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이지만 바람이 불어 차분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학기는 막바지에 이르렀고 서서히 방학을 기대하며 하루를 보낸다.
항상 계획이 앞서지만 이번에는 실천 중심의 치열한 방학을 보내려 한다.
무엇보다 방학이 좋은 것은 여유로움을 일상 속에서 자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 여유로움을 나태가 아닌 과정 속의 쉼이 되어야 한다.
영화는 주로 밤에 보는데 갑자기 보고 싶어졌고,
마침 시간이 생겨서 점심식사 후에 보았다.
김윤진과 박해일의 연기대결이 기대되는 영화였다.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는 내가 알고 있던 내용보다 조금 더 파격적이었다.
"따님만 생각하세요, 따님만!"
부유한 싱글맘 연희는 하나 뿐인 딸 예은이의 심장병을 위해 심장 기증자를 찾는다.
특이한 혈액형 때문에 기증자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 한 중년 여성이 병원에 실려오고,
딸과 혈액형이 일치한 것과 뇌사로 인해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급한 마음에 이성을 잃은 채 어떻게든 딸을 위해 심장 이식을 하려는 연희.
그녀 앞에 중년 여성의 아들 휘도가 나타나고 연희는 휘도에게 거액을 제시한다.
"나 기다릴 여유 같은 거 없어."
<쉬리>와 <LOST>의 김윤진을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보았다.
최근에 그녀가 출연한 몇 편의 국내 영화들이 있었지만 볼 기회가 없었고,
오늘 본 이 영화에서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특유의 굵은 목소리가 배역과 잘 어울려 더욱 집중이 되었다.
<괴물>, <이끼>의 박해일은 최근 에너지 넘치는 배역을 자주 맡는 것 같다.
그의 집요하면서도 능청스러운 연기는 긴장과 환기를 동시에 조절하면서,
주도적으로 상황과 분위기를 이끌어 나간다.
순수함과 냉혹함이 함께 느껴지는 흔치 않은 배우라 생각한다.
<피아노>의 정다혜를 오랜만에 보았는데 성숙미가 느껴지는 여배우로 성장했다.
명품 조연들인 강신일, 주진모, 김상호가 출연했고,
특히 김상호는 <이끼>에서도 그랬듯이 박해일과 다시 한번 격투를 벌인다.
윤재근 감독의 늦은 첫 장편 영화이다.
"사람 목숨 다 똑같은 거 아냐?"
주제와 스토리 전개가 잘 맞아 떨어지는 영화였다.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쉽게 넘길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보았던 한국 영화들 중에서 볼 수 없었던 주제라 신선했고,
배우들의 연기 또한 좋아서 전체적으로 괜찮은 영화라 생각한다.
영화의 백미는 김윤진이 박해일을 둔기로 사정없이 후려 칠 때였고,
김윤진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과연 인간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종교와 신념을 넘어선 그녀의 행동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엄마가 그렇게 하란다! 씨발!"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는 논쟁인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이 떠올랐다.
죽어가는 아이를 위해 심장 이식을 원하는 엄마와,
죽어가는 엄마를 살리기 위해 간 이식을 원하는 아들의 충돌.
여기까지는 서로 공리주의였으나 심장 이식을 원하는 엄마의 의지가 더 강해서,
아들은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엄마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한다.
여기에서는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이 충돌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야 하고,
회생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은 계속 죽어가야 할까?
흥미롭게도 병원에서는 이 두 가지의 고민들이 표본들로 존재하고 있다.
식물인간이나 뇌사로 판정되어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들과,
그들을 간호하며 의사와 주변의 절망적인 말에도 행여나 깨어나길 바라는 가족들의 소망.
여러 가지 치료로도 회생할 가망이 없음을 알고,
장기 기증을 통해 '의로운 죽음'의 명예를 받는 환자들과,
그들의 죽음을 통해 수혜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장기 이식 환자들의 기쁨.
세대를 넘어서는 윤리적 논쟁점들을 병원에서는 자연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적 신앙이나 개인의 도덕적 신념이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도 유효하게 작용될 수 있을까?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말처럼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존재이며,
이타적인 행동 역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신념 지키기는,
그저 고상한 개인적, 집단적 취미생활에 불과하다.
무엇이 옳은 지에 대한 판단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
법과 윤리도 큰 영향을 주겠지만,
목적에 중독된 개인에게 법과 윤리는 참고에 불과하다.
극단적인 상황들은 삶 속에서 드물게 벌어지고,
드물게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개인의 특별한 윤리적 판단이,
그동안 지켜왔던 개인의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신념의 진실을 확인시킨다.
대부분이 선하지 않고 대부분이 악하지 않으니,
공공의 정의와 불의는 비슷한 상대전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정의와 불의는 시대와 개인에 따라 위치를 달리 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의 심장이 뛰는 그 날까지 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공리주의든 칸트의 의무론이든,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신념의 수호이든,
아니면 개인의 이기적인 행동이든,
결과에 대한 책임만 질 수 있다면 지금은 무엇을 선택하든 가능해 진 것 같다.
다만 책임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 보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칸트의 의무론에 지지를 보내고,
종교적 신앙과 도덕적 신념들에 소중함을 아는 나도,
요새 인터넷과 TV을 보면 무엇이 옳은 지 가끔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그만큼 개인의 도덕적 가치판단은 위협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의 경험과 교육을 통해 자신이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을,
판단의 순간까지 옳다고 말하며 실천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그나마 책임의 명분을 분명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