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성서를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로 이해하며 보기에는 의문점들이 많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성서를 읽을 때면 갈급함을 느끼고, 갈급함이 해소되지 않으면 신앙은 정체되고 후퇴한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통하여 갈급함이 해소되면 신앙은 계속 성장할 수 있고, 성서의 영향력은 더욱 커진다. 결국, 계기에 대한 해석의 유무가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정체내지 후퇴와 성장을 판가름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계기를 해석하고 올바른 신앙의 성장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이다.
이번에 읽은 <최근 구약성서의 신앙>은 아마 이런 질문에 어느 정도의 답을 내놓고 있다. 저자는 구약성서의 전반에 걸쳐 이스라엘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역들 중 중요한 쟁점들과 그에 따른 해석들을 정리하였고, 단지 해석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그 대안도 어렴풋 제안한다.
사실 하나님은 항상 “앞서 행하시는 분”(Vorangehender)이시다. <124p>
신명기의 배경은 불순종의 세대가 어떻게 되는지를 철저히 경험한 새로운 이스라엘 세대와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제1세대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모세가 새로운 이스라엘을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정복을 내보내면서 마지막으로 행하는 고별사라 볼 수 있다. 여호수아 24장 역시 여호수아의 고별사가 있고, 사무엘 역시, 예수 그리스도도 요한복음 마지막 부근에서 고별사를 한 것을 볼 수 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사건 내용을 유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 너희 생존, 생명이 어디에 달려 있느냐 하나님 말씀에 달려있다”이다. 그런데 신명기 31장 19절에서 흥미로운 점은 모세가 증거의 노래를 지어 부르라 했는데 그 내용은 오히려 “이제까지 너희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지킴에 있다”고 그렇게 당부를 하면서도 29절에서는 “너희가 아무리 노력해도 너희는 끝내 하나님을 배역하다가 심판당하리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구약제도 자체가 갖고 있는 불완전성을 암시하는 것이며 또한 아직까지도 구약은 더 완전한 모습을 기다려야함을 암시한다. 그리고 의미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예언서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이스라엘 민족과 오늘의 사람들보다 앞서고 먼저 일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을 구약 성서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영점상황’(零點狀況: Nullpunksituation)에서 시작된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은 ‘절대적인 무(無)로부터’(ex nihilo)의 하나님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사 45:8). <231p>
시간성이라는 것은 피조세계의 실존의 양식이다. 욥1:21에 ‘주님이 주셨으니 주님이 취하신다. 그의 이름이 찬양 받으실 것이다’라고 한다. 그 외에도 시 90편의 인간과 시간에 대해서 말한다. 즉 산들이 생기기 전부터 주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고, 인간으로 흙으로 돌아가라 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며 피조물’이라고 창6:3에 말하고 있다. 인간은 그의 생명을 창조주로부터 받았고 다시 반환해야 한다. 오래 살다가 수명이 다해서 죽게 되면 좋지만 누구나 주께 되돌려 드려야 한다. 생명을 드린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구약은 말하지 않고 있다. 영원한 인간의 삶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피조물로서의 인간, 타락한 인간이지만 이 인간의 창조된 시간성 안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뚫고 들어왔다. 그것도 하나님의 원하시는 시간에 들어왔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면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계시를 시간 속에 나타내시므로 피조물의 시간성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고 계신다. 구약에 있어서 시간이나 역사는 매우 본질적인 것의 하나이며 의미가 크다. 시간과 계시의역사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에서만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의 의미 있을 수 있고 그 수수께끼 같은 가면을 벗을 수 있다.
시간이 인간에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주신 구원을 우리가 붙들도록 하는 것이다. 시간은 인간이 결코 인간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계시를 자기의 소유물로 만들 수 없다.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는 부르심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인간은 하나님의 자의적인 행동이나, 변덕스런 하나님께 맡겨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행동이 역사 속에서 계속 되었다는 것은 그의 성실과 구원 의지를 분명히 알게 해주고 인간에게 마지막이 온다는 것과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나 출애굽 사건을 자기들의 시대로 현재화했던 것과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이 일어났다고 성취된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이 언제나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무시간적이나 신비주의적인 것이 아니고 신적인 것에 대항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시간에서의 구원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속의 구원은 시간을 넘어서는 것이고 더 이상은 아니라는 제한을 넘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의 경지로 가는 것이다.
