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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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선

정이현│마음산책│2007.12.10│p.245

 

 

 

텍스트에 지쳐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고 불편하지만 - 내가 좋아서하는 일임에도 - 텍스트는 그저 백지 위에 검은 잉크의 흐름, 그 흔적에 불과하고 나는 습관적으로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뿐입니다. 그러니 방금 전에 읽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더라, 나는 몇 번이나 되짚어 따라가지만 그 흐름을 놓치고 망연히 구경하는 날들이 늘어갑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올라 전국적으로 봄비를 뿌릴 준비를 하던 스산한 겨울의 끄트머리,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갑자기 음악의 템포가 알레그로에서 안단테로 바뀌듯 다른 세상을 만난듯해서 그 경쾌한 침묵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립니다. 그 날에 만난 책 <풍선>, 나는 소설가가 쓴 소설이 아닌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정이현 작가는 <달콤한 나의 도시>로 만났었는데 그녀의 텍스트가 어떠했는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합니다. 소설 밖에서 만난 그녀의 글은 언제나 내가 쏟아내고 싶은 날을 감춘 보드라움, 그러함을 가까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도 보았음직한 영화, 드라마들을 소재로 하여 그녀의 단어를 쏟아내는데 역시, 다르구나 합니다. 그 중에는 나도 보았던 영화가 제법 있는데 역시, 다르구나 감탄합니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투영하는 능력, 그것은 소설가들에게 점지된 능력일까요. 반복하고 반복하다보면 내게도 얻어질까요?

 

 

p. 26

나는 치명적인 것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무섭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나머지, 타인에 대해 아주 쉽게 품평하고 또 충고한다. 오만한 게몽의 태도로 자신과 다른 타인의 방식을 '바로잡아' 주려 한다.

 

p. 35

다 괜찮다. 다만 뭘 해도 행복하기를. 절벽 끝에서라도 스스로에게 상처 주지 말기를.

 

p. 51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분명히 '거는' 쪽이 더 아프다. 그렇지만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p. 64

남루하고 고당한 현실과, 그럼에도 아직 신기루처럼 붙잡고 있는 꿈의 갈피 사이에서 옴작달싹 못하는 30대 여성의 초상에 입맛이 썼다.

 

 

정신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주워 담습니다. 내가 글로 풀어내지 못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따르며 공감하는 순간 만끽하는 달콤함이란 그것에 중독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짜릿함입니다. 마치 내 손 끝에 써진 양 의기양양해서는.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릴 역을 한참 지나쳐버린 지하철에서처럼 망연해집니다. 터덜 터덜 돌아오는 기분이 몽연(蒙然)합니다.

 

 

p. 106

"그러게. 내가 지금보다 네 살이 어리다면 매일 춤추고 다니겠다. 근데 <싱글즈>의 나난도 그러더니 왜 영화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노처녀들은 죄다 스물아홉 살인 거야?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걔들 서른 살 맞이하는 자세가 너무나 비장하지 않아?" "꼭 일이냐, 결혼이냐, 양당간에 결정을 내려놔야 삼십대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스물아홉 살짜리 남자가 자기 나이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화 본 적 있어? 이게 바로 서른 넘은 여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재생산하는 거라고!"

 

p. 179

시간이 괜히 흐르지는 않았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게 반드시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법은 배우게 된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날들이, 스치고 지워졌을 순간이 그녀의 손 끝에서 꽃을 피웁니다.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에 현혹되었는데 장을 채울수록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이야기에 맥이 빠집니다. 드문드문 옹졸해지기도 하는데 배슬배슬 웃음이 납니다. (소설가라는 명함은 잠시 잊고) 뜨끈뜨끈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군것질거리를 잔뜩 쌓아두고는 두서도, 맥락도 없이 수다를 떨며 까르까르 웃다보면 나를 한 뼘은 자라게 할 것 같은 언니를 만난 것 같아 반가운 마음만 기억합니다. 다음엔 그녀의 소설을 다시 만나야겠습니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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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인규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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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허밍웨이│문학동네│2012.01.20│p.160

 

 

 

친애하는 산티아고 할아버지,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겨울바다에 다녀왔습니다. 바람이 사납던 겨울바다는 위엄 가득 거친 파도를 보란 듯이 뿜어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히 오후 햇살에 느긋이 반짝임을 더합니다. 바다가 갖고 있는 이 여유는 위용(威容), 그 당당함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요. 당신은 내 눈이 닿지 못하는 저 깊은 바다에서 청새치와 힘에 겨운 싸움을 치르고 있습니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의미 없이 읊조리던 단어가 마음에 절절히 닿습니다. 크기를 가늠조차 어려운 두려움과 깊이를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절망 앞에서 당신의 담담함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 한 켠 묵직한 무언가가 비감(悲感)해짐을 느낍니다. 도대체 어떤 세월을 견디고 나면 그런 담담함을 갖을 수 있는 걸까요?

