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인간스럽게 만든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 - Enemy at the Gates
영화

 

거의 매일 비 내리는 하루를 맞이하고 보내는 것 같다.

하늘 항상 회색빛이고 비로 인해 온 세상은 젖었다.

태양을 제대로 본 지가 오래되었지만,

비가 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도 나쁘지 않다.

 

고등학교 때 잠깐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보았다.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보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웅입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소련은 독일 나치군에 의해 스탈린그라드까지 전선을 후퇴했다.

젊은 병사 바실리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저격수였지만,

그의 첫 출전은 총 없이 총알만 든 상태에서 참전했다.

그러던 중 소련군 선전장교 다날로프를 만나 바실리는 소련군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단순히 포장된 영웅이 아닌 탁월한 저격 실력으로 독일군 장교들을 사살한 바실리.

그는 점점 소련의 영웅이 되었고 그를 흠모하는 타냐는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타냐를 사랑하는 다날로프는 바실리를 질투한다.

바실리의 활약에 독일군은 최고의 저격수 코닉 대령을 스탈린그라드로 급파한다. 

 



 

"전 조국이 자넬 지켜보고 있어."

 

<루터>의 조셉 파인즈(Joseph Fiennes)는 지적이지만 유약한 선전장교의 모습을 잘 연기했다.

개인적으로는 <루터>에서의 모습이 좀 더 기억에 남는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의 주드 로(Jude Law)는,

순수하면서도 인간적인 바실리 역을 잘 소화했다.

다양한 배역이 가능한 주드 로는 명성에 비해 아직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배우라 생각한다.

 

<미이라>, <러블리 본즈>의 레이첼 웨이즈(Rachel Weisz)는 매력적이었다.

전쟁의 치열함 속에서도 사랑이 꽃 필 수 있는 것은 그녀 같은 이가 영웅 곁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그녀도 40세가 넘었고 한 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헬보이>,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의 론 펄먼(Ron Perlman)이 잠깐 출연했다.

 

장 자크 아노(Jean-Jacques Annaud)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보았다.

<연인>을 보려고 했으나 아직 보지 못했고,

평소에 그의 영화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이 영화만 놓고 본다면 그는 낭만주의자에 가깝다.

 



 

"그 놈의 총을 너에게 줄게!" 

 

새드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독일군 최고의 저격수 코닉 대령과 소련군 최고의 사격수 바실리 자이체프 간의 대결은,

무척이나 긴장감이 있었고 서로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지만,

결국 실력이 아닌 운명적인 선택으로 승패가 갈리고 말았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체적인 영화 분위기도 인상적이었다.

다만 명작이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영화였다.

개인 차가 있겠지만 나는 큰 인상을 받을 만큼의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실화에 근거하여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바실리 자이체프가 저격으로 독일군을 200명 넘게 사살했다는 기록은,

그 당시 총기를 감안한다면 매우 놀라운 수치이다.

그는 1991년에 사망했다.

  



 

"인간은 단지 인간일 뿐이야." 

 

전쟁은 새로운 영화를 탄생시킨다.

뛰어난 실력과 판단으로 영웅이 스스로 탄생되기도 하지만,

군 사기와 동기 부여를 위해 만들어 진 영웅이 탄생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웅은 개인의 선택과 공동체의 선택으로 인하여 탄생된다.

 

전쟁은 인간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고 왜 죽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들고,

한 사람의 명령에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 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삶과 죽음은 의미가 없어지고 어느새 한 점에서 만난다.

 

그러나 전쟁 속에도 사랑과 우정이 있다는 사실이 인간을 인간스럽게 만든다.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전우들과 남몰래 서로를 흠모하는 연인들이 있기에,

전쟁이 비인간적인 모순의 구덩이라는 것을 잠시 잊게 해준다.

 

무엇을 위해 왜 싸워야 하는가?

상부의 명령과 주변의 상황을 보고 있자니 싸워야 하겠지만,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따뜻한 집에서 맛있는 식사와,

가족, 연인, 친구들의 품에서 평화롭게 쉬는 것을 더 원한다.

치열한 경쟁이 상존하는 오늘날에도 내가 원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