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의 특징은, 

재료는 한국적이지만 내용은 세계적인 공감을 얻어 내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우리나라 관객들이 보기에 다소 이질감을 느껴져서,

난해하다거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을 내놓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그동안 보았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은

너무 난해하지도, 이해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너무 과장하는 면은 있다.

 

제 62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박쥐>.

진작에 봤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제대로 보았다.

나의 게으름을 탓 해야 하겠지만,

내 주위에 너무 많은 스포일러들의 말을 듣다 보니 안 봐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즐겨 보는 나로서 보지도 않고 영화를 평가 할 수는 없었다.

어떤 것에 궁금하거나 호기심이 생기거나 알고 싶다면 가서 직접 보면 된다.

그게 가장 좋다.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

 

병원에서 근무하는 신부 상현은 죽어가는 환자들 앞에서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에 아쉬워 하며,

가톨릭 산하에 백신 개발 하는 연구소의 실험체로 자원하여 가게 된다.

죽기를 각오했기에 병의 아픔도 견뎌냈던 상현.

그러나 정말 죽을 지도 모를 위급한 상황에서 수혈 받던 피가 그를 살리게 된다.

자신이 뱀파이어인 것을 알게 된 상현은 한국에 돌아온 뒤 다시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주위에서는 살아 돌아 온 그에게 신비한 효험이 있을 것을 믿고 신자들이 몰려든다.

그러던 중 어린 시절 친구인 강우와 그의 아내 태주를 만나고,

상현은 태주에게 묘한 감정을 느낀다.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온 몸에 피부병이 생기는 상현은 밤마다 피를 찾으러 돌아 다니고,

태주는 상현에게 남편 강우를 죽이자고 말한다.

상현은 자신이 더이상 신부로서의 삶이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부끄러움 타는 사람이 아니예요."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등등..

박찬욱 감독의 영화세계는 인간의 본성을 극단적이거나 특이한 상황 속에서 성찰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은 컬트영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컬트로만 보면 그의 영화들은 형편없고,

이것을 감독이 의도된 장치 중 하나로 보면 그의 영화들을 자세히 봐야 한다.

컬트로만 보는 사람들의 특징은 "박찬욱 감독이 왜 이런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느냐?" 일 것이다.

그러나 칸 영화제는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를 괜찮은 감독이라고 인정했다.

적어도 박찬욱은 쿠엔틴보다 내용 면에서는 알차다.

 

이제 송강호는 그의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을 극장으로 오게 만드는 배우가 됐다.

배우로서는 무한한 영광이자 몇 십만 영화팬들을 거느리는 회장님이다.

그의 말투는 눈 감고 들어도 알 수 있지만 그의 연기는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나중에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한국 영화계의 중흥기에 속해 있을 것이다.

 

별로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김옥빈의 연기는 아주 좋았다.

과감한 노출연기보다 중견 배우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노련한 연기가 돋보였다.

여자 배우들이라면 한번쯤 '악녀'의 역할을 하고 싶을텐데,

그녀는 청순과 퇴폐의 양쪽을 넘나드는 귀여운 '악녀'였다.

쉬운 말로 <타짜>에서 보여준 김혜수 같은 '악녀'는 아니다.

 

현대 한국의 어머니 상으로 평가 받는 김해숙은 새삼 대단한 배우라는 것을 보여줬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연기가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였고 섬뜩했다. 

상현과 태주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면서 울분을 참지 못 했고,

결국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은 것도 어떻게 보면 그녀의 복수의지가 실현된 것이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배역이 한정적이지만 지금 젊었다면 최고의 여배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지구를 지켜라>, <우리 형>, <웰컴 투 동막골>의 신하균은,

박찬욱 감독의 세 편의 영화에서 송강호와 함께 출연하였고 항상 송강호를 난처하게 만드는 역할이었다.

이번 영화에서도 송강호를 무척이나 괴롭혔고 잔혹한 익살스러움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올드보이>, <방자전>의 오달수가 이렇게 평범한 역을 맡다니!

너무 평범했지만 오달수는 존재감은 늘 흥분유발 대기 중이다.

 

원로급 배우의 예우도 없이 박인환과 송영창은 둘 다 비참하게 죽어버렸다.

 



 

"너는 병균이다. 퉤!"

 

신부가 뱀파이어가 되는 설정은 조금 어색하다.

항상 신부는 뱀파이어를 잡으려는 사냥꾼이었고 멍청하게도 뱀파이어에게 비참한 죽임을 당한다.

한복집을 운영하는데 이름이 '행복'이라는 점이 재밌다.

