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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 The Lov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아주 편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근래에 들어 가장 편안한 마음이었다.
나는 겨울을 싫어하는데 무엇보다 추위를 잘 타고,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도 싫어 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마음이 가는 일이 아니면 잘 추진하지도 나서지도 않는다.
이런 나에게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것은 칩거의 즐거움이자,
삶의 멘토를 만나는 것과 같다.
"넌 오늘 오후를 평생 기억하게 될 거야, 내 얼굴과 이름은 잊겠지만."
15살의 반 년을 프랑스의 식민지인 베트남에서 보내던 이름 없는 프랑스 소녀.
그녀는 방학을 마치고 사이공에 있는 학교를 가던 중에 32세의 중국인 남자를 만난다.
중국인 남자는 엄청난 부호이자 유력한 가문의 아들이었고,
소녀는 백인이자 프랑스 시민이었지만 몰락한 가문의 딸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 인종, 신분을 뛰어 넘어 사랑을 하게 된다.
소녀에게는 첫사랑이었고 중국인 남자에게는 처음으로 설레임을 갖게 한 여자였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
<컬러 오브 나이트>의 제인 마치(Jane March)는 무척 아름다웠다.
지금도 중년 여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만 소녀 시절은 더 아름다웠다.
영화를 보면서 <블루라군>의 브룩 쉴즈(Brooke Shields)가 잠깐 떠올랐는데,
두 여배우 모두 정말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소녀들이었다.
연기 또한 훌륭했다.
홍콩 배우 양가휘의 연기를 처음 보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내가 그동안 중국 영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매우 좋은 연기였고 진심이 느껴지는 애절함이 있었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장 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는,
영화를 통해 인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선 보인다.
사랑에 대한 인간의 순수한 감정과 행위.
그것을 원초적으로 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 만 하다.
"내 몸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원하지 않아."
이 영화는 영화 <로리타>처럼 도발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지 않다.
소녀와 중국인 남자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것을 리얼하게 표현했다.,
물론 여러 가지 제약들,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그런 부분들이 이 영화에서는 크게 드러나지는 않은 느낌이다.
원치 않게 헤어진 것이 아닌, 헤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헤어진 것이다.
아니, 헤어졌다기 보다는 둘의 사랑을 마음으로만 간직해야 했다.
이런 느낌들이 영화를 보면서 느껴졌다면 이들의 사랑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상적인 장면은 소란스러운 시장 어느 밀실에서,
햇빛이 비치는 바닥에 누워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었다.
여러 사람들의 삶들이 공유되는 시장과,
손잡이 잡아 당기면 열려질 것 같은 낡은 문을 경계로,
두 사람의 사랑은 특별하고 은밀했다.
운명 같은 그들의 사랑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가 거기에 있었다."
내 나이가 30세를 앞두고 있어도 나는 늘 운명 같은 사랑을 기다린다.
지금 시대처럼 외모와 능력, 재력을 보는 시대에,
나 같은 사람은 왠지 이방인 같다.
나는 아직도 배움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으며,
그저 간간히 생기는 수입에 의존하며 그 대부분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장래의 꿈을 위해 저축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보았던 남자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생활만 놓고 본다면 여자 주인공과 가깝다.
하지만 사랑이 위대한 것은,
서로가 처한 조건과 상황을 뛰어 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랑` 앞에 괴로워하고 기뻐했으며,
심지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했다.
불변의 진리는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살아야 한다.
근래에 누군가가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를 보고 싶다.
문제는 보고 싶어하는, 보고 싶은 그 `누군가`를 모르겠다.
살면서 나를 알았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리고 나를 그리워 하거나 기억하고 있다는 것,
나도 그들을 그리워 하거나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서로가 그리워 하거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감히 운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원치 않게 헤어져야 할 때가 있고,
다시는, 영영 못 만날 수도 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놓치지 않기 위해서 붙잡아야 하고,
어떻게든 내 곁에 머물도록 해야 한다.
그 순간에 `나`는 없어지고 `그(녀)`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 그렇게 해 본 적이 없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 않았고,
간단하게 인연이 아니고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쉽게 사랑을 하지 않았지만,
헤어짐이 무서워 힘들어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근래에 처음으로 후회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 내게 다시 사랑이 찾아 오고,
내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다시는 그런 후회를 하지 않을 사랑을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영화에서 보던 두 남녀는 후회했을 것 같다.
다른 남자의 아내,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 상황에서,
지난 날을 그저 아름다웠던 추억으로만 생각했을까?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그렇게 사랑한 여자의 손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처한 상황과 조건을 핑계 삼는다면,
처음부터 사랑하지도 않았을테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용기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자신의 자존심과 정체성이 위협 받을 정도로 큰 용기를 의미한다.
결국 모든 조건과 상황,
심지어 자신도 뛰어 넘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가 사랑을 얻는다.
그것도 자신이 그토록 꿈꾸었던 운명적인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