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길어올리기 - Hanji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영화가 개봉했다.

개봉 전부터 예매를 하려고 날짜를 기다렸고,

구로CGV에서 보기로 결정했으나 예매 후 하루 뒤에 불가피한 사정으로 

영화를 개봉 할 수 없다고 연락이 왔다.

별 수 없이 신도림CGV로 예매했고 개봉일인 17일 밤 9시 40분에 1관에서 보았다.

 

목요일 늦은 시간이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입장 후 5분 넘게 광고를 보고 있었는데도 나 혼자였다.

그러다가 20대 커플 두 쌍과 중년 커플 한 쌍이 들어왔고,

10명도 채 안되는 관객들을 앞에 두고 스크린은 거장의 영화는 시작되었다. 

난 맨 뒷 열 정중앙에 앉았고, 

내 양 옆으로 앉은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

 





 

"여기서 명품 만들 수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7급 공무원인 필용은 전주 시청 한지과에 부임하여 '조선왕조실록' 복본 작업에 착수한다.

필용의 아내는 한 때 한지 공예로 유명한 예술가였지만,

2년 전 필용의 외도에 충격을 받아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이다.

아내의 도움을 받기에는 염치 없음을 알고 스스로 한지에 관하여 공부를 하는 필용.

그러던 중 한지에 관심을 가지며 촬영 중인 다큐멘터리 감독 효경을 만나게 되고,

시간이 갈수록 둘은 한지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한지의 우수성을 알게 된다.  

 



 

"한지에는 우리의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장군의 아들>, <서편제> 등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

워낙 그의 영화들은 한국적인 색채가 강하기에,

우리나라 영화들 중 세계 속에서 가장 대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에서도 거장의 손길은 인위적인 주제와 연출이 아닌,

자연스럽고 솔직한 주제와 연출로 건재함을 보여줬다.

 

<투갑스>, <게임의 법칙>의 박중훈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줬다.

박중훈의 연기에 익숙하지 않다면 그의 연기를 보며 상당히 어색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원래 박중훈은 그런 연기를 한다.

다만 이전의 영화들에서 보여줬던 코믹함과 터프함이 빠졌을 뿐이다.

 

<씨받이>, <지독한 사랑>의 강수연은 여전히 아름답다.

나이가 들어도 섹시함을 잃지 않았고,

단아하면서도 야성미가 느껴지는 분위기는 그녀만의 매력이다.

 

<하하하>, <대한민국 헌번 제1조>의 예지원은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어느 배역을 맡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어느 배역을 맡아도 특별하진 않지만 평균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왕의 남자>, <제빵왕 김탁구>의 장항선과 <축제>, <창>의 안병경이 출연하여,

원조 명품 조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세계 속에서 한지의 위상은요?"

 

"없죠, 없다고 봐야죠."

 

영화는 이야기가 있는 다큐멘터리 같다.

큰 기복이 없이 평면적인 흐름으로 전개되어서 익숙하지 않다면,

다소 지루하거나 심할 경우 자리에서 일어나 영화관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다면,

100편의 영화들을 만들어 낸 거장의 101번째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

 

한지에 관한 그의 진지한 접근을 자칫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처럼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영화 제목에 좀 더 집중하고 싶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대야 물에도 떠있다고 해서 길어올린 것이 아니다.

달은 온 세상을 비추고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달을 보면서 사람들은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붙잡고 싶지만 멈춤이 없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세상을 비추는 달.

거장은 한지와 달을 미묘하게 연결한다.

 



 

"달은 아무리 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아요."

 

한지의 우수성과 특별함은 기술적인 측면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드러난다.

인위적인 꾸밈이 아닌 번거롭고 시간은 걸리더라도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려는 장인의 정신이 깃들어 있기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품질을 가진 한지를 만든다.

 

언제부턴가 '장인정신'이라는 말이 일본 기예가들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는데,

역사적으로 본다면 원래 우리나라가 원조였다.

대표적인 예로 전통 문화재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은 박제되어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문화재들을 보면 우리 조상들의 정신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그것들은 날카롭고 치밀하게 만들어지는 오늘날의 상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삼국시대 때부터 일본은 우리나라 장인들이 만들어 낸 문화재를 보며 감탄했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 장인들의 정신과 기술을 이어 받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선조 장인들의 정신과 기술이 후손들에게 제대로 전수되지 않아, 

오늘날에는 제대로 된 장인 찾기가 어려워졌다.

반면에 일본의 장인들은 후손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선조의 가업을 이어가며,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명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반만년의 우리나라 문화재들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데,

우리의 정신과 기술을 전수받은 일본은 오늘날에도 문화재급의 명품을 만들어 낸다.

비단 일본 뿐이겠냐만은 세계적인 명품을 만드는 나라들은

선조의 정신과 기술을 계속적으로 후손들에게 전수하고,

후손들 역시 자부심을 가지고 번거롭고 수고스럽지만 끈기 있게 명품을 만들어 낸다. 

 

숭고한 정신과 신의 경지라 불리던 기술은 다 어디로 갔을까?

돈이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고리타분 하다며 무관심한 무정한 세월 속에,

그 좋던 정신과 기술은 소멸되어 버렸다.

 

다만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은 여전히 온 세상을 비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