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재구성 - 제28회 신동엽창작상 수상작 창비시선 306
안현미 지음 / 창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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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별의 재구성

안현미 │ 창비 │2000.09.22 │p.101

 

 

 

시인이 말했습니다. 시인이란 저주받은 자들이 아니라 저주를 기꺼이 선택하는 자들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와 나 아닌 것들의 삼투압을 견디며 우리는 서둘러, 미리, 고독하게, 지구의 모퉁이에서 눈물을 흘린다 촛불이 운다 다시 기타를 켠다 # 기타 등등

 

그 저주의 결과물은 역시나 보드랍지마는 않습니다. 순간순간 목에 턱 걸리는 것이 삼키기에 여간 고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내 몸에 좋은지 혹시 해가 되지 않는지는 모르고 먹습니다. 프로이드의 성격 발달 이론에도 생후 1년을 구강기로 정의하고 모든 만족은 구강을 통하여 먹는 1차적 활동에서 쾌락을 느끼지요. 탐색은 입에서 시작합니다. 무조건 입으로 가져가 물고, 빨고, 삼키고 탐색은 오로지 구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생존에 대한 전적인 의존의 시기. 나는 시로의 구강기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도 곧 맛을 알게 되겠지요.

 

 

여자비

 

아마존 사람들은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여자비라고 한다

여자들만이 그렇게 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우는 아이보다 더 길게 울던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에게서 나던 소리

 

울지 마 울지 마 하면서

젖 먹는 아아비돠 더 길게 우는 소리

오래전 동냥젖을 빌어먹던 여자의 목 메이는 소리

 

 

여자를 말합니다. 울지 마 울지 마, 여자는 더 이상 보호의 대상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냉혹한 현실의 경계 그 날카로운 선에서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자격을 상실한 채 이제는 그러했던 사실조차 망각한 채 오히려 태연한 얼굴입니다. 시인 손택수는 발문에서 안현미의 시를 "늘 한쪽으로 조금 기우뚱해 있는 사선(/)을 닮았다"며 "현실의 비참을 환상적 기법을 통해 위무하는 것이 그녀의 시가 지닌 매력"이라고 평가했다지요. 기우뚱한 사선, 그러나 그 기우뚱함을 닮으면 수평선을 닮았다 믿게 됩니다.

 

한동안은 이렇게 무작정 삼켜내는 도리 밖에 없을 듯 합니다.

 

 

 

계절병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하나의 커다란 구멍이고 끝끝내 삶은 죽음입니다 거대한 고래처럼 거대한 고독이 두려운 나머지 시간을 밀거래하는 이 도시에서 서로가 서로의 휴일이 되어주는 게 유일한 사랑입니다 병인을 찾을 수 없는 나의 우울과 당신의 골다공증 사이를 자객처럼 왔다 가는 계절 그 그림자를 물고 북반구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의 날개 같은 달력 한 장 가없는 당신 나의 엄마들 왜 모든 짐승들에겐 엄마라는 구멍이 필요한지, 시간조차 그 구멍으로부터 발원하는 발원수 같은 건 아니겠는지 시도 때도 모르고 철없이 핀 꽃처럼 울다가 웃다가 고독은 나무처럼 자라고 계절을 바꾸어 타고 먼먼 바다로 헤엄쳐가는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제 그림자인 양 쳐다보는 나무는 엄마라는 구멍처럼 고독합니다 가엾은 당신 나의 엄마들 끝끝내 삶은 죽음일 테지만 죽기 위해 제 기원을 찾아 뭍으로 돌아오는 거대한 표유동물처럼 젖이 아픈 계절입니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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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성이다 - 기적의 트럼펫 소년 패트릭 헨리의 열정 행진곡
패트릭 헨리 휴스 외 지음, 이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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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가능성이다

패트릭 존 휴스, 패트릭 헨리 휴스 │ 문학동네 │ 2009.10.16 │ p.312

 

 

 

쿵쿵쿵쿵. 빨라진 맥박이 제멋대로 자맥질 칩니다. 한 번의 호흡으로 마지막 책장까지 덮고 오랫동안 그렇게 나는 요동치는 맥박이 진정되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가 가진 장애가 버거울수록 그의 드라마는 극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잠시의 순간이 부끄러워 나는 차마 그를 응원할 수도 없었습니다.

