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선 - 명랑한 사랑을 위해 쓴다
정이현 지음 / 마음산책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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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선

정이현│마음산책│2007.12.10│p.245

 

 

 

텍스트에 지쳐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기 부끄럽고 불편하지만 - 내가 좋아서하는 일임에도 - 텍스트는 그저 백지 위에 검은 잉크의 흐름, 그 흔적에 불과하고 나는 습관적으로 그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뿐입니다. 그러니 방금 전에 읽었던 내용이 무엇이었더라, 나는 몇 번이나 되짚어 따라가지만 그 흐름을 놓치고 망연히 구경하는 날들이 늘어갑니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올라 전국적으로 봄비를 뿌릴 준비를 하던 스산한 겨울의 끄트머리,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서니 갑자기 음악의 템포가 알레그로에서 안단테로 바뀌듯 다른 세상을 만난듯해서 그 경쾌한 침묵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립니다. 그 날에 만난 책 <풍선>, 나는 소설가가 쓴 소설이 아닌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정이현 작가는 <달콤한 나의 도시>로 만났었는데 그녀의 텍스트가 어떠했는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합니다. 소설 밖에서 만난 그녀의 글은 언제나 내가 쏟아내고 싶은 날을 감춘 보드라움, 그러함을 가까이 닮아 있습니다. 우리도 보았음직한 영화, 드라마들을 소재로 하여 그녀의 단어를 쏟아내는데 역시, 다르구나 합니다. 그 중에는 나도 보았던 영화가 제법 있는데 역시, 다르구나 감탄합니다. 대상을 관찰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투영하는 능력, 그것은 소설가들에게 점지된 능력일까요. 반복하고 반복하다보면 내게도 얻어질까요?

 

 

p. 26

나는 치명적인 것을 잃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무섭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나머지, 타인에 대해 아주 쉽게 품평하고 또 충고한다. 오만한 게몽의 태도로 자신과 다른 타인의 방식을 '바로잡아' 주려 한다.

 

p. 35

다 괜찮다. 다만 뭘 해도 행복하기를. 절벽 끝에서라도 스스로에게 상처 주지 말기를.

 

p. 51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분명히 '거는' 쪽이 더 아프다. 그렇지만 '걸'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랑이다.

 

p. 64

남루하고 고당한 현실과, 그럼에도 아직 신기루처럼 붙잡고 있는 꿈의 갈피 사이에서 옴작달싹 못하는 30대 여성의 초상에 입맛이 썼다.

 

 

정신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주워 담습니다. 내가 글로 풀어내지 못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따르며 공감하는 순간 만끽하는 달콤함이란 그것에 중독되어보지 못한 사람은 차마 상상도 하지 못할 짜릿함입니다. 마치 내 손 끝에 써진 양 의기양양해서는.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내릴 역을 한참 지나쳐버린 지하철에서처럼 망연해집니다. 터덜 터덜 돌아오는 기분이 몽연(蒙然)합니다.

 

 

p. 106

"그러게. 내가 지금보다 네 살이 어리다면 매일 춤추고 다니겠다. 근데 <싱글즈>의 나난도 그러더니 왜 영화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노처녀들은 죄다 스물아홉 살인 거야?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걔들 서른 살 맞이하는 자세가 너무나 비장하지 않아?" "꼭 일이냐, 결혼이냐, 양당간에 결정을 내려놔야 삼십대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리고 스물아홉 살짜리 남자가 자기 나이의 무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화 본 적 있어? 이게 바로 서른 넘은 여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재생산하는 거라고!"

 

p. 179

시간이 괜히 흐르지는 않았구나. 안도감이 들었다. 나이가 든다는 게 반드시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법은 배우게 된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날들이, 스치고 지워졌을 순간이 그녀의 손 끝에서 꽃을 피웁니다.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에 현혹되었는데 장을 채울수록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이야기에 맥이 빠집니다. 드문드문 옹졸해지기도 하는데 배슬배슬 웃음이 납니다. (소설가라는 명함은 잠시 잊고) 뜨끈뜨끈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군것질거리를 잔뜩 쌓아두고는 두서도, 맥락도 없이 수다를 떨며 까르까르 웃다보면 나를 한 뼘은 자라게 할 것 같은 언니를 만난 것 같아 반가운 마음만 기억합니다. 다음엔 그녀의 소설을 다시 만나야겠습니다.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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