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 Sunn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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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는 어린이날이 있어 다행이다.

치열했던 4월 말을 간신히 넘기고 5월 첫 주는 짧은 휴일처럼 보냈다.

덕분에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개인적인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여유로움은 삶에 표현된다.

 

어린이날 늦은 밤에 영화를 예매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운동하는 듯 집에서부터 구로CGV까지 걸어갔다.

거리는 한산했고 밤하늘은 고요했다.

지나가는 차들의 소음만이,

내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알게 했다. 

 

밤 10시 10분에 구로CGV 3관에서 강형철 감독의 신작<써니>를 보았다.

혼자 보는 영화에 너무 익숙해졌는 지 이젠 양 옆에 누가 앉아도 상관없다.

다행이도 열 끝자리에 앉은 한 커플만 제외하고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휴일이었지만 늦은 시간이라 관객들은 별로 없었다. 

오늘도 가장 좋은 자리에서 가장 편안 자세로 기분 좋게 영화를 보았다. 

 



 

"남편하고 애 봐야지."

 

"너네 남편하고 애는 아직도 기저귀 차고 다닌다니?"

 

80년대 학창시절을 지낸 나미와 6명의 친구들은

학교에서 '써니'라는 친목 써클을 만들어 활동한다.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소녀들이었지만,

'써니'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는 누구보다 강하고 서로를 아꼈다.

 

세월이 흐러 어른이 된 나미. 

우연히 병원에서 '써니'의 리더 춘화를 만나고,

춘화가 암투병 중임을 알게 되면서 나미는 지난 날을 회상하게 된다.

그리고 춘화를 위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신의 학창시절을 위해,

나미는 세상 속에 흩어진 '써니' 멤버들을 찾아 나선다. 

 



 

"그래도 살아, 내 몫까지 살다가 와."

 

<과속스캔들>의 엄청난 흥행으로 영화계에 인상적인 데뷔를 한 강형철 감독.

아쉽게도 난 <과속스캔들>을 직접 보지 않았고,

지인들을 통해 영화평을 들었는데 거의 좋은 평가를 했다.

그래서 이 영화만으로 강형철 감독을 평가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다만 그가 휴머니즘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TV드라마계의 '여왕' 유호정을 오랜만에 스크린을 통해 보았다.

내 기억에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 이후 두번째인데,

그때와 약간(?) 다른 외모와 분위기에 낯설었다.

뛰어난 연기를 했다기보다는 '배우'라 부를 수 있는 평범한 연기를 했다.

 

<은행나무 침대>, <손톱>의 진희경도 오랜만에 보았다.

캐스팅 상 특별출연이었지만 주연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을 통해 젊었을 때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안타까운 기분이 든다.

 

<황진이>, <태왕사신기>의 심은경은 준수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아역배우와 성인배우 사이의 과도기에 있는 그녀지만,

꾸준히 영화와 TV드라마를 통해 연기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 긍정적이다. 

 

나의 영원한 '뽀미언니' 이연경,

<공공의 적>, <아이들> 등등.. 명품 조연배우 성지루,

백치미와 섹시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민효린,

여전히 매력적인 배우 홍진희,

영화에 캐스팅 된 배우들은 미묘한 관계를 이루며 나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너 주댕이가 자유분방하구나?"

 

런닝타임이 124분으로 2시간이 넘지만 지루한 영화는 아니다.

상투적인 소재였던 추억의 학창시절 대상이 남자가 아닌 여자여서 흥미로웠다.

깔끔한 편집, 배경음악과 영상의 조화는 인상적이었다.

특히 80년대 암울한 시대상을 개성있게 해석한 감독의 센스는,

재미와 논란의 요소를 동시에 가져왔다.

 

배경음악으로 'Touch by Touch', 'Reality' 등 80년대 유행했던 팝송들은 정겨웠다.

또한 80년대와 지금 시대를 연결하려는 감독의 시도는 나름 괜찮았다.

아쉬운 점은 역시 상투적인 소재가 가지는 한계이다.

곳곳에 여러 가지 장치들로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관객들이 보기에는 익숙하고 무난한 영화였다.

개인적으로는 내용보다 학창시절의 '써니'와 '소녀시대'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 다시 다 만나는 거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아쉽게도 난 영화에서 나온 그녀들처럼 재미있는 학창시절을 보내진 못했다.

내성적이고 분위기 파악 못하는 나였기에 주로 소수의 친구들과 어울렸고,

방송반 활동을 통해 청소년 영화제작이나 독서, 글쓰기를 취미로 삼았다.

내가 생각해도 난 동년배들과 달리 너무 조숙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성인이 되면서 점차 내게 큰 유익이 되었다. 

 

만약 내가 중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법조인이나 군인이 되고 싶다.

만약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음악을 하고 싶다.

이런 가정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아쉬움이자 희망일 것이다.

아쉬움은 그때는 알지 못했던 '나'였고,

희망은 지금이라도 알게 된 '나'이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아쉬워 하며 그리워 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이자 희망이 된다.

 

과거에만 매여있을 수 없다.

과거는 더 좋은 오늘과 내일을 위한 '기억'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 간직해야 할 것들은 반드시 간직해야 한다.

붙잡아야 할 기억들은 붙잡아야 하고,

되살려야 할 기억들은 되살려야 한다. 

 

가물가물하게 떠오르는 얼굴들과 장소들..

그냥 두어야 할까? 아니면 붙잡고 되살려야 할까?

그냥 두기에는 미안하고 붙잡고 되살리기에는 용기가 없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서 속으로 지키기 어려운 다짐을 했다.

지금보다 내가 얼마나 부자될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다면 나도 춘화처럼 친구들에게 멋진 유언을 남기고 싶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이기에 더욱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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