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난 단편에는 꽤 약하다. 좀체 이야기가 마음에 닿는 게 별로 없다. 특히 추리소설에서 보여지는 단편들은 더욱 그렇다. 좋아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에서도 특히 단편에서는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했다. 처음부터 밝히지만 난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에서도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특별히 정감가는 인물도 없고 유일하게 캐릭터가 형성되어 있는 건 이야기의 호스트이자 주인공인 지장 스님뿐. 하지만 그렇게 단단하게 캐릭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냥 겉멋 조금 부리고 브랜드에 민감한 행각승 정도. 추리소설을 좋아하지만 한번도 트릭에 대해 고민해 보거나 작가와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추리소설을 전개하는 이야기의 방식과 소재에 조금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도다.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에서 세헤라자데의 이야기가 나오는 <천일야화>가 떠오른다. 상처받은 왕은 매일 밤마다 세헤라자데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세헤라자데는 다정하지만 조금 엄한 분위기로 천진난만한 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장소가 "에이프릴"이라는 바(Bar)이고 이야기꾼 세헤라자데가 스님으로 바뀌어 있다는 정도. 천자들은 스님의 이야기 중간중간 나서서 사건의 열쇠를 풀어보기 위해 열을 올린다. 하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던가. 어째 다들 지장스님보다는 한 수 아래다. 지장스님이 청자들에게 인간적인 매력으로 여겨지는 건 아닌 듯하다. 그저 일상에 지쳐있던 자신들에게 단물같은 이야기로 자신들을 달래주기 바랬던 것 같다. 지장스님은 스스로의 추리적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범인을 맞추기 위해. 복선을 설명해 주기 위해 이야기의 호스트를 자처하고 청자들은 "독자"들을 대신한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추리소설이 갖는 성격을 화끈하게 얘기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재밌으면 그만!" 어쩜 이렇게 쿨할까. 이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는 독자가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동의하는 바다. 추리소설 재밌으면 된다. 아니 어쩌면 이야기를 찾아 책을 펼치는 이야기 마니아들에게는 이야기에서 얻고자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재미!아닌가. 하지만 <행각승 지장스님의 방랑>이 재밌었냐고 묻는다면.. 사실 그렇게 머리를 상쾌하게 해준다거나 너무 명쾌해서 무릎을 치게 했던 이야기는 아니었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다.
봄방학을 앞둔 마지막 조회시간, 반학생들 앞에서 충격적인 고백을 시작하는 여교사의 모습은 짐짓 숨죽인 관객의 앞에서 쓸쓸하게 방백을 시작하는 배우의 모습같다. 절망과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태연한 척 담담하게 일련의 일들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 키운 어린 딸아이를 아이들의 어이없는 장난으로 잃은 어미로서 증오심을 한껏 절제하고 말이다. 형사사건의 피해자가 된 순간 일반적인 법감정을 갖고 평범했던 일상을 영위했던 사람이라도 대부분은 그 순간 자력으로 피의자를 응징하고 싶어한다. 상대에게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한 복수를 해주고 싶어하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 아닐까. "법"께서 모든 걸 해결해 주실거야라고 두 손 모아 굳게 믿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 면에서 여교사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침착하고 논리적인 모습으로 피의자들을 눈 앞에 두고 자신의 처참하고 아이러니한 입장을 반학생들 앞에서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그녀의 모습, 측은하면서도 섬뜩함을 불러 일으킨다. 그녀의 고백은 딸아이를 죽인 범인들을 뭉툭한 공권력의 손에 맡기는 것보다 그것보다 더 예리하고 아릴 수 있는 날카로운 반학생들의 심리적인 심판을 통한 공공의 적으로 만든다. 그녀의 고백은 딸아이를 죽인 범인들에 대한 학생들의 괴롭힘을 동반하고 그들의 대한 불편한 따돌림이 시작될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고백"은 감당하기 버거운 진실과 대면한 순간 평범했던 사람들이 어떤 식의 심리변화를 겪게 되는지 치밀하고 유려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다. 비현실(적이었으면 좋았을)적이고 극단적인 전개로 재미를 떠나 아주 우울하고 무거운 이야기지만 말이다. 묵직하고 상징하는 바가 남다를법한 제목들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비참하고 너무너무 슬픈 이야기들이지만 입소문만큼 정말 뜨거운 책이었다.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 이정도라니. 이런 괴물같은 신인은 대체 어느 우주에서 활동하다 지구로 보내지는 걸까. 이미 높은 별점 앞에 나 하나쯤 별 다섯개 더 보탠다고 크게 변화가 있을쏘냐. 하지만 정말 대단한 책이다.