 

고백하건데 나는 성공에세이나 이미 사회적인 성공을 거머쥔 이들의 자기계발서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단단히 틈도 없이 겹겹이 나를 둘러 싼 자격지심이 그들의 이야기에 등을 보입니다. 배알이 꼴리다, 딱 그 마음입니다. 내 감정의 얇은 막을 콕콕 쑤셔대는 것에도 나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앞에 점점 작고 초라해지는 나를 마주하는 일이 나는 겁이 났던거지요. 그런 나를 위한 합리화로 그렇게 그들의 성공 뒤에는 마땅히 그럴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그 생각이 동전 뒤집듯 한 번에 뒤집어지지는 않았습니다.)

 

 

p. 118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걸을 수 없나요?”

화가 난 게 아니라 호기심 때문이었다.

“하느님은 우리를 모두 다르게 만드셨단다. 그래서 너도 다르게 만드셨을 뿐이야.”

엄마는 늘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걸을 수 있어도 나처럼 피아노를 잘 치진 못한다는 말도 꼭 덧붙였다. 마치 하느님이 커다란 상자 속에 수많은 능력을 넣어두었다가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나누어준다는 이야기 같았다.

 나는 부모님의 그런 설명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내게는 더없이 논리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네, 나는 걸을 수 없어요. 그게 뭐 큰일인가요?”라는 식으로 말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간혹 내가 현실에 둔감하거나 현실 도피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나는 현실에 아주 민감하다. 만일 하느님이 지금이라도 “패트릭 헨리, 오늘부터 걸을 수 있게 해줄까?”하고 물으신다면 당장에 “예!” 하고 대답할 테니까.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독립적으로, 온전히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걸을 수 없다는 사실에만 집착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걷지 못한다는 것의 무게를 마음속에서 줄여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큰일에서 별것 아닌 일로 줄이는 것이다.

 

 

여기 이 몇 문장이면 페트릭 헨리가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헨리가 태어나는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요. 그리고 헨리의 아버지와 헨리가 그 시간을 더듬어 짚어 오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제는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힘겨웠던 고비 고비들. 인공 안구 삽입을 위해 반복되었던 수술과 앉아 있기 위해 허리에 박은 철심, 하다못해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모험인 헨리의 삶 구석구석과 루이빌 대학 마칭밴드에서의 생활, 그리고 진짜 슈퍼맨이 된 그들의 부모님 이야기까지. 헨리의 삶은 모든 순간이 빛나는 기적입니다.

 

만약에 ‘내 아이에게 눈이 없다면...?’ 찰나의 상상에조차 내 마음의 툭, 떨어져 내립니다. p 20.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받아들일 의지가 없는 한, 우리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 뿐이 아니라 평생 걸을 수도 제대로 앉아 있기도 힘들다는데, 헨리와 그의 가족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겪은 통증은 어떠한 텍스트로도 온전히 채울 수 없었겠지요. 이 책 속의 헨리의 삶은 행복한 이야기로 마무리 짓지만 그의 통증은 end가 아니라 여전히 ing입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가파른 산이, 깊고 아찔한 낭떠러지가 헨리의 걸음을 가로막을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믿음, 헨리는 어줍은 핑계대고 피하거나 멈추지 않으리라는 깊은 믿음이 앞날에 대한 안개 같은 두려움을 깨끗이 거둬줍니다.

 

책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나에게 묻습니다. 헨리의 삶과 지금 내 삶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할 수 있다면 - 좀 아니 많이 비겁하긴 하지만 현재의 시점으로 - 누구의 삶을 선택하겠느냐고. 아무리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대도 (비록 그가 신체적인 불편함을 지녔지만) 그가 가진, 지금 누리고 있는 삶이 내 몫보다는 매우, 비교조차 의미없을만큼 그가 이루어 낸 것은 기적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레몬을 집을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나의 레몬을 어루만집니다. 아, 그의 레몬에 비하면 애교스럽기까지 한. 나 뿐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누구라도 선뜻 그의 삶을 탐내지 못하겠지요. 헨리였기에 가능했던 삶.

 

그 가능성이 내게도 묻어나길 바랍니다. 더 이상은 누구도 탓하지 않기, 속단하며 해보지 않고 포기하지 않기, 나를 불신하지 않기, 그리고 어제도 내일도 아니라 온전히 오늘을 살아가기. 가능성이라는 이름의 헨리처럼.

