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 위조 사건 - 20세기 미술계를 뒤흔든 충격적인 범죄 논픽션
래니 샐리스베리.앨리 수조 지음, 이근애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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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품 위조 사건래니 샐리스베리, 앨리 수조│소담출판사│2012.04.05│p.416

 

 

 

 

벚꽃팝콘이 그득했던 봄날의 기억을 차마 어쩌지도 못했는데 묵직한 봄비에 벌써 엔딩, 짧아지는 봄날으로의 아득한 아쉬움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날들입니다. 이렇게 몽글거리는 요즘처럼, 내 삶의 봄날들도 부유하며 책으로의 시간 또한 그렇게 아쉬움으로만 여물어 갑니다. 봄 때문이라고, 서른 때문이라고 말하기엔 멋쩍을 만큼 길어진 텍스트로의 난독(亂讀, 책의 내용이나 수준 따위를 가리지 아니하고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마구 읽음) 때문에의 난독(難讀,읽기 어렵다) . 이 책은 감히 상상치도 못했던 미술품 위조에 대한 논픽션을 다루고 있습니다. 무지(無知)는 강한 믿음을 만들고 그 무모한 믿음의 발원은 너무도 손쉽게 뿌리 채 흔들거립니다.

 

1990년대 초 주식시장의 거품이 꺼지면서 미술품이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매매차익의 수익에 교양인이라는 이미지까지 덤으로 얻게 되니 미술품은 투자자들의 눈을 현혹하는 투자 상품으로 전락하고, 예술가는 상품성 있는 미술품의 제작자가 됩니다. p. 316 위조의 동기는 수백 년 동안 발전해온 위조의 유형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연료는 항상 인간의 탐욕이었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위조범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미술품 위조 사건>에서는 미술계의 실태 뿐만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잃고 말았던 거짓된 인생으로 점철된 존 드류와 가난 때문에 양심을 저버려야 했던 뛰어난 화가 존 마이어트, 허세와 욕망의 구렁에 빠진 피해자들의 심리를 아주 가까이에서 면밀히 이야기합니다.

 

아동발달심리학을 배우고 있는 요즘이라서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를 따라가며 안타까움이 깊어집니다. 희대의 사기극을 펼친 똑똑했던 존 드류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그가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에 아쉬움을 쓸어내립니다. 또한 촉망받던 미술 천재 마이어트, 드류의 속셈을 알면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고 인정해주는 드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혼돈하는 그의 결핍 또한 나는 온전히 그의 몫으로 모른척 할 수 없어 뭉클합니다.

 

 

 p.324

 

 햅번과 그의 동료들은, 속임수는 접어두고, 미술품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기본적인 질문들을 던졌다. 그림이 훌륭하다면 그 그림이 사람들이 추정했던 그 화가의 작품이 아니라고 해도 본질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정말 속 끓이게 하는 질문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토머스 호빙이 인용한 바 있는 미술품 감정가 얼라인 사리넨이 이렇게 말했다. "가짜 그림이 너무도 뛰어나서 신뢰할 수 있는 철저한 검사 후에도 작품의 진위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경우, 마치 그 그림이 명백한 진품인 것처럼 이 미술품이 만족스러울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

 사리넨이 피카소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면, 그 대답은 아마 '만족스럽다'였을 것이다. "위조한 작품이 충분히 훌륭하다면, 나는 기뻐할 것이다." 피카소는 한때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미 존 드류의 사기행각임을 알고 따라가는 이야기의 긴장감이 생각보다 느슨하여 중반부터 존 드류의 사기행각을 눈치 챈 이들의 추적의 행보 또한 맹맹합니다. 긴장이 결여된 추적의 틈새 사이로 어쩌구니 없는 핑계들로 보란듯이 빠져 나가는 드류의 행적을 보며 가슴 언저리 체증이 더해집니다. 그것은 아마 논픽션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구요.

 

지난 해까지 사당에 살았는데, 계획없이 예술의 전당이나 시립미술관을 찾곤 했었습니다. 동네에 무료로 운영되는 시립미술관도 있어서 퇴근길 참새방앗간처럼 휙 둘러보곤 했었는데 어쩌면 그것 또한 탐욕, 존 드류의 표적이 된 그들의 모습을 닮아 있음을 엿보았습니다. 전시품의 예술적 가치보다 내가 그 안에 있음이 좋았으니까요. 합의된 침묵과 조심스러움, 결여된 움직임과 정지된 듯 흐르는 시간, 낮게 깔리는 조도까지 모든 것이. 책장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또 삶의 다른 부분을 마주하며 생각하게 해주었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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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을 입으렴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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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옷을 입으렴이도우│RHK│2012.02.27│p.464

