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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평점 :
오랫동안 꿈 꿔 왔던 일이 마지막 순간에 망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이 있는 것 같다. 하늘에 올라가 용이 되려다 실패한 이무기, 인간이 되려다 실패한 구미호,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까지...<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21세기의 이카루스 이야기이다. 이카루스는 자유와 탈출을 위해 깃털을 엮어 날개를 만들었고, 유리는 가부장제와 경제 침체가 만연한 한국 사회를 중산층의 안정된 소비력을 바탕으로 탈출하려 한다.
환상․판타지는 두 가지의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의 일상과 아주 다른, 스펙타클(볼 거리)을 제공해야 하고, 그러한 색다름(이국적 exotic)이 안전함을 구비해야 한다. 놀이공원의 놀이기구가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재미있는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 후 안전하게 사람들을 일상 속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유리는 과소비와 ‘성적 방종’으로 일상의 일탈을 꿈꾸지만, 밀랍이 녹아버려 떨어진 이카루스처럼, 추락한다.
유리가 남자들을 만나는 과정은 마치 롤플레잉 게임과 같다. 게임의 주인공이 점차 단계를 높여가며 새로운 적과 싸우듯이, 그녀는 단계를 높여가며 새로운 남자들을 ‘정복’한다. 마지막 단계는 그녀가 깨기 어려운 단계였다.
그녀는 서구 문화와 전통 문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그녀는 전통적인 성 관념을 거부하였다. 이전의 ‘시집가기 전 여성은 순결해야한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구의 페미니즘이나 개방적인 성 문화를 완전히 수용한 것 같지도 않다. ‘여성은 결혼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남자보다 먼저, 그대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편견에서 그녀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가 누런 팬티를 입었을 때는 아주 당당하였다. 하지만 흰 팬티를 입자, 그녀는 무너져 버린다. 한국의 황인종의 세계에 살고 있을 때, 그녀는 세상을 마음껏 호령하였다. 하지만 (미국인, 백인에 준하는)미국에서 건너온 남자 의 세계에 편입되려는 순간, 자신의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녀의 반포 거주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반포는 다른 지역보다 집값이 비싼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최고 집값은 아니지 않은가?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 이니라”(마태복음 7:2) 그녀가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무시하듯, 그녀보다 더 비싼 집에 싸는 사람도 그녀를 역시 무시하고 있을지 모른다.
마지막 부분의 ‘진짜 짝퉁’은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물건의 의미도 될 수 있고, 유리 자신을 나타내기도 한다.(참고 : 모파상 <목걸이>) ‘진짜 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는 사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모습이다. 심지어 소설 속 미국에서 온 남자 - 미국에서 로스쿨을 다닌다고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것 역시 ‘짝퉁’이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진짜 명품’은 이별을 의미하는 것일까(이것 먹고 떨어 져라!), 주류 세계로의 편입을 인정한다는 의미일까?
주인공 유리는 평범한 한국 사람들과 遊離되어, 有利한 조건만 찾는다. 유리는 琉璃처럼 투명하고 불안정하며 위험하게 산다. 여성의 순결은 종종 琉璃에 비유된다. 깨지면 못 쓰게 되어 버리는 것이 琉璃와 여성의 순결이다. 하지만 琉璃는 오히려 깨지면서 남을 공격할 수 있고 위협할 수 있다. 琉璃가 깨지면서 자신의 날카로움을 드러내듯이, 한국의 여성들도 숨겨져 있던 욕망과 본능을 드러낸다.(<트렁크>의 여자는 琉璃병으로 정부(情夫) 살해)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우스꽝스럽다.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코너의 ‘터질라’(비버리힐스에서 박스 주워가며 생활), 『패션 7080』소위 ‘압구정동과 청담동 토박이’(어설픈 복장을 입고 강남 패션이라고 우김)들 같다. 정이현은 뛰어난 코미디 작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