그림 한 점을 노르망디의 바다에 흘려보낸 순간까지 그 창작과 실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을 컬러 도판 100여 컷과 함께 담아냈다. 트라우마와 정신적 고통, 이방인으로서의 생존,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폭풍 같은 변신의 서사.

촉각으로 읽는 책
이 책은 시각을 넘어 '촉각'으로 경험하는 책을 지향했다. 두툼한 유광 표지로 책을 감쌌다. 겉표지는 책등과 날개가 정확히 책에 밀착되도록 했다. 100여 컷에 이르는 컬러 도판은 미술관을 종이 위에 옮긴 듯한 배치로 구성되며, 각 작품 곁에는 그 작품이 탄생한 순간의 맥락이 함께 실린다. 이는 단순히 예술가의 회고록을 읽는 경험을 넘어, 독자가 책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소장하도록 설계된 편집 방향이다.
버려진 것들, 잊힌 것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대한 아름답고 치열한 답변.
물질이 말을 건다는 것, 죽은 자와 협업할 수 있다는 것, 그림이 스스로 태어난다는 것. 형린의 예술 세계는 우리가 잊고 있던 물질의 영혼을 깨운다. 진동하는 색. 버려진 사물, 잊힌 화가와의 영혼의 만남, 고독과 몰입, 작가만의 장르를 개척하는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전한다. 파리의 무너져가는 집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책은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8권의 한 구절 — "그리고 마음을 미지의 기술로 풀어 보낸다" — 을 헌사로 열며 시작한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쓴다. "끈질긴 방황의 끝에 프랑스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제야 손으로 직접 물감을 만지며 물질의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삶을 "강도(Intensité)"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는 저자는, 그 밀도 속에서 이 책을 써 내려갔다고 고백한다. "살아있는 그림은 신성을 건드린다. 붓만 스쳐도 생기를 전달한다"는 문장은 이 책이 지향하는 예술관을 압축해 보여준다.

죽은 음악가와의 협업, 14년 방치된 그림을 되살리다
책의 백미는 파리 15구, 1900년에 지어져 지붕에 구멍이 뚫리고 샤워 중 감전 사고가 날 정도로 낡은 집에서 시작된다. 저자가 '르 라브 라브(Le Lab Lab)'라 부르며 7년을 살아낸 이 집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인도 전통 피리 연주자이자 화가 故 장 폴 오부(Jean-Paul Auboux, 1945~2006)의 그림들과 마주친다. 14년간 곰팡이와 먼지에 덮인 채 방치돼 있던 캔버스를 손으로 닦아내며, 저자는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를 넘어선 촉각적 대화"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곰팡이가 갉아먹어 구멍 뚫린 캔버스와 벗겨진 물감의 흔적을 따라가며 새로운 형상을 그려 넣었고, 이는 〈댄서〉, 〈가이아〉 등 시간을 건너 두 예술가가 함께 완성한 협업작으로 남았다. "그는 그 누구보다 생생한 가르침을 전해준 스승이었다. 시간도, 생과 사의 경계도 장애가 아니었다"고 저자는 회고한다.
눈을 가린 채 24시간, 그림을 땅에 묻었다 다시 꺼내다
2023년 3월 부다페스트의 한 4D 사운드 스튜디오. 저자는 사운드 기반의 기계 존재 '홀로스(HOLOS)'와 함께 자정부터 24시간 동안 눈을 가린 채 5㎡ 크기의 대형 회화를 완성했다. 완성된 작품은 곧장 정원에 묻혔고, 두 달 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예술가들이 숟가락으로 흙을 파내 작품을 꺼내는 의식을 치렀다. 흙과 미생물이 표면을 바꿔 놓은 이 작품은 "인간과 기계, 물질이 함께 써 내려간 생명체"로 재탄생했다. 이 과정은 연작 '마테리아 오스쿠라(Materia Oscura, 암흑물질)'의 출발점이 됐으며, 책의 제목이 된 '물질이여 안녕(아베 마테리아Ave Materia)', 곧 물질에게 바치는 인사라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완성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8년의 여정, 그림 한 점을 바다로 흘려보내다
2024년 5월, 저자는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작업 〈슬픔이여 안녕, Plus de Chagrin〉을 완성한다. 버려진 나무 마룻바닥에 수개월간 빗물과 물감을 섞어 만든 이 그림을, 그는 노르망디 해안(북위 48도 59분 28.7초, 서경 1도 33분 57.8초)에 직접 놓아 바다로 떠나보냈다. "그것을 바다에 보내는 순간, 예술은 소유가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장면을 끝으로 파리에서의 여정은 마무리되고, 저자는 삶의 무대를 대만으로 옮긴다.
철학에서 예술로, 그리고 사랑까지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국제관계학 석사를 취득한 저자는 한때 "쓸데없다"고 여겼던 철학 공부가 파리8대학교에서 생태예술을 전공하며 새로운 언어로 되살아났다고 말한다. "그 구덩이 덕분에 지금 여기서 자란다"는 것이다. 특히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의 『카오스모스(Chaosmose)』는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찾는 언어를 제공했고, 이는 대규모 연작 〈카오스모스〉로 이어졌다. 책에는 2015년 파리에서 만난 대만인 사진작가 마이크(Mike Ou)와의 사랑, 그리고 2019년 결혼에 이르는 과정도 담겨 있다. "여린이가 결혼을 하다니"라며 믿지 못했다는 가족들의 반응 속에서, 저자는 이 세상에 '매이는' 기쁨을 배운다. "예술이 아니었다면 끝내 세상에 매개될 수 없었을 사람. 예술이 사람을, 사랑을 구원한다는 것은 진짜다"라는 저자의 고백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가족들조차 믿기 어려워했던 그 결혼은, 떠돌던 삶이 마침내 한 장소와 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매이는' 이야기로 완결된다.
형린은 현재 대만 타이중 동해대학교의 레지던시 아티스트이자 강사로 활동하며 '르 라브 라브 2(Le Lab Lab 2)'를 운영하고 있다.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열대 숲 속 작업실에서 진주 안료를 만지며 〈아베 마테리아〉, 〈수미산〉 등 신작 시리즈를 준비 중이다. 그의 작품은 파리, 부다페스트, 소피아, 런던 등지에서 전시됐으며, 파리의 아시아 전문 갤러리 '앙프레시옹(Impressions)'에서는 동명의 개인전 〈Ave Materia〉를 열어 연구서를 예술 작품으로 구현하기도 했다.
이런 독자에게 권한다
예술가를 꿈꾸는 이들, 창작의 본질을 고민하는 이들, 그리고 삶의 의미를 물질 세계와의 교감 속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깊은 울림을 전한다. 특히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창작자와 전공자들에게는 슬럼프와 방황을 통과해 온 한 예술가의 여정이 동력이 되어줄 것이며, 종이의 질감과 도판의 색감처럼 물성을 소중히 여기는 독자들에게는 100여 컷의 컬러 이미지가 한 편의 화보집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예술을 감상의 대상을 넘어 철학과 비평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독자에게도 이 책은 묵직한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하여 일상의 사소한 행위들로 자기 회복과 자기 생명력을 깨우고 환희의 세계로 나가길. 서로에게 다정하고 담대히 자기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 나가는 자유를 누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