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만 우는 새가 있다. 나이팅게일이다. 그런데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한 프랑스 작가는 썼다. 옛날 옛적 나이팅게일은 낮에 울고 밤에는 잠을 잤다. 그러던 어느 봄밤, 포도나무 덩굴손이 다리를 휘감았다. 잠결에 묶인 새는 사력을 다해 풀려났지만, 그 후로 다시는 무방비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 밤마다 깨어 노래한다.
이 우화를 쓴 사람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다. 1908년, 그녀는 이 짧은 콩트 한 편으로 자신의 첫 단편집 제목을 정했다. 『슬픔의 긍지(포도나무 덩굴손)』(Les Vrilles de la vigne).
콜레트는 1873년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생소뵈르앙퓌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잃은 퇴역 군인이었고, 어머니 시도는 정원 식물과 동물들을 아꼈던 사람이다. 이 어머니의 존재는 평생 콜레트의 글에서 떠나지 않는다.
스무 살에 그녀는 열네 살 연상의 작가 겸 출판업과 음악비평을 하던 앙리 고티에 빌라르와 결혼한다. 필명 ‘윌리’. 사교계에서 이름값 있던 이 남자는 젊은 아내를 방에 가두고 매일 글의 분량을 채우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렇게 나온 게 클로딘 연작이다.
1900년부터 1903년까지 네 권. 학교 다니는 소녀의 발칙한 성장담은 파리를 흔들었다. 옷깃 디자인이 ‘클로딘 칼라’라는 이름을 얻었을 정도로 당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책은 모두 윌리의 이름으로 나갔다. 남의 이름으로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콜레트의 출발점은 또렷해진다. 그녀의 문장은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다. 빌려준 사람의 서명 아래 묻혀 있었다.
풀려난 새
1906년, 콜레트는 윌리와 이혼한다. 인세는 전 남편이 챙겼다. 그녀에게 남은 건 글솜씨뿐이었고, 그걸로 당장 먹고살 길이 없었다. 그래서 무대에 올랐다. 뮤직홀 마임 배우로, 종종 가슴을 드러내는 파격적인 공연으로 물랭루주에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귀족인 마틸드 드 모르니, 일명 ‘미시’와의 관계도 이 시기에 시작된다.
이 무렵 콜레트는 잡지 세 곳, 『르 메르퀴르 뮈지칼』,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라 비 파리지엔』의 청탁을 받아 짧은 글들을 발표한다. 처음부터 한 권의 책으로 기획된 글들이 아니었다. 1905년에서 1907년 사이 띄엄띄엄 쓴 산문, 콩트, 대화체 스케치가 1908년 한데 묶여 『슬픔의 긍지(포도나무 덩굴손)』이 된다.
이 시점에서 나이팅게일 우화로 돌아가야 한다. 묶여 있다가 풀려난 새는 더 이상 예전의 잠을 잘 수 없다. 콜레트의 이혼과 정확히 겹치는 그림이다. 윌리 밑에서 보낸 시간을 ‘순진하고 무방비한 잠’으로, 거기서 빠져나온 뒤의 글쓰기를 ‘깨어 있는 밤의 노래’로 치환한 것이다. 그녀는 이 비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적는다. “나는 더 이상 행복한 잠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더 이상 포도나무 덩굴손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잃은 것과 얻은 것을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는다. 어느 쪽도 부풀리지 않는다.

줄거리 없는 책
『슬픔의 긍지』를 처음 펼치는 독자는 종종 당황한다. 이야기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스물두 편의 이야기. 분명한 장 구분도 없다. 표제작 같은 우화가 있는가 하면, 개와 고양이가 주고받는 대화체 글도 있다. 가족 풍경과 해변 마을 스케치를 섞어놓은 글도 있다.
이 책을 소설처럼 읽으면 실패한다. 콜레트는 이야기를 짓지 않았다. 기억과 감각의 단편을 늘어놓았다. 책 앞쪽은 우화와 알레고리에 가깝고, 뒤로 갈수록 관찰과 성찰의 톤으로 옮겨간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1인칭의 내밀한 목소리 하나뿐이다. 누가 읽어도 이건 콜레트 자신이 말하고 있다는 걸 안다.