"마데 인 차이나"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만 중국소설은 아직까지 읽고 크게 실망스런 영향을 준 책은 없었다. 물론 대놓고 실망감을 안겨 줄 만큼 취향 타는 과감한 책들이 번역되지도 않았지만. 왕 하이링은 작가 소개만 보면 현재 중국에서 누리는 인기가 보통이 아닌가 보다. 시나리오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작가의 이력이 범상치 않게 여겨지는 게 책 자체가 주말 드라마 대본축약집마냥 비슷한 구조의 갈등과 화해가 반복된다. 자칫 지루하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인류 보편적인 갈등의 화약고 :결혼 이야기:를 다룬 소설답게 아기자기 하면서도 손발을 부끄부끄 오그라들게 하는 유쾌한 구석도 적지 않다. 책이 글맛은 좀 있는 편이다. 일찌기 존경하는 뒷골목 아이들 (Backstreet Boys)께서는 그들의 첫 노래에서 "I don't care who you are where you're from what you did as long as you love me!" 사랑만 있으면 만사 OK!라고 역설하신 바 있듯이 어쩌면 우주 최고의 골칫거리라도 사랑만 있다면 아돈케어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로 있을 때 행복했다면 둘이 있을 때는 더 행복해야 되는 것이 "결혼"아니겠느냐고 말한 어느 유명가수의 평소 지론처럼 그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 같이 할 것을 맹세했는데 생각과는 너무 다른 결혼이라는 무거운 현실 앞에서 그 맹세는 한떨기 부평초 같은 마음이었던가. 중국의 신세대 부부들도 우리네와 비슷한 갈등에 직면한다. 물론 스케일이 좀 다르다. 당신과 내가 만나는 것이 아닌 당신의 패밀리와 나의 패밀리가 만나 우리가 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처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시작하면 폭풍 같은 갈등들 앞에서 조금은 의연해질 수 있을까, 그 버거운 현실, 결혼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다.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알지는 못하겠는 싱글의 복잡한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배용준은 중국에서도 인기가 많은가 보다. 낯설지 않은 그 이름에서 살짝 낯간지러운 느낌도 받았다. 싸우고 화해하는 반복지향적인 커플이 나오지만 안심하시라. 주말드라마의 결말이 그런 것처럼 이 둘의 이야기도 결국에는 반짝거리는 따스함으로 끝이 나니까.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자신의 이름을 작중 탐정에게 부여했다. 추리소설 작가 "엘러리 퀸"의 열혈 팬임을 자처하는 린타로는 퀸의 방식대로 탐정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서 따오고 탐정의 아버지는 경찰관으로 후에 함께 미궁의 사건을 수사한다. 사실 난 엘러린 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엘러리 퀸에 빗대어서 비교하면 좋겠지만 민망하게도 난 정통 미스터리 쪽은 흥미만 있을 뿐이지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간간히 접하는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을 읽다보면 그쪽은 미스터리 소설 붐이 제대로 불었는지 이렇게 서구의 유명작가를 오마주격으로 모방해서 작품을 이어나가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일본의 유명한 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는 필생의 역작을 작업하던 도중 갑작스럽게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한다. 탐정인 린타로는 조각가의 친동생의 지인으로 그의 비밀스런 사건 의뢰로 필생의 역작에 담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라이프 캐스팅 (살아있는 사람을 직접 석고로 떠서 조각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던 조각상의 "머리"가 사라진다. 누가 머리를 훔쳐갔는지, 왜 훔쳐 갔는지, 그리고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그 비밀스런 작품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린타로는 눈으로 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정황만으로 밝혀내야 한다.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만 진실이 담고 있는 억만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만큼 대담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그럼에도 진실을 알기 위해 위험한 길로 스스로를 이끈다. 