 

 

 

p. 304

‘오늘’은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로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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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라는 남자 - 다가가면 갈수록 어려운 그 남자
마스다 미리 지음, 안소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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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라는 남자

마스다 미리 │ 소담출판사 │ 2011.12.23 │ p.134

 

 

 

아빠, 아빠, 입에서 동글동글 굴러가는 발음에 어느사이 기분이 좋아집니다. 사실 나는 아빠와 특별히 깊은 정이 없어서 오히려 그 존재로의 열망에 더욱 그립고 애닯은지도 모르지요. 고등학교 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해 그렇게 대학생이 되고 혼자 서울에 왔고, 그렇게 그렇게 흐른 시간이 벌써 10년이 넘어 아빠와의 거리는 그 세월만큼 멀찌감치 이제는 안타까움조차 문드려져 그렇게 멀어졌습니다. 그녀의 이야기 속 아빠를 만나며 내내 마음 한 켠 어딘가가 몽글몽글 움직거립니다. 다르지만 너무 다르지만 닮아 있네요. 아빠의 모습.

 

우리 아빠 이야기를 조금만 해볼까 합니다. (나는 이글을 몇 번이나 지우고 씁니다. 마음의 눈물 그릇에 '아빠'라는 돌맹이가 툭 던져져서 몇 번이나 위태롭게 눈물이 넘칠 듯 찰랑거립니다. 넘칠 듯 말듯 한 그 위태로움과 안심의 어딘가.)  60년 쥐띠, 올해 오십하고 셋. 내 나이가 벌써 서른이니 스물넷 그 어린 나이에 아빠가 된거네요. 내가 그 나이를 지나고보니 그것이 얼마나 큰 결심이었을지 나는 모두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무거웠을 아빠의 어깨가 나는 문득 쿡, 쑤셔 옵니다. 하지만 그 희생 덕분에 어릴 적 나는 젊은 아빠, 엄마가 언제나 득의양양했지요. 

 

하지만 반찬투정하는 걸 싫어해서 눈물이 쏙 빠지게 나를 혼내던 아빠, 술을 드시면 무한반복 버튼이 고장난 듯 했던 얘길 하고 또 하는 아빠, 성격이 급해서 빨리 대답을 못하면 버럭 성질을 내는 아빠, 무언가 좋아해 그것에 빠지면 앞·뒤 가리지 않는 아빠 (예를 들면 겨울이면 취미로 사냥을 하시던 아빠는 사냥개가 좋다고 사냥개 농장을 덜컥 사버린다든가 그 사냥개들과 멧돼지 사냥을 갔다가 새끼 멧돼지를 건드려 어미 멧돼지와 1:1 대치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하든가 결국 잡아 온 멧돼지로 동네 잔치를 벌이고 나에게 박카스를 섞은 피를 억지로 기어코 먹인다든가 기꺼이 어미를 잃은 새끼 멧돼지의 어미가 된다든가 그렇게 집은 점점 부엉이, 노루, 멧돼지 등의 박제로 흡사 정글처럼 변해가다가 그런 결국은 사냥개 전부를 도둑 맞는다는가 하는. 아! 한 번은 경상도에도 잃어버린 사냥개가 일주일만에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었고.), 어릴 적 나에게 아빠는 아빠라기보다는 말썽꾸러기 큰오빠 같았지요. 그래도,

 

방학 때마다 만들기 숙제를 대신해 주던 아빠, 손재주가 좋아 책꽂이며 책상 등은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우리 아빠, (지금 쓰고 있는 화장대도 아빠가 만들어주셨어요), 크리스마스엔 카드를 잊지 않고 써주던 아빠, 시험을 잘보면 어찌 알고 통닭을 사주던 아빠 (물론 엄마라는 통신원 덕분이었겠지만, 늘 우연을 가장했던), 핸드폰이 처음 생겼던 17살 생일엔 생일축하 이모티콘을 있는대로 퍼부어주던 아빠 (대신 아빠가 쓰신 문구는 하나도 없어 하물며 내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예를 들어 이름을 넣어야 할 OO은 쿨하게 OO으로 보냈던)

 

핸드폰에 내 이름은 '서지영'으로 저장해 놓은 아빠 ('애정돋는딸님♥'으로 수정해 놨어요.), 이젠 내가 싫어하는 반찬 따위는 멀찌감치 밀어두는 아빠, 가뭄에 콩 나듯 전화해서 (알코올의 기운을 빌리고) 불만을 구십구마디 털어 놓는 아빠에게 구십구마디 잔소리로 대응하면 능글능글 껄껄껄껄 웃고는 마지막엔 사랑한다고 백 마디를 채우고 나의 백 마디 사랑해는 대꾸도 않고 툭 끊는 아빠 아빠 아빠 우리 아빠.