 

 

p.31

노인은 언제나 바라를 '라 마르(la mar)'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다를 다정하게 부를 때 쓰는 스페인어였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따금 바다를 나쁘게 말하긴 하지만 그런 때도 항상 바다를 여자처럼 여기며 말했다. 젊은 어부들 가운데, 상어 간으로 한창 벌이가 좋을 때 구입한 모터보트를 타고 다니며, 찌 대신 부표를 낚싯줄에 매달아 사용하는 자들은 바다를 남성인 '엘 마르(el mar)'라고 불렀다. 그들은 바다를 경쟁자나 투쟁 장소, 심지어 적처럼 여기며 말했다. 하지만 노인은 언제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고, 큰 호의를 베풀어주거나 거절하는 어떤 존재로 생각했다. 만약 바다가 사납고 악한 행동을 한다면 그건 바다도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었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바다는 달의 영향을 받는다는 게 노인의 생각이었다.

 

p. 67

노인은 뱃머리 판자에 기대어 좀더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물고기는 꾸준히 헤엄쳐 나아갔고 배는 천천히 검푸른 바다 위를 이동했다. 동풍이 불어와 바다가 약간 일렁였다. 정오가 되자 노인의 왼손은 쥐가 풀렸다.

 

 

당신이 끊임없이 그리워했던 사내아이를 당장이라도 곁에 데려다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당신을 지켜보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틀 밤과 낮을 꼬박 물고기와 싸운 끝에 당신이 힘겨운 승리를 거뒀을 때 나는 환호할 수 없었습니다. 물고기의 엄청난 크기를 감당하기에 당신의 배는 너무 작고 당신은 너무 지쳤으니까요. 청새치와의 힘겨웠던 싸움보다 더 혹독한 싸움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요. 나는 두려웠습니다. 혹여 당신이 모든 것을 그만둘까 나는 무서웠습니다. 당신의 방식대로라면 바다도 어쩔 수 없었겠지만 그 시간의 바다는 당신께 너무 냉혹했습니다.

 

 

p. 115

"이게 다 꿈이라면, 그래서 내가 저 물고기를 낚은 일이 아예 없었던 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미안하구나. 물고기야. 애당초 너를 낚은 게 잘못이었어." 노인은 말을 멈췄다. 그는 이제 물고기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피가 빠져나가고 파도에 씻긴 물고기는 거울 뒷면 같은 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줄무늬는 아직 그대로 보였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질 말았어야 했다. 물고기야." 노인은 말했다. "너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나오질 말았어야 했어. 미안하구나. 물고기야."

 

 

당신이 모든 에너지를 바다에 토해내고 육지에 도착했을 때 - 고백하자면 나는 마음 한 켠에서 당신을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돌아와 준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 당신께 남은 것은 길이가 5.5미터에 달하는 그러나 이제 뼈와 대가리만 남은 커다란 청새치와 늙고 지친 몸뚱아리 뿐입니다. 아니네요. 바다를 닮은 아이가 잠든 당신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끙끙 신음을 앓겠지만 입꼬리는 약간 올라가 얼굴 가득 세월이 깊은 주름을 만들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을 닮은 사자의 꿈을 꾸면서.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야기는 참 시시합니다. 결국 당신은 86일이나 물고기를 잡지 못한 운이 나쁜 늙은 어부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시시한 이야기가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드는 까닭인지 산티아고 할아버지, 당신이 속 시원이 말해주세요. 홀로 청새치를 잡을 용기가 몸 어느 구석에서 솟아나는건지, 보이는 것은 바다 뿐인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지친 싸움에서 하나님께 조건을 달며 기도하는 너스레는 어디에 숨겨두었던건지, 오히려 청새치의 처지를 걱정하는 따뜻한 심성은 본디 타고나는 것인지. 결국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당신은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하나님을, 애당초 당신의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았을 청새치를, 죽을 고비를 넘기며 잡은 귀한 청새치를 모두 훔쳐 간 상어들을 원망하지 않네요. 오히려 사과를 합니다. 아... 나는 아직 당신의 깊은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살아온 30년이 당신의 이틀에 비해 참 시시해보이는군요. 아! 우리 모두네 삶은 모두 이렇게 시시한가봅니다. 당신은 시시함을 위장하여 명징하게 신산(辛酸)한 삶의 위대함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참으로 덤덤하게 전합니다. 그 날 내가 마주했던 겨울바다의 여유는 아마 당신을 닮은 모양입니다. 산티아고 할아버지, 당신은 여전히 오늘도 표표히 망망대해 어딘가의 청새치를 찾고 계시겠지요?

