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년 12월, 베르사유 군사법원에서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은 피고석에 섰다. 파리 코뮌(Paris Commune) 가담 혐의였다. 판사가 형량을 선고하기 전, 미셸이 먼저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죽이길 거부한다면 내가 먼저 요구하겠다고. 종신 유형이 선고됐다. 미셸은 이 선고에 저항하지 않았다. 동료들이 총살당하는 마당에 자신만 가벼운 벌을 받는 것이 오히려 부당하다고 여겼다.
이 장면 하나가 루이즈 미셸이라는 인간을 압축한다. 두려움보다 원칙이 앞서고, 살아남는 것보다 신념을 지키는 것이 먼저였다. 그 원칙이 교사로서의 삶에서, 바리케이드에서, 유형지에서, 그리고 감옥 안에서 쓴 회고록에서 일관되게 이어진다.
사생아로 태어나 교사가 되다
1830년 5월 29일, 프랑스 북동부 오트-마른(Haute-Marne)의 브롱쿠르-라-코트(Vroncourt-la-Côte)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성주 집안의 하녀였고, 아버지는 그 집의 아들이었다. 미셸은 사생아였다. 성주인 조부모가 그녀를 거두어 길렀다. 조부모는 당시 기준으로 드문 자유주의적 교육을 미셸에게 제공했다. 그 교육이 이후 그녀의 모든 것을 결정했다.
어린 시절부터 빅토르 위고(Victor Hugo)에게 편지를 보냈다. 위고는 답장을 보냈고, 두 사람의 교류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위고는 미셸의 재판 과정을 보고 나서 용기를 ‘비로 마조르(Viro Major, 남자보다 위대한)’이라는 시로 기렸다. 1853년부터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1865년에는 파리 몽마르트르(Montmartre)에 직접 학교를 열었다. 수업료를 낼 수 없는 노동자 자녀들을 받았다. 미셸에게 교육은 직업이 아니라 혁명의 준비였다.
파리에서 미셸은 혁명가들과 접촉했다. 1870년에는 여성권리협회(Association pour les droits des femmes) 창설에 참여했다. 보불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 당시에는 파리 포위전에서 부상병 구호와 여성 위원회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1871년 3월, 코뮌이 시작됐다.
73일의 코뮌 — 바리케이드 위의 교사
파리 코뮌은 1871년 3월 18일 시작돼 5월 28일 진압됐다. 73일이었다. 미셸은 이 73일 동안 전선에 있었다. 몽마르트르 18구. 국민군(National Guard) 61대대와 함께 이시(Issy), 몽마르트르, 클라마르(Clamar) 전투에 참가했다. 남성 군복을 입고 바리케이드에 섰다.
프랑스 언론은 그녀에게 ‘라 비에르주 루주(La Vierge Rouge)’, 붉은 처녀라는 이름을 붙였다. 경멸과 공포가 섞인 호칭이었다. 미셸은 그 이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5월 24일, 어머니가 자신 대신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자 직접 경찰에 출두했다. 어머니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이것이 그녀가 체포된 경위였다. 경찰은 비열하게도 어머니를 인질로 삼아 루이즈 미셸을 검거한 것이다.
군사법원의 기소장은 미셸이 “군중의 열정을 자극하고, 무자비한 전쟁을 선동하며, 지옥의 음모로 인질들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적었다. 미셸은 이 기소 내용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진술했다. 종신 유형이 확정됐다. 사형을 면한 것에 대해서도 미셸은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뉴칼레도니아 — 유형지에서 카낙 편에 서다
1873년 8월, 미셸은 유형선 비르지니(Virginie)호에 올랐다. 함께 탄 사람 중에는 아나키스트 나탈리 르멜(Nathalie Lemel)이 있었다. 르멜은 항해 중 미셸에게 아나키즘 이론을 전했다. 뉴칼레도니아 유형 시절, 그녀는 아나키즘으로 사상적 전환을 이룬다.
