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없다 - No merc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구정 연휴 기간에 TV에서는 특선 영화들을 방영했지만,

거의 본 영화들이라 볼 것이 없었다.

한 손에는 지루한 책을 들고 있었지만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땅히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동안 미루어 둔 영화 한 편을 보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은 친목 도모의 화투판을 벌였고,

다 큰 사촌들은 블루마블을 했다.

어디에서도 속하지 않은 나는 영화를 보았다.

 



 

"사체는 이제 사람이 아니야, 단서지!"

 

4대강 사업 중인 금강 근처에서 

한 여자가 토막 살인 당하고 경찰은 수사에 들어간다.

과학수사대의 실력자 부검의 강민호는 살해 당한 여자의 사체를 부검하고,

그의 제자이자 젊은 여형사인 민서영은 용의자를 추적한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환경운동가 이성호.

이성호는 서영의 추궁에 순순히 범행을 자백하고,

사건은 의외로 쉽게 종결 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때 민호에게 의문의 남자로부터 서류 봉투가 전달되고,

경악한 민호는 경찰서로 찾아가 이성호를 만난다.

 



 

"사람이 왜 약해지는 줄 아세요? 잃을 게 있어서 그렇데요."

 

<공공의 적>, <실미도>의 설경구는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예전에 비해 대중들에게 비호감적인 요소들이 많아진 배우지만,

연기는 여전히 수준급이고 특히 범죄물에서 돋보인다.

개인적인 바람이자 그가 출연한 영화들 중 최고라 생각하는데,

다시 한번 <박하사탕> 같은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주먹이 운다>, <부당거래>의 류승범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 주었다.

나는 그가 기존의 비슷한 캐릭터들이 아닌,

새로운 캐릭터로 연기 변신을 해주길 원했는데 상당히 좋았다.

생각해 보니 근래에 류승범이 출연한 영화들은 거의 다 보는 것 같다.

 

<주몽>의 한혜진은 여형사였지만 귀여운 캐릭터였다.

<MBC 베스트극장>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고 지금까지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는 외모가 귀엽기 보다는 연기가 귀엽고 생기 발랄하다.

개인적으로는 이상형이다.

 

<눈물>, <공공의 적>의 명품 조연 성지루는 특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

거침없는 입담과 걸쭉한 목소리가 긴장과 웃음을 유발하게 만들고,

짧지만 강한 이미지를 남기는 매력이 있다.

 

<사랑은 비를 타고>의 연극배우 남경읍을 오랜만에 보았는데,

연극이 아닌 스크린에서 보니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가 <아저씨>에 출연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자이언트>의 주상욱이 우정출연 했고,

<공공의 적>, <실미도>의 이정헌이 조연으로 출연했다.

 

김형준 감독은 이 영화가 그의 첫 데뷔작인데,

소재와 시나리오는 무난했다고 본다.

몇 가지 논란이 될 만한 요소들이 있지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에 집중한다면

그렇게 큰 논란은 아닐 수도 있다.

 



 

"밤마다 꿈에 누나가 나올 때마다, 아저씨 생각 많이 했습니다."

 

소재와 시나리오는 좋은 영화였지만 논란이 되는 요소가 몇 가지 있다.

첫째로 실력자 부검의를 속일만큼

토막난 사체의 몸이 뒤바뀔 수 있는 능력이 과연 이성호에게 있었을까? 

그 반대로 실력자 부검의는 사체가 뒤바뀐 것을 몰랐을까?

이 설정은 참신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는 복선에 불과했다.

 

둘째로 여성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

민호가 유흥주점의 여자으로서 사체를 대하는 것과,

나중에 자신의 딸로서 사체를 대하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고,

이성호의 누나 이수진에 관한 에피소드 역시 그렇다.

마치 헤픈 여자와 귀한 여자를 대조하는 것처럼,

영화는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이외에도 능력에 비해 괄시 받는 면도 더러 보인다. 

 

셋째로 영화 말미에 몸이 불편한 이성호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이동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감독이 극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설정한 것이 확실하지만,

조금 공감하기 힘들었다.

 

이외에도 영화를 자세히 보면 옥의 티들이 몇 개 있다.

 



 

"사람의 고통이라는 게, 마음 속 고통보다 기억 속 고통이 더 크더군요."

 

사람에게 '용서'는 무척이나 어려운 단어이다.

왜냐하면 용서는 고통에 반비례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이 커지면 커질수록 용서로부터 벌어지고,

고통의 해소를 위해 고통을 준 대상을 향한 증오가 생긴다.

그리고 그 대상을 없애야 어느 정도 진정하게 된다.

 

기독교 성서에 이런 말이 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출 21:24-25)

 

비록 구약의 율법이지만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는

기독교에서도 처벌에 관해서는 냉정하다. 

그러나 꼭 처벌이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처벌은 공평한 듯 보이지만

사실 또 다른 범죄를 낳을 가능성이 높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고통이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고통을 참고 

용서와 사랑를 실천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크나큰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면,

용서보다는 복수가, 이해보다는 증오가 앞선다.

이는 인간이 가진 자연스러운 본성이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하지만 복수와 증오만을 앞세운다면, 

세상은 비윤리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는 살기 어린 주먹 대신 용서의 악수를 청해야 하고,

복수와 증오 대신 이해와 사랑으로 더이상의 고통과 비극을 막아야 한다.

 

누가 먼저 할 것인가?

이 질문은 나를 비롯한 사람들을 경직시킨다.

그러나 신은 이미 인간에게는 사랑을 실천할 끝없는 용기와,

남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이성을 주었다.

다만 인간이 현실의 고통과 충동으로 쓰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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