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일기 - The Journals of Mus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요새는 볼만한 영화들이 별로 없었다.

보고 싶은 영화는 비주류 영화라 집에서 먼 거리에 있는 영화관에서 개봉했고,

그나마 보고 싶은 주류 영화들은 4월이 아닌 5월이 되어야 개봉한다.

그러던 중 구로CGV 무비꼴라쥬에서 <무산일기>가 상영 중인 것을 보고 바로 예매했다.

지난 14일에 개봉했고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목요일 밤 9시 50분에 구로CGV 10관에서 <무산일기>를 보았다.

개봉한 지 일주일 정도 되었지만 구로CGV에서는 첫 상영이었다.

영화를 보러 온 관객은 나를 비롯하여 5명이었고, 

가장 좋은 자리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아주 만족스럽게 영화를 보았다. 

 



 

"들어가면 절대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지 마라."

 

탈북자 승철은 임대 아파트에서 같은 탈북자 친구인 경철과 함께 산다.

승철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전단지,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시급 4000원에 일한 만큼의 일당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의 유일한 낙은 주인 없는 강아지 '백구'와 주일에 교회가 예배 드리는 것.

남한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그들과 어울려서 살아남아야 하는 승철.

그러나 남한 사회에서 탈북자들이 살아남기는 쉽지 않고,

교회 역시 그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교회 다니지 마요, 찬송가를 왜 도우미들이랑 불러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박정범 감독이

감독, 각본, 연출, 주연까지 도맡아 활약했다.

영화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과 비슷한 느낌이 들지만,

박정범 감독의 매력은 과장 없는 사실적인 연출과 감정 묘사라 생각한다.

 

출연 배우들은 주로 단역 배우 출신들이었지만,

앞으로도 '단역 배우'만 맡기에는 아까운 배우들이다.  

 



 

"저, 어차피 친구 없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머리가 아프고 속이 매스꺼웠다.

이유는 카메라 촬영에 있어서 스테디가 아닌 핸디 캠 촬영이라 영상이 계속 흔들거렸고,

롱샷과 풀샷에 롱컷이라 영상이 너무 정적이었다.

집에서 보았으면 별 상관 없었겠지만,

영화관에서 주위가 집중된 상태에서 보니 조금 힘겨웠다. 

 

박정범 감독이 영화 <시>의 조감독 출신이라 이창동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영화 <시>처럼 이 영화도 OST가 없고 곳곳에 이창동 감독의 체취가 묻어 있었다.

아류작이라고도 볼 수 있었던 이 영화가 신선하게 다가온 것은,

사실적인 연출과 섬세한 감정 묘사였다. 

인위적인 장치를 최대한 줄이고 현장 분위기에 집중하여,

관객들에게 배우들의 연기와 감정 묘사를 더욱 구체적으로 전달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종료 후 고요한 상태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는데,

나를 비롯한 5명의 관객들은 자리에 앉아 엔딩 크레딧이 다 끝날 때까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영화가 끝난 후에야 나와 관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본능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90년대만 해도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오게 되면,

국가 차원의 환영 행사와 정부에서 넉넉한 정착금과 좋은 여건을 마련해 주었는데,

2000년 이후부터는 너무 많은 탈북자들이 남한으로 오게 되어,

환영 행사는 커녕 정착금과 여건 마저 예전만 못하다.

실제로 지상파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로 탈북자들의 현실을 알리기도 했고,

언론에서도 탈북자들의 남한 생활에 있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보도하기도 했다.  

 

영화를 보면서 공감했던 몇 가지 사실들은,

같은 동포이자 민족인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서 쉽게 정착하기란 어렵다는 사실과,

남한 사회 내에서도 약 300만 실업자들이 있으니,

탈북자들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란 당연히 어렵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기성 교회들을 비롯한 사회 내 인권단체들이 

탈북자들의 희망이 되어주기에는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비단 탈북자 뿐만 아니라 사회 내 소외계층에게도 해당된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가 정책이 잘못되어서가 아니고,

기성 교회들과 인권단체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 생긴 일은 아니라고 본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도 히스패닉과 이민자들에게 

국가 차원의 차별대우 정책을 공공연하게 시행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그것을 반대하는 인권단체들의 시위는 멈추지 않고 있다. 

핵심은 인간이 자신보다 낮게 여기는 인간을 향한 본능적 비호감과,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온 사회 내 유산계층의 배려없는 횡포라 할 수 있다.    

 

어찌하랴!

인간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이용하는 것에 익숙하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헌신하는 성실함과 꾸준한 용기가 없다.

같은 남한 사람들도 서로를 밟고 뒤통수 치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하물며 사회 내 소외계층에게 눈을 돌려 그들을 진심으로 도울 수 있을까?

근래에 정치계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복지 신드롬'을 우려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앞으로 북한에서 더 많은 탈북자들이 나오겠지만, 

그들이 남한행을 택할지는 미지수이다.

얼마 전에 서해상에 표류한 북한 주민들 중 상당수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일부 남한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멍청이들! 굶어 죽으러 다시 북으로 가?"라고 말했는데,

남한에서 '152'로 시작되는 탈북자 전용 주민번호가 계속 시행되는 이상,

북한이 국가와 국민들을 파멸로 몰아넣는 독재정권을 계속 존립하려는 이상,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든 편안한 생활을 보장 받을 수가 없다 

 

같은 말과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이렇게 박한데,

다른 말과  피부색을 가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어떨까?

그들의 "무산일기"는 계속된다.

 

謹弔 - 탈북자 故 전승철님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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