 

 

 

마지막장을 덮으며 긴 기지개를 켜 올려요. 오랜만에 활자의 리듬을 따르며 천천히 읽어낸 책이었습니다. 책의 표지나 제목에서 기대하게 되는, 책의 첫인상, 책으로의 기대감이랄까. 나는 성장소설을 참 좋아하니까 나의 어딘가 움츠러든 그래서 잊고 살아가던 이젠 내가 된 상처를 찾아내어 봄 햇살에 바짝 말려주길 원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벚꽃비가 날리는 요즘처럼 그렇게 예쁜 이야기로. 그렇게 한껏 부푸른 기대와 함께 찾아 온 <잠옷을 입으렴>은 파스텔빛 이야기는 아니였어요. 몇 번이나 깊은 호흡으로 마음을 다독였고,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 멋쩍어 괜스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봅니다.

 

돌녕의 잠길을 지켜주던 눈사람을 바라보며 웃던 돌녕의 마음, 눈사람을 만들던 산호의 마음처럼 웃음이 납니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돌녕의 잠길이 안타까워 마음이 아릿하지만 베실 웃음이 납니다. 위안의 웃음, 수고했다는 진심을 담아서 응원을 보내는 조금은 서툴지만 기만하지 않은 웃음이 넘실거립니다. p. 113 “앓고 났더니 마음의 나이를 먹은 것 같아.” 독한 감기를 앓고 일어난 아침의 기재가 같은.

 

 

p. 448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가 해주어야 한다고,

사랑하니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믿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그 아이는 내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닫습니다.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된 돌녕의 눈을 안심시키는 것은 수안의 낡은 내복입니다. 같은 잠옷을 입게 되었던 날, 두 소녀의 마음이 하나의 줄로 묶이고 소녀들의 성장과 함께 팽팽하게 당겨진 줄은 커다란 눈깔사탕처럼 달큰했던 어린날의 기억을 잠식시킬만큼 불안하고 위태로와집니다. 조마조마하고 두근두근했던. 돌령의 기억을 따라 전해지는 이야기라서 그런지 더욱 조심스럽고 쓸쓸함은 더욱 깊게 베어납니다. 수안의 목소리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성장, 이라는 의미가 푸릇푸릇한 자람만이 아니란 것을 서른이 되고서야 어설피 알 것 같습니다. 싱그랍고 보드랍지마는 않은 어린 날의 기억이 가시처럼 박혀 쿡쿡 쑤시던 날들을 견디고 나면 그 가시가 내가 되는거죠. 그 노래가 생각납니다. 커피소년의 <상처는 별이 되죠>. 조금만 꾹 참아요 조금만 더 견뎌요 그대의 그 눈물로 세상 비추죠. 신재언니의 마음을 고스란히 안고 내게 온 책에 언니의 마음 사이사이 내 마음을 담아봅니다. 도닥도닥, 서두르지 않고 조금 느린 듯한 속도로 도닥이며 언니의 마음의 조금 더 편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언니 덕분에 참 예쁜 책을 만났습니다.

 

돌녕과 수안을 만나는 동안 떠오르는 사람이 있나요? 함께 잠옷을 입었던 소중한.

 

 

 

+) 마음이 머문 자리.

 

p. 408

서로가 살갑지는 못했어도 한 번도 싫어한 적은 없었다고. 우리는 설명하는 데 서툴렀고 모든 관계에 서툴렀다. 다정히 다가가 등을 껴안으며 그동안 내 마음은 이러했답니다 고백하기엔, 저마다 진심을 전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p. 138

흘러간 물은 다시 오지 않는다지만, 우리 눈에 비친 냇물은 언제나 똑같아 보이기만 했다.

 

p. 212

“세상엔 나침반 같은 사람과 풍향계 같은 사람이 있어. 나치반 같은 사람은 길을 잃어도 자기가 찾아가야 할 곳을 알게 되지. 어디에 갖다 놓아도 바늘은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니까. 목표가 분명한 거야. 반면 풍항계 같은 사람은 바람이 불 때마다 목표를 놓쳐. 그 사람이 기준 삼았던 풍항계는 늘 변하니. 난 여러분 인생에도 나침반이 하나쯤 있었으면 해.”

 

p. 298

누군가 힘들 때 그걸 고쳐주는 일은 쉽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보며 기다려주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걸.

 

p. 319

“전에는 나도 그 말처럼 나침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근데 이젠 아닌 것 같아. 바람 부는 대로 따라가도 안 될 건 없잖아. 더 자유로울지도 모르고.”