설사 그 뒤에 비참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해도.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진실을 어떻게서든 감추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악의 편에 발을 담그고 있고 선량한 미소와 깔끔한 배경으로 위장하지만 그 뒤에는 추악한 이면이 숨어 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 사실로 밝혀지는 것이고 그 일을 막기 위해 한번 피를 묻혔던 손에 다시 한번 피를 묻힌다. 수작이다. 하지만 재미는 있는 반면 너무 뻔한 패턴 때문에 "수학의 정석"쯤에 비유하자면 "유제문제"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후에 밝혀질 복선들을 초반에 깔아놓고 용의자의 초점을 엉뚱한 데로 쏠리게 하기 위해 제3의 인물을 중심으로 부각하고 용감했던 죄로 너무 빨리 생을 마감하는 선의의 희생자를 등장시킨다. 탐정 린타로에 대해 짧게 언급하자면 뚜렷한 개성이 드러난다고 하기에는 조금 밋밋한 느낌이 드는 캐릭터였다. 난 미스터리 탐정 캐릭터에 꽤 깊게 열광하는 편인데 성격이 개성있게 드러나는 탐정들에게 좀더 근사한 매력을 느낀다. 린타로는 조금 아쉬운 캐릭터였다. 서운했던 부분은 가장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던 "그 인물"의 비중이 의외로 적어서 "그 인물"이 느꼈던 충격적인 진실은 후에 린타로의 그저 전하는 글로 담겨지는 부분은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다. 결국 사건을 위한 소모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미스터리 소설은 재밌지만 때론 희생되기에는 아까운 캐릭터도 더러 있다. 미스터리 소설이란 역시 인물보다는 사건이 중심이고 사건이 "주인공" 같다. 잘린 머리의 수수께끼를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 그 인물의 죽음은 지금도 서운하다.
인간에게 앎에 대한 욕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놀라운 지구별의 모습이 가능이나 했을까. 주변에서 또라이 소리를 들어가며 연구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인간은 조금씩 자연이 안고 있던 비밀의 껍질을 벗겨내 꿀맛이 나는 달콤한 열매를 얻어낼 수 있었다. 특히 우리가 배워온 숫자와 수학기호들은 그 역사가 너무도 오래돼서 고대 그리스에서도 수학이라는 학문은 그리스인들의 앎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유용한 증명의 발견 중에 하나였다. α, β, γ, π, Ω, (알파 베타 감마, 파이, 오메가) 모두 그리스어에 그 뿌리를 두고 오늘날에도 전세계 수학적기호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을 것이다. 직각삼각형에서 밑변의 길이와 높이를 알면 빗변의 길이를 알 수 있음을 증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오늘날 수학사에 길이길이 그 족적을 남겨 배워야만 하는 신생인류에게 지식의 필수 소스로 여겨지는 수학공식이다. "의심하라! 그러면 발견할 것이다"라는 건 위아래 구분이 엄격하고 스승과 제자라는 사회적인 굴레에 얽매일 수 밖에 없는 관계에서는 당돌하고 관례를 어겨버린 괘씸죄이자 반역 행위였을 것이다. 수학적 스캔들로 유명한 피타고라스와 제자 히파소스의 그 비극적인 사건도 피타고라스의 증명만으로는 풀 수 없었던 의문에서 시작했었던 것이었고 스승의 미완의 증명을 반증하는 제자의 움직임은 그와 자신의 학파의 존립마저도 위협할 수 있는 반기로 여겨졌을 것이다. 한줄의 수학사적 이야기에서 시작한 작가의 상상력은 <천년의 침묵>이라는 작품에서 장대한 서사적 이야기로 펼쳐지고 그 안에는 앎의 욕망을 꿈꾸던 젊은 아카데미아의 학자들의 치열한 삶이 닮겨 있다. 장르적인 소스들도 적절하게 녹아 있다. 장황하지 않고 허황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수학사적 스캔들의 설들과 결국 아귀를 맞춰 나간다. 상상력으로 무수한 군상들의 삶을 펼쳐놨다가 종착지는 역사적인 사실에서 끝이 난다. 말년의 피타고라스의 삶도 책처럼 비극적이었다고 한다. 많은 설 중에 하나이지만 그중 가장 설득력 있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라고 한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메이드 인 코리아 장르소설"이다. 소스가 너무 부족해서 이야기마저도 남의 나라 것을 가져다 극본화하는 현실에서 이런 서사가 있는 이야기들은 좋은 소스가 될 것이다. 빨리 읽히는 속도 덕분에 특정인물들에 대한 깊이 있는 몰입이 조금 아쉽게 여겨지지만 이야기만은 속도감 있게 정말 잘 읽힌다. 우리나라 태생의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장르이야기지만 된장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 글이다. 오히려 풍부한 우리말 어휘로 소설적인 감정묘사가 좀더 진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