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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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심보선 │문학과 지성사 │2008.04.18 │p.173

 

 

 

낯설음, 그것은 내게 타인에게보다 더욱 가중된 무게로 나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나에게 '시'의 영역은 침범하기 싫은, 아니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고 할까요. 그것 또한 무지(無知)한 핑계지요. 지난 해에는 고전을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내게는 너무 먼 산 같과 같지만 - 흐릿한, 다가갈수록 그 높이를 더 해가는 - 그렇게 나는 시에게도 한 발 다가섰습니다. 200페이지도 되지 않는 작은 종이장들의 질량은 간혹 그 존재를 망각할만큼 내 삶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가벼웁지만 그의 텍스트를 하나하나 꾸역꾸역 삼켜내려는 듯 더디게 넘어갑니다.

 

도서관에 들러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책장에 손때로 묻어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를 빌려 왔습니다. 모서리가 닳아서 네모남을 잃어 버렸고 여러 장의 귀퉁이가 접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붙들었던 그 곳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바짝 말라있습니다.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이 닿은 자리에는 내 마음도 더 오래 머물기 마련입니다.

 

 

식후에 이별하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잘 들리는 소리
기어이 들리고야 마는 소리
단단한 이마를 뚫고 맘속의 독한 죽을 휘젓는 소리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먹다 만 흰죽이 밥이 되고 밥은 도로 쌀이 되어
하루하루가 풍년인데
일 년 내내 허기 가시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이상한 기근 같은 것이다
우리의 오랜 기담(奇談)은 이제 여기서 끝이 난다

착한 그대여
착한 그대여
아직도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열을 셀 때까지 기어이 환한가
천 만 억을 세어도 나의 폐허는 빛나지 않는데
그 질퍽한 어둠의 죽을 게워낼 줄 모르는데

 

 

아무리 휘저어도 제자리를 채우고야 마는 슬픔을 알고 있다면 비워도 비워봐도, 아무리 애를 써봐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있다면 아마도 이 책장을 쉽게 넘기지 못할겁니다. 그렇게 시가 내 마음을 만져줍니다. 이별의 아픔이 당신의 삶을 흔들고 있다면, 그만큼 사랑이 뜨거웠다는 증거겠지요. 그것이면 충분하다, 내가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심보선 시인은 이렇게 처음 만났지만, 그의 삶의 흔적에 눈물이 적십니다. 시인은 본디 이렇게 눈물자욱이 그득한 삶을 타고남일까요. 그런 그에게 슬픔이 지운 십오 초.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는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용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금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새고, 우리는 그 비를 맞아냅니다. 어느 누가 내리는 비를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맞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좀 생뚱맞지만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진정한 친구는 비를 맞고 있는 친구에게 우산을 씌워 주는 친구가 아니라 그 비를 함께 맞아주는 친구라고. 내 늙어감의 비, 당신의 늙어감의 비 그렇게. (오늘도 리뷰는 산으로 가구요)

 

슬픔이 가득 차 올라 더 이상 자리가 없는데도 그리움은 줄어들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풍경

 

3 마주 보고 있는 불빛들은 어떤 악의도 서로 품지 않는다. 오리혀 여인네들은 간혹 전화로 자기네들의 천진한 권태기를 확인한다. 가장들은 여태 귀가하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마냥 그녀들은 불안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거리는 한쪽 발을 들어 자정으로 무겁게 옮아간다. 가장들이 서류철처럼 접혀 귀가하고 있다.

 

 

청춘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대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그의 이야기를 모두 이해하기엔 아직은 낯설음이 채 가시질 않았습니다. 낯설지만 그 낯설음 자체로 기분 좋은, 설레이는 만남이었다고 그렇게 마침표를 찍어둡니다.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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