 

p. 406

타인이 가진 소외감이나 걱정거리를 잘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선 내가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내가 사랑하는 소년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무엇인가 달라지고 있었다. 아마 변해가는 건 나였을 것이다.

 

p. 452

세월은 상처를 잊기엔 너무 느리고, 무심했던 이들의 근황을 따라가기엔 너무 빨랐다.

 

462

한때 내 것이었따가 나를 떠난 것도 있고, 내가 버리고 외면한 것도, 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것도 있다. 다만 한때 몹시 아름다웠던 것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것들은 지금 어디로 달아나서 금빛 먼너지처럼 카를거리며 웃고 있을까. 무엇이 그 아름다운 시절을 데려갔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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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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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 1│시오노 나나미│한길사│1995.09.01│p.302

 

 

로마, 언급하기도 부끄러운 단편적인 지식들이 토막의 단어들로 흐트러집니다. 독서모임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읽자고 하였을 때 함께 가는 길이니 덥썩 손을 잡긴 했지만 터벅터벅 자꾸 늦어지는 걸음입니다. 이탈리아에서 30년이 넘게 독학으로 로마사를 연구한 시오노 나나미는 1992년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해마다 한 권씩 발표하여 2006년 전15권으로 <로마인 이야기>를 완결했습니다. 70세가 넘은 지금에도 끊임없이 역사시리즈를 연재하고 있으니, 그녀의 열정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에서는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가 건국하고 기원전 270년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500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성은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은 켈트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뒤쳐지던 로마가 융성할 수 있는 이유로 종교에 관한 사고 방식, 독특한 정치체계, 전쟁 후 패자를 포용하고 시민권을 부여했던 로마의 개방성을 꼽았습니다. 로마인의 개방성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길만큼 뛰어났던 선견지명의 힘, ‘로마가도’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역사에서는 전쟁의 패배 후 모습에서 그 민족의 성쇠(盛衰)를 가늠할 수 있는데 로마인의 최대 굴욕으로 꼽는 켈트족의 침입 후 로마 민족의 성향을 엿보며 로마가 융성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배웁니다. 몰락 직전에 놓였던 로마의 재기에는 40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지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착실하게  강대 로마의 첫 걸음으로 삼습니다. 로마의 이러한 유연한 사고 방식 덕분에 많은 열세적 이유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칠 수 있었겠지요.

 

 

메모를 하며 읽으니 500년의 역사가 조금 더 수월하게 정리가 됩니다. 시험 공부하는 학생의 마음처럼 또박또박 써내려가는 글씨에 괜스레 신이 나기도 했구요. 하지만 <로마인 이야기>는 역사가가 쓴 역사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p. 89 물론 이것은 사료의 뒷받침이 없는 단순한 상사에 불과하다. 시오노 나나미도 몇 번을 언급했듯 <로마인 이야기>는 그녀의 역사적 시각이 강하게 반영되어 자칫 - 나처럼 로마에 대하여는 일자무식하다면 - 그녀의 추측을 진실과 혼돈하며 제시한 역사를 그대로 흡수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함께 읽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새삼 감사한 마음입니다. (고마워요, 북커♡) 시작된 로마의 부흥이 기대됩니다. (아, 그나저나 15권의 리뷰를 써야할지 고민입니다.)

 

 

 

 

 p. 225

 

 

 

 

로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하여

다시 일어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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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갈색머리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외롭게 태어난다
타오 린 지음, 윤미연 옮김 / 푸른숲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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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는 갈색머리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외롭게 태어난다

타오린│푸른숲│2012.02.24│p.340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두 가지로 나누자면 쓰고 싶은 글과 읽고 싶은 글,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에 마음껏 써내려간 글과 읽혀질 것을 염두하며 쓴 글로 말입니다. 좀 더 억지를 부려 끼워 맞추자면 전자는 글쓰는 이의 권리이고 후자는 의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리와 의무를 균형을 잘 조절하는 사람이 좋은 글꾼이라고 말입니다. 타오린은 소설 <어떤 이는 갈색머리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외롭게 태어난다>는 그 권리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p.65

인생에는 자기가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 법이다.

