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갈색머리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외롭게 태어난다
타오 린 지음, 윤미연 옮김 / 푸른숲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어떤 이는 갈색머리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외롭게 태어난다

타오린│푸른숲│2012.02.24│p.340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두 가지로 나누자면 쓰고 싶은 글과 읽고 싶은 글, 다시 말하자면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에 마음껏 써내려간 글과 읽혀질 것을 염두하며 쓴 글로 말입니다. 좀 더 억지를 부려 끼워 맞추자면 전자는 글쓰는 이의 권리이고 후자는 의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리와 의무를 균형을 잘 조절하는 사람이 좋은 글꾼이라고 말입니다. 타오린은 소설 <어떤 이는 갈색머리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외롭게 태어난다>는 그 권리를 마음껏 누렸습니다.

 

 

p.65

인생에는 자기가 결코 행복해지지 못할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는 순간들이 있는 법이다.

 

 

아홉 번의 이야기에는 행복을 원하지만 그것에 서투른 - 혹은 원함조차 알지 못하며 부인하는 - 이들의 이야기가 건조한 텍스트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마름에서 발원된 갈증은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끈질지게 따라붙어 나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무람없는 갈증에 나는 완패하였습니다. ‘조개인간’으로 일컬어지는 연약한 청춘들은 정현주 작가의 <스타카토 라디오>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남보다 더 단단한 껍질을 가졌다면 그건 속이 평균보다 더 무르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들이 깨달은 것이라고는 p.19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다. 라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생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인생은 황당무계한 영화 같은 게 아니었다. 영화의 그 모든 사건들이 늘 한꺼번에 일어나는 게 인생이었다. 좋은 것들도 있고, 나쁜 것들도 있었다. 타오린은 그렇게 최소한의 친절도 우리에게 건내지 않았습니다. 한 여름날 에어컨이 시원치 않은 오래된 기차의 햇살이 가득 드는 창가에 앉아 삶은 계란의 노른자를 삼켜내는 기분입니다. 사이다 한 모금이 간절해지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한 컵 가득 사이다를 따라서 기포가 목구멍 그득 차오를때까지 벌컥벌컥 삼키고는 끄-윽 트름을 해버리고 싶은 체증(滯症)을 느꼈습니다.

 

 

 

 

 

p.74

 

인생은 간단하게, 분명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무의미하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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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마음에 닿던 문장들.

 

p.25

"넌 도대체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이니?" 엘리샤가 말했다.

"그런 게 아냐." 아론이 말했다. "난 말이야, 사실 진짜, 진짜, 진짜로 걱정이 태산이야."

 

p.41

그들은 이제 사랑한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고, 오직 좋아한다고만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그들로 하여금 추방된 느낌, 암흑시대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좋아하는 것은 시작하는 것이자 새로운 것이었다. 좋아하는 것은 유연하고 호기심을 일으키는 날개들이 자라날 때에 해당되는 감정이고, 반면에 사랑하는 것은 그 날개들이 점점 더 자라서 타르를 입힌 방수 시트처럼 두껍고 꼴사나워지다가, 마침내 지퍼 달린 시체 운반용 부대처럼 우리를 완전히 뒤덮어 질식시킬 때에 해당되는 감정이었다.

 

p.44

아론은 알고 있었다. 인간은 인생으로부터 거의, 거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하고, 뭐든 감사히 여겨야 하며, 흐르는 날들을 붙잡으려 언젠 애쓰지 않아야 하고, 미치광이처럼 삶에 매달릴게 아니라 스스로 포기하고, 날(日)과 달(月)과 해(年)에게 포위당한 채, 덧없는 물거품 같은 해와 달과 함께, 창백하고 부드러운 구름 같은 인생의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잿빛 깨달음과 함께 계속 살아가야 하며, 그렇게 해야 고래고래 욕을 퍼부어대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대신 쉽게, 이해심 있게, 조용하고도 담담하게, 연달아 주먹으로 가볍게 얻어맞는 듯이 죽는 순간을 맞이하며, 부드럽고 관대한 모든 무가치함에 위안을 받고, 매일같이 후려치는 인생의 구타에 그냥 두들겨 맞는 게 아니라 마사지를 받는 거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로하면서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는 것을.

 

p. 70

그는 서점 중앙 통로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남들 눈에 너무 외로워 보이지 않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p.73

죄책감, 두려움, 의미, 사랑, 외로움, 죽음. 그는 이 단어들이 모두 똑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p.86

다른 많은 것들과 함께 내버리는 손톱깍이처럼, 인생을 쓰레기 더미에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p.99

너무 열심히 노력하려 애쓰면 노력 자체가 달아나버리고, 당신만 그곳에 남겨져서 점점 더 움츠러들게 되는 걸까.

 

p.119

"내 몸무게가 지금보다 15킬로그램 정도 늘어도, 그래도 나랑 같이 있을 거야?" 크리스티가 침대 속에서 물었다.

사랑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한다. 아니면 절대로 하지 않거나.

 

p.213

그것은 미묘한 앎, 거의 깨달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자기가 한때, 그리고 지금, 이곳에 존재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아는 것. 그리고 자기가 지금 존재하지만 아주 빠르고도 조용하게, 싸워보지도 않고, 싸울 도리도 없이 그저 떠날 것임을. 엷은 안개가 항상 꾸준하게 드리워져 있는, 모든 게 꿈결 같은 출발 지점에서의 몽롱한 상태로, 결코 이곳에 존재한 적도 없으면서 떠나갈 것임을 아는 것. 그건 그가 이미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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