 

 

 

p. 122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노인은 생각했다.

행운이란 여러가지 모습으로 찾아오는데 누가 그걸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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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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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질문 

차동엽│명진출판│2012.01.07│p.368

 

 

 

이 책은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게하기 전 절두산성당 박희봉 신부께 보낸 질문지에서 시작됩니다. 그 물음에 대하여 차동엽 신부님은 프롤로그에서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 거부할 수 없는 물음들'이라고 칭하며 그것들은 실상 절망 앞에 선 '너'의 물음이며, 허무의 늪에 빠진 '나'의 물음이며, 고통으로 신음하는 '우리'의 물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을 한 껏 준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에는 종교적 색채가 명징해서 - 나는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 삶의 주옥같은 질문과 답변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도 남의 답안지를 힐끔거리는 불안과 불편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좌불안석(坐不安席)입니다.

 

'한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착한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나?’ ‘우리는 왜 자기 인생에 쉽게 만족하지 못할까?’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나?’ 와 같은 삶을 향한 근복적인 24가지 질문에 대하여 차동엽 신부님은 우리 시대의 대표 멘토답게 최선의 답을 제시합니다. 책을 덮은 후 (최근에 맘에 드는 대목에 플래그잇을 붙이기 시작했는데) 수도 없이 붙여진 색색의 플래그잇이 이 한 권의 책이 수도 없이 내 마음을 만졌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책을 덮고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그 색색의 플래그잇은 내게 어떠한 이야기도 붙여낼 수 없었습니다. 텍스트 내면의 진실을 나는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플래그잇이 붙어 있던 자리를 소개하면서 리뷰를 대신합니다.

 

 

p. 37

" 너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향하여 인내하라. 그리고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다.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너에게 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그 답과 더불어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대로 모든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그대로 살자.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너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p. 51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그릿의 대표적 작가 니코스 카장차키스는 말했습니다.

 " 현실은 바꿀 수 없다. 현실을 보는 눈은 바꿀 수 있다."

 

p. 82

우리는 특히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이런 시선을 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름'을 너무 쉽게 '틀림'이라는 말로 바꿉니다. 우리가 의를 가지고 편가름을 하고 노선싸움을 하는 것도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이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미성숙을 넘어 성숙한 사회가 될 때 서로의 행복이 살아납니다.

 

p. 101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자체를 즐기라.

배를 곯을지언정 의미 없는 일은 하지 말라.

돈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영혼을 잃기 쉽다.

명예를 구하여 일하는 사람은 기쁨을 잃기 쉽다.

권세를 탐하여 일하는 사람은 친구를 잃기 쉽다.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일을 위하여 일하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p. 105

" 손바닥 안에 주어진 것에서 풍요를 만끽할 줄 모르면, 우주를 소유한들 배고픔은 여전하다."

 

p. 122

자신의 VIP 리스트 가운데 가장 첫 번째 귀빈 이름을 "내 영혼"이라 적은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p. 208

인간은 오감을 통하여 세상을 파악합니다. 오감 중에서 촉각, 후각, 미각을 통해서 약 10퍼센트의 정보가 수용됩니다. 그리고 청각을 통하여 20퍼센트가 수용되는데 가청 영역은 16~2만 헤르츠로 제한된다고 합니다. 나머지 70퍼센트가 시각을 통해 파악되지요. 그렇지만 우리가 그나마 볼 수 있는 세계는 우주의 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인간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얼마나 미미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릭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으로 볼 때이다."