 

 

아홉 번의 이야기에는 행복을 원하지만 그것에 서투른 - 혹은 원함조차 알지 못하며 부인하는 - 이들의 이야기가 건조한 텍스트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마름에서 발원된 갈증은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끈질지게 따라붙어 나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무람없는 갈증에 나는 완패하였습니다. ‘조개인간’으로 일컬어지는 연약한 청춘들은 정현주 작가의 <스타카토 라디오>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남보다 더 단단한 껍질을 가졌다면 그건 속이 평균보다 더 무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들이 깨달은 것이라고는 p.19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라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생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인생은 황당무계한 영화 같은 게 아니었다. 영화의 그 모든 사건들이 늘 한꺼번에 일어나는 게 인생이었다. 좋은 것들도 있고, 나쁜 것들도 있었다. 타오린은 그렇게 최소한의 친절도 우리에게 건내지 않았습니다. 한 여름날 에어컨이 시원치 않은 오래된 기차의 햇살이 가득 드는 창가에 앉아 삶은 계란의 노른자를 삼켜내는 기분입니다. 사이다 한 모금이 간절해지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한 컵 가득 사이다를 따라서 기포가 목구멍 그득 차오를때까지 벌컥벌컥 삼키고는 끄-윽 트름을 해버리고 싶은 체증(滯症)을 느꼈습니다.

 

 

 

 

 

p.74

 

인생은 간단하게, 분명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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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마음에 닿던 문장들.

 

p.25

"넌 도대체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이니?" 엘리샤가 말했다.

"그런 게 아냐." 아론이 말했다. "난 말이야, 사실 진짜, 진짜, 진짜로 걱정이 태산이야."

 

p.41

그들은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고, 오직 좋아한다고만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들로 하여금 추방된 느낌, 암흑시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좋아하는 것은 시작하는 것이자 새로운 것이었다. 좋아하는 것은 유연하고 호기심을 일으키는 날개들이 자라날 때에 해당되는 감정이고, 반면에 사랑하는 것은 그 날개들이 점점 더 자라서 타르를 입힌 방수 시트처럼 두껍고 꼴사나워지다가, 마침내 지퍼 달린 시체 운반용 부대처럼 우리를 완전히 뒤덮어 질식시킬 때에 해당되는 감정이었다.

 

p.44

아론은 알고 있었다. 인간은 인생으로부터 거의,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하고, 뭐든 감사히 여겨야 하며, 흐르는 날들을 붙잡으려 언젠 애쓰지 않아야 하고, 미치광이처럼 삶에 매달릴게 아니라 스스로 포기하고, 날(日)과 달(月)과 해(年)에게 포위당한 채, 덧없는 물거품 같은 해와 달과 함께, 창백하고 부드러운 구름 같은 인생의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잿빛 깨달음과 함께 계속 살아가야 하며, 그렇게 해야 고래고래 욕을 퍼부어대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대신 쉽게, 이해심 있게, 조용하고도 담담하게, 연달아 주먹으로 가볍게 얻어맞는 듯이 죽는 순간을 맞이하며, 부드럽고 관대한 모든 무가치함에 위안을 받고, 매일같이 후려치는 인생의 구타에 그냥 두들겨 맞는 게 아니라 마사지를 받는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는 것을.

 

p. 70

그는 서점 중앙 통로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남들 눈에 너무 외로워 보이지 않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p.73

죄책감, 두려움, 의미, 사랑, 외로움, 죽음. 그는 이 단어들이 모두 똑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p.86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내버리는 손톱깍이처럼, 인생을 쓰레기 더미에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p.99

너무 열심히 노력하려 애쓰면 노력 자체가 달아나버리고, 당신만 그곳에 남겨져서 점점 더 움츠러들게 되는 걸까.

 

p.119

"내 몸무게가 지금보다 15킬로그램 정도 늘어도, 그래도 나랑 같이 있을 거야?" 크리스티가 침대 속에서 물었다.

사랑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한다.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거나.

 

p.213

그것은 미묘한 앎, 거의 깨달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기가 한때, 그리고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 그리고 자기가 지금 존재하지만 아주 빠르고도 조용하게, 싸워보지도 않고, 싸울 도리도 없이 그저 떠날 것임을. 엷은 안개가 항상 꾸준하게 드리워져 있는, 모든 게 꿈결 같은 출발 지점에서의 몽롱한 상태로, 결코 이곳에 존재한 적도 없으면서 떠나갈 것임을 아는 것. 그건 그가 이미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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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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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의 바다│정한아│문학동네│2007.07.31│p.183

 

 

 