 

 

 

 

 

아빠의 이야기를 책으로 담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하나씩 기억을 더듬어 세월을 짚어 가면서 그녀는 새로운 아빠를 만났을지도 모릅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빠를. 나도 그랬거든요. 엄마는 늘 말씀 하셨죠. "아빠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어릴 때 넌 땅에 발이 닿는 날이 없었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옵니다.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아빠는 기억하고 있겠지요? '다가가면 갈수록 어려운 그 남자'라는 부제처럼 이 얇은 한 권의 책으로 아빠를 전부 이해하는 것은 어렵겠지요. 어쩌면 어느 날이 된다 하여도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해를 필요로 하는 사이가 아니니까요. 그가 나의 아빠임은, 내가 그의 하나뿐인 딸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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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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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 지성사 │2008.04.18 │p.173

 

 

 

낯설음, 그것은 내게 타인에게보다 더욱 가중된 무게로 나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나에게 '시'의 영역은 침범하기 싫은, 아니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고 할까요. 그것 또한 무지(無知)한 핑계지요. 지난 해에는 고전을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내게는 너무 먼 산 같과 같지만 - 흐릿한, 다가갈수록 그 높이를 더 해가는 - 그렇게 나는 시에게도 한 발 다가섰습니다.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작은 종이장들의 질량은 간혹 그 존재를 망각할만큼 내 삶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가벼웁지만 그의 텍스트를 하나하나 꾸역꾸역 삼켜내려는 듯 더디게 넘어갑니다.

 

도서관에 들러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책장에 손때로 묻어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빌려 왔습니다. 모서리가 닳아서 네모남을 잃어 버렸고 여러 장의 귀퉁이가 접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붙들었던 그 곳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바짝 말라있습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이 닿은 자리에는 내 마음도 더 오래 머물기 마련입니다.

 

 

식후에 이별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아무리 휘저어도 제자리를 채우고야 마는 슬픔을 알고 있다면 비워도 비워봐도, 아무리 애를 써봐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다면 아마도 이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할겁니다. 그렇게 시가 내 마음을 만져줍니다. 이별의 아픔이 당신의 삶을 흔들고 있다면, 그만큼 사랑이 뜨거웠다는 증거겠지요. 그것이면 충분하다, 내가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심보선 시인은 이렇게 처음 만났지만, 그의 삶의 흔적에 눈물이 적십니다. 시인은 본디 이렇게 눈물자욱이 그득한 삶을 타고남일까요. 그런 그에게 슬픔이 지운 십오 초.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는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용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금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새고, 우리는 그 비를 맞아냅니다. 어느 누가 내리는 비를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맞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좀 생뚱맞지만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비를 맞고 있는 친구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친구가 아니라 그 비를 함께 맞아주는 친구라고. 내 늙어감의 비, 당신의 늙어감의 비 그렇게. (오늘도 리뷰는 산으로 가구요)

 

슬픔이 가득 차 올라 더 이상 자리가 없는데도 그리움은 줄어들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풍경

 

3 마주 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리혀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대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엔 아직은 낯설음이 채 가시질 않았습니다. 낯설지만 그 낯설음 자체로 기분 좋은, 설레이는 만남이었다고 그렇게 마침표를 찍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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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분 기적의 독서법 - 인생역전 책 읽기 프로젝트
김병완 지음 / 미다스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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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분 기적의 독서법 (인생역전 책 읽기 프로젝트)

김병완 │ 미다스북스 │ 2011.12.22 │ p.312

 

 

요즘 나는 책에 대한 책이 참 좋아요. 이지성의 <독서천재가 된 홍대리>를 계기로 목적 없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나의 책읽기에 대하여 돌아 살피게 되었고 아직은 마음에만 품고 있지만 어렴풋하게 그러나 차근차근 나의 꿈도 모양새를 갖춰갑니다. <48분 기적의 독서법>이라니, 제목만 들어도 숨이 턱 막혀요. 삶은계란의 노른자처럼 퍽퍽한 이야기겠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아깝잖아요. 48분으로 기적이 일어난다는데.