 

p. 209

故 박완서 작가는 자신이 만난 신의 손길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 나는 내 눈으로 한번 똑똑히 분꽃이 피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갑자기 봉우리가 활짝 벌어질 줄 알았는데 지키고 앉았으니까 왜 그렇게 안 벌어지는지요. 나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약간 느슨해진 꽃봉이리를 손으로 펴려고 했습니다. 잘 안 되더군요. 인내심이 부족한 나는 기다리다 지쳐서 잠깐 자리르 떴다 와보니 분꽃은 용용 죽겠지, 하는 얼굴로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쎄 내가 억지로 펴려 했던 꽃봉오리만이 피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지 뭡니까. 어른들한테 일렀더니 손독이 올랐다고 하더군요. 내 어린 손도 독이 되는데 어떤 인자한 힘이 꽃을 피웠을까? 그건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내 최초의 경이였습니다."

 

p. 230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에는 행복, 기쁨, 평화 등의 '목적가치'와 이 목적가치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부귀, 권세, 명예 등의 '수단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목적가치입니다. 수단가치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은행에 저금한 100억 원은 그것이 좋은 용도에 사용되지 않으면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보람을 창출해낼 때에야 가치를 지닐 수 있습니다.

 

p. 231

우주적 여운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난 故 스티브 잡스는 마치 단명을 자위하듯 말합니다.

 "여정은 (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지만, 그 자체로) 보상이다."

 

p. 260

말년의 아인슈타인이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데 어째서 배움을 멈추지 않으십니까?"

이에 아인슈타인이 재치 있고도 뼈 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차지하는 부분을 원이라고 하면 원 밖은 모르는 부분이 됩니다. 원이 커지면 원의 둘레도 점점 늘어나 접촉할 수 있는 미지의 부분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지금 저의 원은 여러분 것보다 커서 제가 접촉한 미지의 부분이 여러분보다 더 많습니다. 모르는 게 더 많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데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p. 289

용서해야 속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신약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용서'라는 그리스어 단어를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과거에 매달려 수없이 되뇌며 딱지가 앉기 무섭게 뜯어내는 것이 '원한'입니다. 상처가 영원히 아물지 못하도록 하는 거죠.

용서하지 않을 때 스스로 '과거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것은 용서를 할 수 있는 '통제권'을 타인, 즉 원수에게 내어주고서 자기 자신은 상대방의 잘못으로 입은 상처에다 미움의 속박까지 당하는 운명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p.324

" 나는 마치 도둑놈처럼 시간을 좀 훔쳤습니다. 식사 시간도 좀 훔쳐오고, 잠자는 시간도 좀 훔쳐오고, 사람들과 잡담하는 시간도 좀 훔쳤지요. 그리고 훔쳐온 그 시간을 용감하게 휘어잡고 시를 썼습니다!"

청중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한 상태가 되어 대꾸 한마디도 못하자 프로스트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늘 바쁘다고 생각하지만, 필요한 시간은 언제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겁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필요한 시간을 언제든지 '훔쳐와서' 사용했다는 시인의 말에 재치가 넘칩니다. 동시에 정곡을 찌릅니다.

 

p. 334

시련을 원망하면 거기서 주저앉고 말지만, 시련을 기회로 삼으면 거기서 위대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p. 345

사랑에게서 나와서, 사랑으로 살다가, 끝내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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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양윤옥 옮김, 권신아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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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작은

에쿠니 가오리│소담출판사 │2012.02.14│p.96

 

 

 

봄을 닮아 싱그러운 책 한권을 만났습니다. (이야기는 눈이 내리는 차가운 아침 시작되는데 말이죠) 에쿠니 가오리의 책은 오랜만이라 설레임이 저 만치 앞서 마중을 갑니다. 대학 시절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좋아했었는데 <빨간장화> 이후로 그녀의 책을 들추지 않았습니다. 내게 깊이 각인된 그녀의 책 띠지에 담긴 청초한 이미지가 어느 날 우연히 네이버 검색에서 마주한 그녀와 너무 달라서 나는 적잖이 충격이었습니다. (미안해요, 나 예쁜 여자가 좋은가 보오. 농담입니다. 약간의 진심도 담은) 그녀의 책을 수집하며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들었던 이유는 오렌지 쿠기 같은 상큼한 그녀의 문체들도 있지만 슬픔의 깊은 우물에 풍덩 빠지지 않는 담담함과 울고 불고 눈물 쏙 빼놓지 않는 초연함의 그 적절한 혼합이 나는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치 신선한 야채가 듬뿍 담긴 샌드위치와 오렌지 에이드의 상큼함처럼.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의 글이 마음에 닿지 않고 어딘가를 머무릅니다. 진실을 담지 못한 가벼움에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삼키지 못합니다.