욥이 깨닫기 이전에 경함한 우주는 혼돈이 가득한 모순덩어리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혼돈의 세력이 있다고 이 세상 자체가 혼돈은 아니다. 비천한 인간의 눈에는 이 세상이 하나님 부재한 무질서한 세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눈에 이 세상은 당신이 계획하신 대로 운행되고 있다. <335p>
욥기에서 욥은 인생의 어떠함에 대해서 말한다. 그것이 어떤 신학적 의의를 따르느냐 에 관해 생각하기보다, 구체적으로 욥이 41장에 자신이 할 말이 없어진 이유에 대해서 알면 욥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어떠함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욥은 어떤 사람인가? 당대의 의인이다. 스스로도 자신은 흠이 없다. 자신이 고난을 당해야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자신이 태어난 것 까지 원망을 하게 된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다. 그러나 의인인 욥도 고난을 당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원망을 늘어놓게 된다. 아무리 자신이 의인이고,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이 많다고 해도, 주신자의 어떠함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것이다. 그의 인생은 그도 의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 간택되어 준비되어진 복을 누려진 인생이고, 하나님도 인정한 의인이다. 그러나 시험대에 올려 진 욥의 인생을 통해 드러난 것은, 의인이라도 인생이 있게 하신 분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이다. 왜냐면 욥 자신은 의인이었지만, 그것을 주신이도 하나님이고, 거두어 가시는 분이 주님 자신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욥은 한 점 흠이 없다. 왜냐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후반부에 원망을 늘어 논다. 자신의 탄생에 대해 원망을 했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의인인데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소연 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환경의 불행들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소유들이 사라졌다. 의인도 별수 없구나, 결국 자신은 한 점 티없이 의로움 때문에, 내가 어떻다고 말하는 것이구나. 의인은 자신의 항변이 있다. 제가 의롭지 않습니까? 제가 주님을 경외하고 한 점 의롭지 않습니까? 제 행위가 무엇이 잘 못 되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해석의 교차가 일어났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욥의 문제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욥은 인생으로서 하나님 앞에 대면했을 때, 자신은 아무 할 말도 없는 자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었다.
의인인 그에게 그의 모든 소유를 거둬감으로서 욥으로 하여금 인생에 대해서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베풀어진 것들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많은 날들을 지나간다. 그리고 베풀어진 것들이 없어지고 나면, 원망밖에 할 수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베풀어 진 것도 복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의인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왜냐면, 의인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자신의 어떠함을 항변할 수 없는 자리가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모른다. 비록 의인에게 많은 복이 주어졌어도, 의인은 정녕, 주신 자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이다. 그것이 크든 작든 완전한 것임을 모른다. 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을 보면, 욥은 인생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인식하게 된 것이다. 욥의 살아생전 모든 복은 주신 자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주신 자가 주셨던 것을 모두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인생으로 알게 된 것이다. 비록 욥은 의인이고, 살아생전 많은 복을 누렸고, 그 모든 복들을 모두 가져가신다고 하더라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리가 바로 인생이다. 욥기를 통해서, 인생의 어떠함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책을 읽으면서 전체적으로는 신학과 신앙이 적절하게 조화되었다고 느꼈다. 부분별로는 신학과 신앙의 비율이 따로 따로 강조되는 부분도 있었다. 책 제목은 “최근”이라고 되어있는데, 최근이기보다는 기존에 저자가 쓴 <창세기 다시보기>, <출애굽기 다시보기>, <시편신앙과의 만남>, <예레미야 디시보기> 등에 있었던 내용들이 더러 인용되어있었다. 그래서 저자의 기존 책들을 읽었던 독자들이라면, 이 책의 새로운 내용만을 따로 정리하여 간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또한 책 자체가 교정이 덜된 느낌이 든다. 대표적으로, ‘은, 는, 이, 가’의 사용이 적절하지 못하고, ‘~의’같은 조사 역시 적절하지 못하여 의미가 뚜렷하지 못하다. 앞으로 읽을 독자들을 생각한다면, 이런 부분에서 교정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책의 가장 장점은 목회자들과 신학생들에게 목회현장에서는 설교의 풍성함과 신학적 소양을 키워주는데 도움이 된다. 목회자들이 보기에 이 책은 강해설교와 같고, 신학생들이 보기에는 성서를 해석하고 현실에 연결하는 기초적인 방법을 습득할 수 있다.
다른 장점으로는 성서를 보는 폭이 넓어질 수 있다. 성서는 문서로 이루어져 있고 문자가 적혀있다. 그것은 문맥을 먼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성서 원문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되어 있는데 원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성서를 바라보고 해석되어 정확한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삶에 적용되고 이해될 수 있겠지만 성서 자체의 의미가 불분명한 상태에서의 적용과 이해는 독선이나 독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개개인의 신앙의 형성으로써 성서는, 문자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신앙공동체의 변론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만의 성서 이해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원문에 가깝게 성서가 가진 문자적 의미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다양한 현실 상황에 적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