유형지에서 미셸은 카낙(Kanak) 원주민과 교류했다.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고 기록했다. 1878년 카낙 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셸은 프랑스 식민 당국이 아니라 카낙 편에 섰다. 유형수 신분으로 식민지 원주민의 저항을 지지한 것이다. 미셸은 카낙 어휘 수집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이 자료는 이후 프랑스-카낙 어휘 연구의 기초가 됐다.
유형지에서도 미셸은 아이들을 가르쳤다. 유형수 자녀들을 가르치고, 원주민 아이들을 가르쳤다. 식물 실험을 통해 열대 기후에 적합한 밀 품종을 개발하는 시도도 했고 식물의 전염병을 백신을 연구하기도 했다. 유형이 그녀의 삶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없다. 1880년 코뮌 참여자 전체에 대한 사면이 선포됐다. 미셸은 11월 9일 파리로 돌아왔다. 엄청난 군중이 마중을 나왔다.
감옥에서 쓴 책 — 회고록의 탄생
귀국 후 미셸은 강연과 저술을 이어갔다. 1883년 1월, 파리 앵발리드(Les Invalides) 광장 시위에서 군중을 이끌고 빵집 약탈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에서 6년 형을 선고받았다. 3년 복역 후 사면됐다. 이 복역 기간인 1883년에서 1886년 사이, 미셸은 회고록(Mémoires)을 집필했다.
책은 1886년 2월 11일, 출판사 루아(Roy)에서 출간됐다. “제1권”으로 표기됐다. 후속 권이 이어질 것을 예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단행본 형태의 제2권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1890년, 사회주의 신문에 69회 연재의 형태로 그 내용이 발표됐다. 이 연재분은 오랫동안 ‘실종된 제2권’으로 불렸다가 뒤늦게 발굴돼 <죽음을 향해: 미출판 회고록 1886~1890(A travers la mort: Mémoires inédits, 1886-1890)>으로 별도 출간됐다.
2021년에는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가 CNRS 연구원 클로드 레타(Claude Rétat)의 편집·주석 작업을 거친 폴리오 역사(Folio Histoire) 시리즈 304번으로 <회고록>(1886)을 재출간했다. 576쪽 분량이었다. 파리 코뮌 150주년을 맞아 다시 꺼내든 텍스트였다. 원래 출판 당시 협상 과정에서 미셸이 자신의 문체를 지키고 동료들의 기억을 보호하는 방식을 편집자와 직접 조율했다는 사실도 이 시기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루이즈 미셸 회고록 — 선형이 아닌 기억의 구조
회고록은 자서전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시간 순서대로 삶을 서술하지 않는다. 독자가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한 사건들 — 코뮌, 재판, 유형 — 을 비선형적으로 교차시킨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고, 회상과 선언이 한 문단 안에 공존한다. 독자 주석 없이 읽기 어려운 밀도다. 이것은 결함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미셸의 문체는 ‘불타오르는(enflamé)’ 것으로 당대 독자들에게 묘사됐다. 부드럽지 않고, 완충재가 없다. 페미니즘 사상, 아나키즘, 빈자에 대한 연대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여성 교육에 대한 분노, 생라자르 감옥 여성 수감자들과의 대화, 코뮌 동료들에 대한 기억이 섞인다. 회고록은 개인의 삶을 집단의 싸움과 분리하지 않는다.
루이즈 미셸 회고록 안에 미셸의 페미니즘 선언이 압축된 문장이 있다. “노동자는 노예다. 그러나 노동자의 아내는 노예들 중의 노예다.” 이것은 수사가 아니었다. 미셸은 여성의 해방을 계급 해방과 분리된 별도의 과제로 보지 않았다. 두 가지가 동시에 실현되지 않으면 둘 다 불완전하다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당대 여성 참정권 운동과는 다른 거리를 두었다. 의회 정치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회고록>이 출판됐을 때 독자들이 놀란 것은 정치적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서사의 신선함 때문이었다. 격식 있는 자서전도 아니었고, 정치 팸플릿도 아니었다. 혁명가의 내면과 일상이, 분노와 서정이, 이론과 기억이 하나의 목소리로 흘렀다. 1886년 당시 이런 형식의 여성 자서전은 거의 없었다.