 

그러니 저러니 하여도 옛정이 있어서 그녀의 신간 소식은 언제나 반갑습니다. 예쁜 일러스트와 함께 재출간된 <나의 작은 새>는 봄바람을 살랑 담은 따뜻한 동화책을 읽는 기분입니다. 그녀의 텍스트는 여전히 섬세하여 모든 색에 우유빛 흰색을 섞은 듯 보드랍게 움직입니다. 일상의 보통날들을 그녀만의 따뜻한 시선으로 예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감각 또한 탁월하네요. 아마 내가 지금 3개월이 조금 지난 똥꾸빵꾸 말썽쟁이 말티즈 한 마리 - 미워도 고와도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악한 존재라서 나는 해피(이름을 바꿔주고 싶은데 정말 귓등으로도 듣질 않네요. )에겐 한없이 약해집니다. - 키우고 있어서 그녀의 이야기에 더 너그러워졌는지도 모르겠어요. 아, 우리 해피도 작은 새처럼 말을 할 수 있다면 ' 나에게 약이라는 건 럼주를 끼얹은 아이스크림이야' 처럼 말이죠, 그렇게 농을 섞은 푸념도 풀어봅니다.

 

어느 날 찾아든 작은 새 한 마리와 그런 작은 새에게 한 없이 너그러운 나와 무엇에든 완벽한 나의 여자친구는 미묘하다라고 말하기엔 조금 멋쩍게 알맞은 균형의 삼각관계를 이룹니다. 물론 작은 새는 여자친구를 질투하지만, 어느 날 윗집 노부부의 집에서 작은 새를 발견했을 때 나는 어딘가 한웅큼 서운함을 얻지만, 그 뿐입니다. 균형과 균질, 아마도 에쿠니 가오리는 누구보다 그것에 뛰어난 작가임이 틀림 없네요.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야기는 무언가 중심을 잃은 듯 가벼이 흩날립니다. 봄맞이 대청소를 하는 그들의 봄엔 어떤 이야기가 그려질지 아쉬움으로 책장을 덮습니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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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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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독서

김경욱 │문학동네 │2008.09.25 │p.293

 

 

 

책 이야기를 책으로 쓰려면 과연 얼마만큼의 독서가 필요할까요.

 

<위험한 독서>라는 단단한 제목에서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오릅니다. 8편의 이야기가 담긴 <위험한 독서>라는 단편집을 통해 나는 김경욱 작가를 처음 만났습니다. 등단한지 올해로 20년이나 된 작가가 이렇게 낯설다니 나는 이제 더 이상 책이 좋다, 라는 말을 꺼내기 두려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위험한 독서>에서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이야기에 빠져 들었습니다.

 

 

● 위험한 독서 ……「문학동네」 2005년 가을

 

집 앞에 '달빛마루'라는 이름도 예쁜 도서관이 생겼습니다. 평생학습센터도 함께 생겼습니다. 평생학습센터에 눈이 번쩍 하는 수강 과정이 있는데 나는 여전히 망설임을 멈추지 못합니다. 그것은 리딩큐어(Reading Cure, 독서심리치료) 기본과정입니다. 머뭇거림이 무작정 길어지고 있을 때 이 책을 만났으니 나는 심장이 쿵,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을 마주하고 말았지요. 이렇게 책이 나에게 마음을 건넵니다.

 

책 치료사인 '나'는 어떤 책을 읽으면 7년 사귄 남자친구를 깨끗이 잊을 수 있느냐고 묻는, 자신을 밥벌레라고 말하는 그녀와의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p. 16

독서로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를 두려움 없이 똑바로 바라보게 할 수는 있다.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남에게 이해받는다는 것의 기쁨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 순간 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사육하던 괴물은 자취를 감추었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서른 살의 성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독서의 분량은 가난했고 이렇다 할 중심도 없어 종잡을 수 없는 그 여자, 7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친구의 배신을 알아차리고도 모른 척 하는 답답한 그 여자라는 밍밍한 책 한 권을 만났습니다. p. 25 당신은 나에게 어떤 책이었을까. 당신이라는 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처럼 첫 문장부터 독자를 긴장하게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 별다른 기대도 이렇다 할 사전정보도 없이 무심코 읽기 시작한 책일 뿐이었다. 더구나 당신이라는 책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몇 번이고 책장을 덮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가 …… 나를 읽어봐. 주저하지 말고 나를 읽어봐. 순진한 당신의 속삭임은 차라리 외설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흥미를 돋우지 못했던 덤덤한 책은 읽을수록 나를 위험한 깊이로 빠져 들게 합니다.