영화를 다 본 사람들이라면 '행복'과 거리가 먼 집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한복을 팔고 한국인들이지만 일본식 집에 살고 마작을 즐긴다.

즉 지하와 1층은 한국인데 2층은 다국적인 공간이다. 

 

이런 어색한 설정들이 영화의 배경이다.

그리고 어색한 설정들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매력이다. 

어색하지만 완전 어색하지 않는, 정상적이지만 비정상적인 사람들과 분위기.

나중에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를 어렴풋, 어느 정도 알게 한다.

그것도 정말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데, 충분히 몰입감은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상현과 태주가 화장실에 나눈 모든 대화이다.

상현의 말처럼 신부든 뱀파이어든 뭐가 그리 중요할까?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 사람들은 눈이 높은 게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다.

 



 

"자꾸 인간적으로 생각하지마, 인간도 아니면서."

 

"그럼 우리가 뭐야?"

 

진짜 뱀파이어의 피가 필요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정말 필요했던 사람들은 노(老)신부와 라 여사였다.

그들은 둘 다 휠체어 신세였고 노신부는 스스로 신부직을 그만 두더라도 뱀파이어의 피를 원했다.

소경인 자신이 눈을 뜨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그 뒤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성례의식과 뱀파이어가 피가 거래되는 상황은 정말 역겨웠다.

그 역겨움은 신앙이 겉으로 아무리 숭고하다고 해도

인간 본성 앞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점이다.

그건 분명 거짓된 신앙이고 잘못된 신앙이다.

 

상현은 누구도 자신의 피를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피를 태주에게 준다.

한 때 연인관계였지만 태주가 죽기를 원하자 진짜 죽여버리고

그녀의 피를 마시려 했던 상현이 도로 살린 것이다.

이후 폭주하는 태주를 막을 수 없었고 계속된 자기 합리화를 통해 태주를 설득하지만,

계속되는 살인과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확인 할 뿐이다.

상현은 태주를 설득하여 다시 사랑하려 했지만,

그건 상현의 소망이었고 태주는 뱀파이어의 피가 자신의 억눌렸던 감정과 본능의 출구였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말미에서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상현은 밤에 자신을 기다리는 신도들의 캠프로 가서

젊은 여신도 텐트로 들어가 강간하려는 듯 하지만,

발기가 된 상태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나타나도 바로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애당초 강간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감독은 여기서 두 가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인간이 보여주는 본능적인 행동과

거짓되고 잘못된 신앙을 일삼는 자들의 실망감,

즉 온전한 신앙에서 비롯한 실망감이 아니라 신봉했던 인간에 대한 실망감이다. 

좀 더 쉽게 그들은 예수를 보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을 보고 실망했던 것이고,

그들의 탈선에 신앙을 버리거나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예수보다 예수의 제자들을 더 사랑했던 것이니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없다.

 

신부는 평생 청빈, 독신, 순명의 세 가지 서원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그 세 가지를 지킬 수 없게 만든다.

그건 타 종교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몸에 가혹한 형별을 가하기도 하고 금욕주의를 외치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한다.

반면에 청빈, 독신, 순명의 세 가지 중 한 가지 이상 어기는 신부도 있을 것이고,

이것 역시 타 종교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요새는 누가 더 오래 버티나, 누가 더 안 들키나에 따라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다.

버티지 못하고 들키면 바로 축출 당하고 다시는 종교인으로서 살 수 없다.

이 얼마나 살벌한가! 그들이 신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들이 신의 자락에 머무르기를 강요한다.

 

사람은 신이 될 수 없다.

고전 신화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신이 되려 했다가 도리어 신의 저주를 받았다. 

온전한 신앙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시작된다.

기성 종교의 신앙원리는 신 앞에 한없이 겸손하고 연약한 인간의 엎드림이다.

신부든, 스님이든, 목사든, 랍비든 이것은 불변하다.

 

개인적으로 종교인이든 신도든 비종교인이든 이 점을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종교는 생성된 원리와 원인만 있을 뿐이다.

그 원리와 원인이 바로 믿어야 할 대상이고 신앙이다.

그리고 종교인들은 그저 그 원리와 원인을 좀 더 잘 보존하고 신도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까지 신의 원리와 원인이 지배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인간은 인간일 뿐이고 죽음 이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기독교는 천국에, 불교는 극락에 가길 원하고 비종교인들은 그저 좋은 곳에 가길 원한다.

 

신은 불완전한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고,

남용하면 남용할수록 추잡해지고,

억제하면 억제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진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은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에 스스로 신이 된다.

 

원수를 사랑하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절대 쉬운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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