후대 독자 중에는 이 책을 콜레트 입문서로 권하는 이들이 많다. 짧은 형식이 그녀의 본령이라는 평가가 따라붙는다. 실제로 그녀가 가장 빛나는 지점은 장편의 서사 구조보다 짧은 산문의 밀도에 있었다. 자연, 동물, 사랑, 자유. 이 책에는 콜레트라는 작가를 이루는 모든 재료가 작은 다발로 묶여 있다.
권두에 놓인 「포도 덩굴손」은 이 책 전체를 읽는 열쇠로 거듭 언급된다. 프랑스 고등학교 문학 교재들이 이 짧은 텍스트 하나를 두고 따로 분석을 붙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한 동물 우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장을 보면 이유가 드러난다. 잠든 새의 다리를 휘감는 덩굴손을 콜레트는 시고 떫은 산미가 톡 쏘면서도 갈증을 가시게 하는 식물로 묘사한다. 고통과 쾌감을 한 단어 안에 욱여넣는다. 자연 묘사 하나에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시각이 동시에 걸려 있다. 같은 책의 다른 글에서도 이런 감각의 밀도는 일관되게 나타난다. 콜레트의 문장이 ‘관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노골적인 장면 묘사 때문이 아니라, 풍경 하나조차 몸으로 받아들이는 이 감각의 과잉 때문이다.
새가 풀려난 뒤에도 자유를 공짜로 얻지 않았다는 점도 짚을 만하다. 다리는 끈에 얽히고, 날개는 힘을 잃었다고 묘사된 그 새는 사투 끝에 빠져나온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묶였던 흔적을 몸에 새긴 채로 얻는다. 이혼 후 무일푼으로 무대에 서야 했던 콜레트의 현실과 이 문장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가벼운 작가라는 오해
콜레트는 생전에도 평가가 엇갈렸다. 사랑과 욕망을 다루는 작가라는 꼬리표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그녀를 ‘가벼운’ 작가로 분류했다. 작가 캐서린 앤 포터는 뉴욕 타임스에 지드와 프루스트가 생존해있을 때도 이미 콜레트는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소설 작가”라 불렀다. 1935년 벨기에 왕립 아카데미 회원, 1945년 공쿠르 아카데미 회원, 1949년에는 그 아카데미의 회장. 1948년에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를 둘러싼 그림이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점도 정직하게 짚어야 한다. 비시 정권 시기 친나치 매체에 글을 기고했고, 일부 작품에는 반유대주의적 서술이 남아 있다. 자유와 해방의 작가라는 이미지와 이 사실은 쉽게 포개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프랑스가 그녀에게 국장으로 예우했다는 것. 그는 점령기 파리의 수많은 문인과 예술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 그의 남편을 살려냈다.
그녀가 기고한 글들은 전시 일상을 살아가는 여인들의 애잔한 풍경들이었다. 선동적인 글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도 해석은 엇갈린다. 어느 한쪽으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말년의 콜레트를 돌봤던 사람은 그의 연하 남편, 그리고 장 콕토같은 주변의 수많은 작가들이었다. 미국 작가 트루먼 카포티는 오직 콜레트를 보려고 대서양을 건넌다.
1954년, 콜레트는 파리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가톨릭교회는 두 번의 이혼 전력을 이유로 종교장을 거부했다. 대신 프랑스는 여성 문인으로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국장을 치러주었다. 거부와 인정이 같은 죽음 위에 동시에 내려앉은 셈이다.
『슬픔의 긍지』를 백 년도 더 지난 지금 읽는 이유는 이 책이 그리는 그림이 여전히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름 뒤에서 쓰던 사람이 자기 목소리를 되찾는 과정, 그 과정이 결코 매끈하지 않다는 사실. 자유를 얻은 뒤에도 예전의 무방비한 평온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감각. 이건 백 년 전 파리의 한 여성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콜레트는 이 모든 걸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 나이팅게일 한 마리가 덩굴손에 묶였다가 풀려나는 짧은 우화 하나로. 그녀는 이 책에서 자신이 더 이상 행복한 잠을 잘 수 없다고 썼지만, 동시에 더 이상 무엇도 두렵지 않다고도 썼다.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이 작가의 평생을 관통하는 거리이기도 하다. 『슬픔의 긍지』는 그 거리를 처음으로 자기 이름으로 기록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