 

책을 처방하고 그녀를 치료하던 '나'는 이제 그녀라는 책을 통해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녀와의 상담이 끝났음에도 '나'는 그녀의 개인 홈페이지를 뒤적거립니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공포는 ‘ 최근 2주간 새 게시물이 없습니다.’ 라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소설을 쓰게 되었냐는 인터뷰에서 작가는 말했습니다. “TV와 영화매체는 자신을 잊게 하지만 책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잊고 싶은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거울을 들이대면 누가 좋아할까. 무방비 상태, 본래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비취주기 때문에 독서는 힘들어 더 나아가 위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자신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고독한 요즘의 날들에.

 

p. 21

현명한 독자가 되고 싶다면 독서를 통해 교훈 따위를 찾아낼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라. 독자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계몽이 아니라 공감이니.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의 스무살이 되던 '나'는 장래가 불투명한 남자친구의 폭발 직전인 성욕으로부터 순결을,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한 파탄으로부터 가정을, 그리고 제3세계해방전선으로부터 맥도날드를 지켜야 합니다. 메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맥도날드 매장처럼 '나'의 가정 또한 맥도날드화 됩니다. 의사소통은 몇 마디로 충분했고, 맥도날드 고객들처럼 끼니는 스스로 장만하고 치워야 했으며 노동 또한 분산 되었습니다. 합리적인 사고에 지배당하는 사회,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메뉴얼의 최점단의 그 곳, 맥도날드 뿐인가요?

 

『천년여왕』에서는 신춘문예 최종심에까지 오른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귀농을 선택하고 우려와 달리 아내는 그 곳의 시간에 점점 생명을 얻는 화초처럼 피어납니다. 그의 고독은 짙음을 더해가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글을 쓰는 것, 하지만 번번이 그가 쓴 초고를 내밀면 아내는 어디서 본 듯 하다며 처음 듣는 작품 이름을 댑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아내가 외계인이 아닐까 하고. 『게임의 규칙』에서는 글자를 배우기도 전 읍내 상점 간판을 줄줄 읽었다는 광수가 불결한 문장에서, 가증스러운 숫자에서 마음을 잃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에서는 사랑의 도피처로 결혼을 택한 여자 수진, 한가로운 일상에 우연히 한 신인감독의 인터뷰를 보게 되고 그가 만든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을 닮았음을 직감하지만 수진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이 있는지. 『고독을 빌려 드립니다』 에서는 '너그러움'과 '고독'을 대여하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을 보여 줍다.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에서는 카드빚과 월세방 청산을 위해서 자궁을 빌려 준 아내와 달팽이를 밟아 죽이는 것 밖에는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남자의 이야기가  『황홀한 사춘기』에서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그 시간, 스파르타 기숙학원들의 짓밟히는 어린 청춘들의 이야기, 그러나 결국은 대입학원의 강사가 된 '나'가 나옵니다.

 

 

8편의 이야기는 봄날의 강물처럼 잔잔하게 그러나 멈춤없이 제 속도로 흐릅니다. 단편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나에게 그는 단편의 맛을 감칠나게 전달합니다. 다양한 소재와 필체, 끊임없이 현실과 그 곳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갸웃거리기도 하며 이야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텍스트는 단순히 활자의 유희(遊戱)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 우리가 이제 익숙해 덤덤히 무뎌진 날카로웠던 칼날을 조심스럽게 다시 쥐게 합니다. 문학평론가 서영채님께서 그를 일컫어 '진화하는 소설기계'라 이름 했는데 역시나 김경욱 작가는 이야기를 쥐락펴락 잘 놀 줄 아는 작가입니다. 단편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도 그가 끊임없이 던지는 흥미로운 소재에 넋을 잃고 빠져 들었습니다. ( 그러나, 특히, <위험한 독서>가 장편으로 쓰여져 그의 박식함을 더욱 뽐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군요.)

 

김경욱 작가의 첫인상은 매우 불친절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우나 그는 독자의 몫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남겨 두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불친절함에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기분은 오히려 과잉 친절이 생산한 거부감, 맥도날드의 메뉴얼처럼 감정은 배제되고 입력된 행동에서 산출되는 의미없는 친절에 익숙해진 우리, 그 메뉴얼을 배제한 진심을 기대했던 탓일까요. 그리고 나는 여전히 리딩큐어 기본과정을 수강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위험한 독서에 준비가 덜 된 탓이겠지요.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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