빅토르 위고, 폴 베를렌 — 동시대가 그녀를 기린 방식
빅토르 위고는 미셸의 용기를 시로 남겼다. ‘비로 마조르(Viro Major)’라는 제목의 시에서 위고는 미셸을 이렇게 썼다. 그녀의 날들, 밤들, 모든 이에게 내준 걱정과 눈물, 타인을 돕는 가운데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 위고는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 그러나 미셸에 대해서는 시인으로서의 판단을 내렸다. 이 여성은 영웅적이지 않은 것을 할 수 없다고.
시인 폴 베를렌(Paul Verlaine)은 1883년 재판 이후 미셸에게 시를 바쳤다. 1888년에는 샤를 기르(Charles Guyé)가 르아브르(Le Havre) 강연장에서 미셸에게 총을 쐈다. 두 발을 맞았다. 미셸은 부상 이후 법원에 출석해 가해자를 옹호하는 진술을 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이므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이 진술이 당대 신문들에 크게 보도됐다. 미셸이 생산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발언은 연설이나 글이 아니라 이런 행동들이었다.
런던 망명, 그리고 마지막 강연
1890년, 미셸은 런던으로 거처를 옮겼다. 자발적 망명이었다.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프랑스 당국의 압박을 피해 런던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1890년부터 1905년 사망 직전까지, 미셸은 프랑스와 유럽 각지를 돌며 강연을 이어갔다. 아나키즘, 여성의 권리, 노동자 연대가 강연의 중심 주제였다.
1905년 1월, 미셸은 마르세유(Marseille) 강연 중 쓰러졌다. 1월 9일, 마르세유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였다. 장례식은 파리에서 열렸다. 세 세대에 걸친 혁명가들이 운집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 집회였다.
2020년에는 뱅크시(Banksy)가 지중해 난민 구조선에 미셸의 이름을 붙였다. 루이즈 미셸호. 여성 선장이 이끌고, 페미니즘·반인종차별·반파시즘 가치를 내건 배였다. 미셸이 1878년 카낙 봉기를 지지했던 것, 그리고 』회고록『에서 아랍 유형수들에 대해 쓴 것과 같은 결이었다. 억압받는 자들의 편이라는 원칙은 국적과 시대를 가리지 않았다.
회고록을 읽는다는 것
루이즈 미셀 회고록은 한 혁명가의 자기 서술이다. 그러나 자기 서술이기만 한 책은 아니다. 미셸이 기억하는 것은 개인의 삶이 아니라 집단의 싸움이다. 코뮌에서 함께 싸운 사람들, 유형지에서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 감옥에서 함께 복역한 사람들의 이름이 이 책을 채운다. 미셸 자신은 오히려 뒤로 물러난다.
독자가 시대적 맥락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읽는다면 이 책은 더 소중하게 다가설 것이다. 코뮌이 무엇이었는지,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 누구인지, 뉴칼레도니아 유형이 어떤 조건이었는지. 그 맥락 없이 읽으면 인명과 지명과 사건이 연달아 쏟아지는 텍스트로 읽힌다.(한국어 번역본은 원본에 없는 이런 배경에 관한 주, 인물에 관한 주를 충실히 달아두었다) 그러나 그 맥락 안에서 읽으면, 이 책은 19세기 프랑스 하층 민중의 삶과 싸움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술한 기록이 된다.
미셸이 재판정에서 한 말이 회고록을 읽는 기준이 된다. “우리가 원한 것은 사회혁명이었다. 사회혁명은 내 가장 소중한 소망이다.” 이 소망은 책 전체에 걸쳐 반복된다. 분노로, 애도로, 서정으로, 때로는 구체적인 교육 방법론으로. 미셸에게 글쓰기는 싸움의 연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