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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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니 몇 가지 의문점이 든다.

1.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이 책을 읽고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중세 혹은 근대 초기에도 의학은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닌 질병으로 여겨지는 결핵도 그 때에는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었다. 그런데 그 때의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를, 21세기의 우리들이 느낄 수 있을까? “겨우 이 정도 병에 이렇게 떨었단 말인가?” 하는 식으로 오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수잔 손택의 관점에 동의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질병을 은유로 사용하는 것이 환자들에게 많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질병을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질병을 은유로써 사용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질병을 은유로 사용하지 말자’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손택이 직접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지만, 책의 논지를 발전시키면 이러한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은유는 필연적으로 사실과 멀어지는 방법이다. 아니,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김동명의 시를 읽고, 우리는 누구도 호수가 사람 마음속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만약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일 것이다. 수잔 손택처럼 거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가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기는 하지만,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라는, 어찌 보명 상식이라고도 할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를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은유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책의 내용처럼, ‘결핵 환자라고 해서 감정이 풍부하고 암 환자라고 해서 감정을 억제하면 살아오는’ 경우는 현실에서 드물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러한 내용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 그렇게 생각하는가?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이 및 청소년 독자라면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겠지만, 어느 정도 세상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내용을 그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에서 가난한 남자가 신분 상승을 하는 방법은 항상 ‘서울대 법대 입학’과 ‘사법고시 합격’이다. 다른 대학교 법학과도 있고, 사법고시 말고 행정고시․외무고시도 있는 데 왜 하필 사법고시인가? 이것은 그것이 ‘얼마나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독자 및 관객도 이것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의 관/습/이자 (저자와 독자의)약/속/이라는 것이다.)

3. 2번 문제와 이어지는 것이다. 수잔 손택은 결핵환자나 암 환자, 거기에 에이즈 환자에 대한 편견을 거론하면서, 문학작품이 환자들을 잘못된 모습으로 묘사한다고 지적한다. 단순하게 말해서, 나는 손택의 지적이 핵심을 비껴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질병에 걸려서 죽어 가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작가는 죽어가는 환자를 주인공으로 삼는가?’이다. 감기로 죽든, 치질로 죽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무슨 질병에 걸렸는지가 아니다.

  왜 작가는 주인공들을 죽게 만들까? 죽음에 맞서는 인간을 통해, 인간의 삶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우리는 사랑의 가치에 대하여 한 번 더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말하자면, 손택은 달(죽음에 대처하는 인간의 자세)을 보지 못하고 손가락(어떠한 질병에 걸리는가)만을 보고 있다. 또한 그 손가락이 얼마나 구부러져서 손가락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질병에 걸린 실제 환자들과 문학 속의 환자들의 모습과 괴리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손택의 지적은 과연 타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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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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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꿈 꿔 왔던 일이 마지막 순간에 망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이 있는 것 같다. 하늘에 올라가 용이 되려다 실패한 이무기, 인간이 되려다 실패한 구미호,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까지...<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21세기의 이카루스 이야기이다. 이카루스는 자유와 탈출을 위해 깃털을 엮어 날개를 만들었고, 유리는 가부장제와 경제 침체가 만연한 한국 사회를 중산층의 안정된 소비력을 바탕으로 탈출하려 한다.

  환상․판타지는 두 가지의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의 일상과 아주 다른, 스펙타클(볼 거리)을 제공해야 하고, 그러한 색다름(이국적 exotic)이 안전함을 구비해야 한다. 놀이공원의 놀이기구가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재미있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 후 안전하게 사람들을 일상 속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유리는 과소비와 ‘성적 방종’으로 일상의 일탈을 꿈꾸지만, 밀랍이 녹아버려 떨어진 이카루스처럼, 추락한다. 