 

<48분 기적의 독서법>은 타인의 삶으로서는 완벽했던 대기업의 연구원,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삶에 지쳐 어떠한 즐거움도 찾지 못했던 순간, 모두의 우려를 어깨에 지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감수하며 진행했던 집중 독서를 통해 삶의 진정한 즐거움을 찾은 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달콤한 변화를 전파코자 하루 48분, 쓸모 없이 버려지는 그 시간을 독서에 투자하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만만한 책읽기, 취미로서의 독서가 아니라 1000권은 읽어야 인생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3년 안에.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 집중 독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죠. 그리고 3년 1000권 독서를 위하여 하루 48분의 시간을 책읽기에 투자하라고 말합니다.

 

90년(평균수명) : 3년(독서시간) = 24시간(하루) : X(독서시간)

 

고작 48분으로 우리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니, 이보다 달콤한 유혹이 또 있을까요. 물론 사람마다 책 한 권을 읽어내는 속도도 다르고, 책마다 그 분량이 다르니 이 계산이 정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책읽기도 ‘기술’이라는 전제하에 책을 읽을수록 그 속도도 빨라지니 책 한 권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을 평균 100분으로 계산했습니다. (아, 정말 1,000권을 읽고 나면 한 권을 100분에 읽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가벼운 책이라도 3시간은 걸리는데...씁쓸.)

 

집중 독서의 필요성을 조금 더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해 책으로 인생을 바꾼 12명의 위인들의 이야기도 소개됩니다. -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故 김대중 전 대통령, 이랜드그룹 박성수 회장, 교보문고 신용호 회장, 위대한 발명가 에디슨 등. - 그들의 성공 비결은 집중 독서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들의 집중 독서는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기, 보통 사람들이였다면 절망하고 주저앉았을 그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열망, 책으로의 열망, 그것 때문에 그 어두운 순간을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망은 인생을 변화시키지요. p.250 사람의 운명이란 어떤 기회를 얻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선택을 했는가의 문제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집중 독서는 한 분야가 아닌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며, 양서(良書)에 집착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합니다. p.143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려면 진흙을 다 뒤지는 수밖에 없다.

 

 

p. 152

 

책이 풍기는 냄새를 좋아하고, 책이 주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책을 펼칠 때 느낌을 좋아하고, 책을 읽을 때 빠져드는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책이 꽂혀있는 서재를 좋아하고, 책이 뿜어내는 마력과 위용에 압도되는 것을 즐긴다. 책과 관련된 것을 좋아하게 되면 어느새 책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이 마음이였습니다. 책이라면 그저 좋은, 좋은. 그런데 그저 좋음에서만 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자꾸 나를 다그칩니다. 그래서 사실 조금 혼란스럽기도 하구요. 며칠 전 동생과 두런두런 하루를 나누다가 취업을 하고 바빠진 일상에 지친다는 동생에게 책을 권했지요. 저자의 이야기를 조금 빌리구요. 그랬더니 “누나는 책 많이 읽잖아. 그래서 누나의 인생도 변했어?” 라길래 그냥 살짝 발로 좀 만져줬어요. 아주 사랑스럽게(큭큭). 나의 독서는 일년에 겨우 100권 남짓인걸요. 아마 지금의 3배쯤 읽어내면 내 삶도 변하겠지요?

 

요즈음 내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무는 것은 ‘행복한 삶’에 대한 열망입니다. 하루하루가 덧씌워지는 날들이 아니라, 채워지는 삶. 저자는 채워지는 삶의 방법을 ‘독서’로 찾았지요. 나는 아직 조금 헤매이고 있지만 나 또한 ‘책’을 통해 내 삶의 행복을 그립니다. 당신도 방법을 찾았나요? 당신의 삶이 채워질 방법. 진심으로 내가, 그리고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p. 266

 

그대는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왜냐하면, 시간은 인생을 구성하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출발했는데, 세월이 지난 뒤에 보면

어떤 이는 뛰어나고 어떤 이는 낙오되어 있다.

이 두사람의 거리는 좀처럼 가까워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은 하루하루 주어진 자신의 시간을 잘 이용했느냐,

허송했는냐에 달려 있다.

 

-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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