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이룬 뜻 땅에서도 - 기독교 윤리 입문하기
남태욱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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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느 때보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향한 대중의 불신과 비판이 맹렬한 때이다. 원인은 간단하다. 현재 주류 개신교의 구조와 사상은 대중과 소통하기 어렵고,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할 목회자들의 소양과 자질은 의심스럽다. 더욱 참담한 것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들에 대해 개신교 내부에서 다양한 대책들이 강구되기보다는, 구태의연(舊態依然)한 모습으로 문제의 원인들을 더욱 확대시키거나 성장시키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의 앞날은 암울하다.

 

  물론, 일부 목회자들은 거룩한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에 충성하고, 순결한 삶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미력하게나마 감당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또한 개신교의 구제 사업들과 봉사 활동들은 우리 사회의 복지 증진에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한 이유들을 위안 삼아, 매스컴의 한 영역을 담당하게 된 개신교의 불의와 악행들에 대해 "개신교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항변을 하며 버틸 수 있을까?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미 상처 입은 대중은 개신교를 "개독교"라고 조롱하고 있다.

 

  나 역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재 개신교의 참담한 상황 앞에 확실한 대안들은 없다. 신뢰는 서서히 잃든, 단번에 잃든, 한번 잃게 되면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고, 지금의 개신교는 딱 그 상황에 있다. 하지만 차선으로 우선되어야 할 대안이 있다면, 성서에 바탕된 사회 의식과 개인 윤리 의식의 회복이다. 이 책은 그것에 관하여 쉬운 글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중적 신분을 가지고 살아간다.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동시에 지상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 두 가지 신분과 정체성은 어느 것 하나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해서 지상의 나라에 대한 의무나 권리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지상의 시민으로만 머물 수는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31p>

 

  한 나라의 국민은 국가에서 정한 법과 윤리를 따라야 한다. 법은 강제력을 동반하고, 윤리는 인간의 존엄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법을 위반하면 해당하는 처벌을 받게 되고, 윤리에 어긋난 행동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신자들에게는 추가로 종교의 경전과 교리를 체득하여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것들은 신자들에게서 있어서 법과 윤리와 같다. 물론 강제력을 동반하지 않지만, 위반 행위에 따른 처벌은 전적으로 신의 판결에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두 나라에 소속된 국민들이고, 두 나라에 속한 법과 윤리를 지킴으로써 정체성과 신앙을 형성하고 체감한다.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책을 통해 개신교의 윤리적인 앎과 실천을 설명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개신교의 세계관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이해할 것을 당부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신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중적 신분"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윤리적인 의미의 양심이란 공동의 지식적 토대 위에 있는 것이다.  <138p>

 

  이 책의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로는 "양심"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다. 양심은 철학자 칸트(I. Kant)의 주장대로 내면의 도덕률로 이해되는 인간의 중요한 윤리적, 도덕적 주체이다. 그러나 양심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이 행한 말과 행위를 성찰할 때 양심은 가책(呵責)을 느끼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합리화를 시키도 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개인의 성품과 직결되며, 성장 과정 중에 습득한 지식들과 경험들에 영향을 받는다.

 

  저자는 개신교에서 일부 주장되는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이다"라는 일률적 주장을 반대하고 양심의 상대성을 말한다. 그러나 "성령"(Holy Spirit)에 의존된 신율적 양심의 근거를 들어,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발현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인정한다. 

      

  사랑(agape)의 이상은 니버의 사회 윤리의 궁극적인 규범인 셈이며, 정의는 부정의(injustice)한 사회에 대한 상대적 원리이다.  <162p>

 

  기독교의 "사랑"은 최대의 교리이자 선이다. 저자는 사랑의 중요성을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 Niebuhr)의 주장들과 함께 역설(力說)한다. 아가페적 사랑은 정의(Justice)를 포함하고 사랑에 어긋난 정의는 부정의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정의는 사랑에 포함되지만 동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사랑에 비해 정의는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정의를 통해 간접적인 형태로 현실에 나타난다. 니부어는 정치를 통해 사랑을 간접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정의가 완전한 사랑과 일치되거나 동일시될 수 없는 긴장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저자는 니부어의 이러한 주장들을 수용하며 통치자와 사회 기관들이 사회 내 정의를 실현하려는 제도나 노력으로 자신들이 가진 정치적 권력을 사용해야 하고, 그에 따른 과정과 결과는 아가페적 사랑을 지향해야 할 것이며, 비판 역시 사랑에 근거하여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위로부터 조건 없이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의한 것이지만, 성화된 성도의 삶은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야 한다. 그 책임은 분명히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서적이고 복음적인 가르침이다. 믿음과 행함의 문제는 창조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구원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난 윤리적 실천을 통해 영적인 차원의 구원을 확인하거나 강화한다.  <188p>

 

  저자는 이 책을 마치는 말로 그리스도인의 안일한 구원론을 비판한다. 단순한 결신과 신앙고백들이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으며, 입에서 맴도는 "믿음"이 구원을 완성시키지 않는다. 신자의 믿음은 항상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야 하고, 실천을 통해 신앙의 성숙을 체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이상적인 모습은 예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사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평안의 이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자신의 신앙을 삶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드러내야 한다.

 

  성서는 결코 행위 없는 신앙과 형식적인 예배를 주장하지 않는다. 성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예화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실천을 촉구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에 바탕된 윤리적 실천이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구원"에 대한 반응으로써 당위와 의무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나는 교조주의에 빠진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양성이 결여된 교리와 신앙은 "종교 이기주의"에 빠지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상황 속에서 항상 무엇이 가장 좋은 행동이고, 가장 신앙적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종교를 더욱 위대하게 만든다. 고뇌 없는 신앙생활은 뿌리 깊지 못한 신앙생활이고, 뿌리 깊지 못하기에 위기가 찾아오면 쉽게 변절한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다양한 개신교 서적들을 읽는다면, 좀 더 개신교의 신앙과 교리를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읽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믿음이 실천되어져야 한다.

 

  뿌리 깊은 신앙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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