  유리가 남자들을 만나는 과정은 마치 롤플레잉 게임과 같다. 게임의 주인공이 점차 단계를 높여가며 새로운 적과 싸우듯이, 그녀는 단계를 높여가며 새로운 남자들을 ‘정복’한다. 마지막 단계는 그녀가 깨기 어려운 단계였다.

  그녀는 서구 문화와 전통 문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그녀는 전통적인 성 관념을 거부하였다. 이전의 ‘시집가기 전 여성은 순결해야한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구의 페미니즘이나 개방적인 성 문화를 완전히 수용한 것 같지도 않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남자보다 먼저, 그대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편견에서 그녀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가 누런 팬티를 입었을 때는 아주 당당하였다. 하지만 흰 팬티를 입자, 그녀는 무너져 버린다. 한국의 황인종의 세계에 살고 있을 때, 그녀는 세상을 마음껏 호령하였다. 하지만 (미국인, 백인에 준하는)미국에서 건너온 남자 의 세계에 편입되려는 순간, 자신의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녀의 반포 거주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반포는 다른 지역보다 집값이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최고 집값은 아니지 않은가?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 이니라”(마태복음 7:2) 그녀가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무시하듯, 그녀보다 더 비싼 집에 싸는 사람도 그녀를 역시 무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마지막 부분의 ‘진짜 짝퉁’은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물건의 의미도 될 수 있고, 유리 자신을 나타내기도 한다.(참고 : 모파상 <목걸이>)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는 사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모습이다. 심지어 소설 속 미국에서 온 남자 -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닌다고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것 역시 ‘짝퉁’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짜 명품’은 이별을 의미하는 것일까(이것 먹고 떨어 져라!), 주류 세계로의 편입을 인정한다는 의미일까?

  주인공 유리는 평범한 한국 사람들과 遊離되어, 有利한 조건만 찾는다. 유리는 琉璃처럼 투명하고 불안정하며 위험하게 산다. 여성의 순결은 종종 琉璃에 비유된다. 깨지면 못 쓰게 되어 버리는 것이 琉璃와 여성의 순결이다. 하지만 琉璃는 오히려 깨지면서 남을 공격할 수 있고 위협할 수 있다. 琉璃가 깨지면서 자신의 날카로움을 드러내듯이, 한국의 여성들도 숨겨져 있던 욕망과 본능을 드러낸다.(<트렁크>의 여자는 琉璃병으로 정부(情夫) 살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우스꽝스럽다.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코너의 ‘터질라’(비버리힐스에서 박스 주워가며 생활), 『패션 7080』소위 ‘압구정동과 청담동 토박이’(어설픈 복장을 입고 강남 패션이라고 우김)들 같다. 정이현은 뛰어난 코미디 작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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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 페테르부르크 유럽을 향한 창 살림지식총서 105
방일권 지음 / 살림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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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재미있게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다른 살림기획총서들과 마찬가지로, 싼 가격에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담고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기행문의 형식을 빌어 페테르부르크의 역사와 특징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저는 특히 우리나라의 옛 지식인들이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었다는 부분이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충정공 민영환 선생이 1896년에 이 곳을 방문하고, 월북작가 이태준이 1946년 '레닌그라드(당시의 이름)'를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페테르부르크는 우리나라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인줄 알았는데, 이미 이분들이 이곳을 탐방하고 기록을 남겼더군요. 훨씬 더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표트르 대제와 예카트리나 2세의 활동무대가 되다가,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던 곳,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다시 예전 이름을 되찾은 곳, 세계적인 박물관 에르미타주가 있는 곳...정말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사실 이 책은 너무 얇아서, 이 도시에 대해서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러시아 역사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이제 막 러시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사람들한테는, 흥미를 가지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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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8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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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이라고 해서 반드시 재미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재미있다고 해서 꼭 좋은 소설이라고 보기도 힘들겠지요. <영혼의 집>은 좋은 소설이면서도, 읽기에 편한 책입니다.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군부의 쿠데타와 군사독재 이야기가 나오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떠올렸습니다. 칠레와 한국은 참 비슷한 역사를 겪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제3세계 국가들이라면 대부분 근대화 과정에서 칠레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다 겪었을 것 같습니다. 말하는 자유조차 억압하는 정부의 내용을 읽으면서, 군사독재 시기에 언론이 탄압당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대부분 중산층이나 하위계층 출신인 군부 세력이 오히려 더 악랄한 방식으로 민중을 탄압하는 것은, 세계 어디에나 통하는 법칙인 것 같습니다.