제 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품집, 이라는 타이틀에 잠시 멈짓 합니다. 주옥 같은 심사평들에 - (심사평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작품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우는, 마치 진흙 속의 진주를 갈고 닦아주는 느낌이랄까! 여튼 깨알같은 심사평들에 감탄을 더하고는 그러나 - 한뭉텅이 의심을 손에 쥐고 무겁게 책장을 넘깁니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 쿵, 나의 마음이 꼬꾸라집니다. p.7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또렷하게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그때부터 나는 온전히 그녀의 이야기에 쥐락펴락 옴짝달싹을 못하는겁니다. 그녀의 흔들림대로.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언론사 입사시험에 번번이 낙방해 백수생활을 면치못하는 은미. 막막한 현실에 자살을 생각했던 날, 할머니가 그녀를 조용히 부릅니다. 15년 전 연락이 끊긴 고모가 사실은 미항공우주국의 우주비행사라는 엄청난 사실을 폭로하며 고모를 만나고 오라는 특명을 전달하지요. 우주비행사인 고모가 할머니에게 보내 온 편지와 배꼽친구 민이와 함께 고모를 만나러 가는 은미의 여정이 머슬머슬하지 않도록 잘 어울려 펼칩집니다.

 

가볍게 뒤통수를 친다던 반전은 사실 어느정도 예상이 되니까 조금 아쉬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구 그녀의 이야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텍스트 자체가 가지는 좌르르르한 윤기(潤氣) 덕분입니다. 문든 떠오른 김애란의 텍스트가 높푸른 가을 하늘의 탱탱한 탄성을 가졌다면 정한아의 텍스트는 봄 공기늘의 싱그러움, 겨울을 견디어 낸 푸름이 지닌 여유가 묻어납니다. p. 160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그저 바라볼 뿐이죠. 하지만 이 세계가 오해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떠올려보면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고, 그분을 향해서 큰 소리로 노래라도 불러드리고 싶어요. 지구를 벗어나면 우주, 또 우주를 벗어나면 무엇이 있을지 저는 상상조차 할 수 없거든요. 김애란의 텍스트가 단어 하나하나에 마음을 기울여 보기에 좋지만 문어체의 느낌이 다소 강하다면 정한아의 텍스트는 유유히 흘러 입술에 편안히 닿습니다.

 

텍스트의 너그러움은 고스란히 이야기에 녹아들었습니다. 번번히 취업의 쓴잔을 마시고 자살의 방법을 궁리하는 은미와 정체성의 괴리에서 흔들리는 민이의 모습에서, 폐의 낭종은 부풀어오르고 하루종일 쉴틈없이 샌드위치를 만드는 고모의 모습에서, 슬리퍼를 파는 조엘의 모습에서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내 꿈은 무언인가, 나는 행복이라는 삶을 가꾸고 있는가, 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우리 삶의 매 순간 마주하게 되는 본질적인 질문으로의 껄끄러운 대면을 부드럽게 포용합니다.

 

 

 p. 142

 

열기가 다 식은 여름밤이었다. 바람이 목 뒤를 쓸고 지나가자 청량함이 느껴졌다.

"저 아저씨 마음에 들지?" 민이가 물었다.

"그럭저럭"

"뭐, 아주 마음에 쏙 들어놓고는." 나는 입을 내밀었다.

"슬리퍼 장사라는 게, 남자로서 너무 야망이 없는 거 아닌가."

"그게 기쁨일 수도 있잖아." 민이는 까딱까딱 걸으면서 말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차 안에 앉아서 온종일 뜸한 손님을 기다리는 거, 그것만이 저 아저씨의 야망일지 누가 알겠어."

 

p. 147

 

서울로 돌아가면 민이는 '민희'나 '미니'가 되어서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많은 것들이 변할 것이다. 생각도 못 했봤던 상처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민이가 백화점에 가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탈의실 밖에서 겉옷을 들고 기다려줄 수 있다. 전화를 걸어와서 울기 시작하면 멈출 때까지 들어줄 수도 있다. 그것이 친구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이다. 기다려주는 것.

 

 

여행에서 돌아온 은미는 키가 크고 잘생긴 사업가로 조엘을 소개하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안심시키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컴퓨터 화면을 매일 밤 바라보며 이대갈비에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이는 가출을 하고 '민희' 혹은 '미니'가 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고모가 버리고 간 줄 알았던 사촌동생, 의젓했던 찬이는 자주 고함을 지르고 핸드폰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은미의 정수리 부분에 새로 나긴 시작한 솜털같은 머리카락처럼 부드럽고 약하지만 어느 날엔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훌쩍 자라 있겠지요. 마지막 장을 덮으며 크게 기지개를 켜올립니다.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갑니다. <달의 바다>는 그렇게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이야기입니다.

 

 

 

p. 145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고모는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있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

"그래서?"

"자유지."

 

 

 

 

 

하다.

copyright ⓒ 2012 by. Y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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