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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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독서

김경욱 │문학동네 │2008.09.25 │p.293

 

 

 

책 이야기를 책으로 쓰려면 과연 얼마만큼의 독서가 필요할까요.

 

<위험한 독서>라는 단단한 제목에서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오릅니다. 8편의 이야기가 담긴 <위험한 독서>라는 단편집을 통해 나는 김경욱 작가를 처음 만났습니다. 등단한지 올해로 20년이나 된 작가가 이렇게 낯설다니 나는 이제 더 이상 책이 좋다, 라는 말을 꺼내기 두려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위험한 독서>에서 나는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이야기에 빠져 들었습니다.

 

 

● 위험한 독서 ……「문학동네」 2005년 가을

 

집 앞에 '달빛마루'라는 이름도 예쁜 도서관이 생겼습니다. 평생학습센터도 함께 생겼습니다. 평생학습센터에 눈이 번쩍 하는 수강 과정이 있는데 나는 여전히 망설임을 멈추지 못합니다. 그것은 리딩큐어(Reading Cure, 독서심리치료) 기본과정입니다. 머뭇거림이 무작정 길어지고 있을 때 이 책을 만났으니 나는 심장이 쿵,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을 마주하고 말았지요. 이렇게 책이 나에게 마음을 건넵니다.

 

책 치료사인 '나'는 어떤 책을 읽으면 7년 사귄 남자친구를 깨끗이 잊을 수 있느냐고 묻는, 자신을 밥벌레라고 말하는 그녀와의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p. 16

독서로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를 두려움 없이 똑바로 바라보게 할 수는 있다. 같은 생각을 품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남에게 이해받는다는 것의 기쁨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낀 순간 소년이 자신도 모르게 사육하던 괴물은 자취를 감추었다.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말해준다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다. 당신의 독서목록은 그 자체로 당신의 자서전이고 영혼의 연대기이다.

 

서른 살의 성인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독서의 분량은 가난했고 이렇다 할 중심도 없어 종잡을 수 없는 그 여자, 7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친구의 배신을 알아차리고도 모른 척 하는 답답한 그 여자라는 밍밍한 책 한 권을 만났습니다. p. 25 당신은 나에게 어떤 책이었을까. 당신이라는 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처럼 첫 문장부터 독자를 긴장하게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 별다른 기대도 이렇다 할 사전정보도 없이 무심코 읽기 시작한 책일 뿐이었다. 더구나 당신이라는 책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몇 번이고 책장을 덮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지 않았던가 …… 나를 읽어봐. 주저하지 말고 나를 읽어봐. 순진한 당신의 속삭임은 차라리 외설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나 흥미를 돋우지 못했던 덤덤한 책은 읽을수록 나를 위험한 깊이로 빠져 들게 합니다.

 

책을 처방하고 그녀를 치료하던 '나'는 이제 그녀라는 책을 통해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녀와의 상담이 끝났음에도 '나'는 그녀의 개인 홈페이지를 뒤적거립니다. '나'에게 가장 두려운 공포는 ‘ 최근 2주간 새 게시물이 없습니다.’ 라는 문장이 되었습니다. 왜 이런 소설을 쓰게 되었냐는 인터뷰에서 작가는 말했습니다. “TV와 영화매체는 자신을 잊게 하지만 책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잊고 싶은 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에게 거울을 들이대면 누가 좋아할까. 무방비 상태, 본래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비취주기 때문에 독서는 힘들어 더 나아가 위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자신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요. 끊임없이 소통하지만 그렇게 끊임없이 고독한 요즘의 날들에.

 

p. 21

현명한 독자가 되고 싶다면 독서를 통해 교훈 따위를 찾아낼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라. 독자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계몽이 아니라 공감이니.

 

 

『맥도날드 사수 대작전』의 스무살이 되던 '나'는 장래가 불투명한 남자친구의 폭발 직전인 성욕으로부터 순결을, 아버지의 실직으로 인한 파탄으로부터 가정을, 그리고 제3세계해방전선으로부터 맥도날드를 지켜야 합니다. 메뉴얼에 따라 움직이는 맥도날드 매장처럼 '나'의 가정 또한 맥도날드화 됩니다. 의사소통은 몇 마디로 충분했고, 맥도날드 고객들처럼 끼니는 스스로 장만하고 치워야 했으며 노동 또한 분산 되었습니다. 합리적인 사고에 지배당하는 사회,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메뉴얼의 최점단의 그 곳, 맥도날드 뿐인가요?

 

『천년여왕』에서는 신춘문예 최종심에까지 오른 '나'는 글을 쓰기 위해 귀농을 선택하고 우려와 달리 아내는 그 곳의 시간에 점점 생명을 얻는 화초처럼 피어납니다. 그의 고독은 짙음을 더해가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글을 쓰는 것, 하지만 번번이 그가 쓴 초고를 내밀면 아내는 어디서 본 듯 하다며 처음 듣는 작품 이름을 댑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아내가 외계인이 아닐까 하고. 『게임의 규칙』에서는 글자를 배우기도 전 읍내 상점 간판을 줄줄 읽었다는 광수가 불결한 문장에서, 가증스러운 숫자에서 마음을 잃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공중관람차 타는 여자』에서는 사랑의 도피처로 결혼을 택한 여자 수진, 한가로운 일상에 우연히 한 신인감독의 인터뷰를 보게 되고 그가 만든 영화의 주인공이 자신을 닮았음을 직감하지만 수진은 깨닫습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이 있는지. 『고독을 빌려 드립니다』 에서는 '너그러움'과 '고독'을 대여하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을 보여 줍다. 『달팽이를 삼킨 사나이』에서는 카드빚과 월세방 청산을 위해서 자궁을 빌려 준 아내와 달팽이를 밟아 죽이는 것 밖에는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남자의 이야기가  『황홀한 사춘기』에서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그 시간, 스파르타 기숙학원들의 짓밟히는 어린 청춘들의 이야기, 그러나 결국은 대입학원의 강사가 된 '나'가 나옵니다.

 

 

8편의 이야기는 봄날의 강물처럼 잔잔하게 그러나 멈춤없이 제 속도로 흐릅니다. 단편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나에게 그는 단편의 맛을 감칠나게 전달합니다. 다양한 소재와 필체, 끊임없이 현실과 그 곳의 경계를 끊임없이 오가며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갸웃거리기도 하며 이야기는 참 재미있습니다. 그의 텍스트는 단순히 활자의 유희(遊戱)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 우리가 이제 익숙해 덤덤히 무뎌진 날카로웠던 칼날을 조심스럽게 다시 쥐게 합니다. 문학평론가 서영채님께서 그를 일컫어 '진화하는 소설기계'라 이름 했는데 역시나 김경욱 작가는 이야기를 쥐락펴락 잘 놀 줄 아는 작가입니다. 단편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도 그가 끊임없이 던지는 흥미로운 소재에 넋을 잃고 빠져 들었습니다. ( 그러나, 특히, <위험한 독서>가 장편으로 쓰여져 그의 박식함을 더욱 뽐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군요.)

 

김경욱 작가의 첫인상은 매우 불친절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우나 그는 독자의 몫으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남겨 두었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불친절함에 기분이 상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기분은 오히려 과잉 친절이 생산한 거부감, 맥도날드의 메뉴얼처럼 감정은 배제되고 입력된 행동에서 산출되는 의미없는 친절에 익숙해진 우리, 그 메뉴얼을 배제한 진심을 기대했던 탓일까요. 그리고 나는 여전히 리딩큐어 기본과정을 수강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직 위험한 독서에 준비가 덜 된 탓이겠지요.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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