저는 특별히 이 책을 읽으면서 남자 주인공에 관심이 많이 갔습니다. 그를 통하여 보수층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어르신들을 보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아무 상관 없을 듯한) 칠레의 소설을 통하여, 보수적인 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땅이나 재산에 대한 집착, 화목한 가족에 대한 환상, 규범과 질서를 중시하는 분위기...칠레의 보수층이나 한국의 보수층 모두 통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공산주의를 싫어하고 사회변혁을 싫어하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자기 이익에 집착하는 측면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귀함에 대한 사랑(민중의 '천박함'에 대비되어)이 그들의 머리 속에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종종 엘리트주의로 나타나곤 하지요. 또한 그 분들은 자기의 사업에 대한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농장주인인 주인공이 자기 농장의 발전이 대부분의 소작인들의 고된 노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인정하지 못한 채, 모두 자신의 '헌신적인' 노력이라고 여기는 부분은,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의 경제를 모두 일으켜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과 많이 일치하는 듯 보였습니다. 대통령 밑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땀흘린 노동의 열매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소설 구성도 무척 특이했습니다. 맨 첫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같습니다. 마치 윤회한다고 할까요? 이것은 소설의 주제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죄는 죄를 낳을 뿐이지요. 누군가에게 가한 해는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지요.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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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 - 논픽션총서 1
안인희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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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중심 내용은, 게르만의 신화와 중세의 독일 문학에서는 어떠한 ‘전통’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이후의 바그너의 음악과 히틀러의 정치 행위도 이러한 게르만의 전통과 관련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게르만 사회를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통시대적으로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게르만 적 전통’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적용되었을까요?

 

저자 안인희 씨는 <니벨룽겐의 노래>에서 게르만 사회 특유의 몰락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장엄한 몰락과 붕괴의 이야기’ 속에서 운명에 대한 순응이 나타나고 이것이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거치면서 국가 체제에 대한 순응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분의 주장은 무척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나치 시대에 바그너 음악이 장려되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닌 듯 싶습니다.

 

솔직히 이 책을 막 읽었을 때는 저자의 주장에 무척 동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이 책의 주장이 와 닿지 않습니다. 정말 게르만 민족은 몰락의 기운이 있는 것일까요? '게르만적 전통'이라는 것은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이야기를 해 보지요. 한국 민족의 특성으로 '한'을 많이 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외침을 많이 받아서 슬픈 민족'이라는 이야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민족 문화와 전통에 꼭 슬픈 '한'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이라는 것도 있고, '흥'도 있습니다. 어떤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어떤 특성 하나가 대대로 내려오면서, 그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게르만 신화가 비극적으로 끝난다고 해서, 그것이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을까요? 물론 영향을 주긴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 문화에는 이렇게 슬픈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쾌하고 밝은 이야기도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독일 문화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가만 하더라도 바그너 한 사람이 독일 문화를 대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베토벤도 있고 그외에도...) 독일 사상계에도 나치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칸트, 맑스, 하이데거, 아도르노...등 많은 사람들이 있지요. 이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개성이 강한데, 이들을 어떻게 '독일적 특성'이라는 한 가지 범주로 묶을 수 있나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치즘이 독일에서 나온 것은 맞지만, 나치즘이 독일의 유일한 사상(?)은 아닐 텐데요. 저자는 혹시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고대의 게르만 신화와 19세기의 바그너 음악과 20세기의 나치즘을 억지로 끼어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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