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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 The Yellow Sea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새해 첫 영화를 조조로 보았다.
전날 밤에 예매를 하였으나 좌석을 알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일찍 극장에 가야 했다.
맥스무비는 매달 내게 할인권을 주었지만 어디서 보라고는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추운 아침에 사람들은 일터로 출근했지만 나는 영화를 보려 극장으로 갔다.
<라스트 갓파더>와 함께 흥행몰이 중인 나홍진 감독의 신작 <황해>.
전작 <추격자>의 강렬함이 있었기에 이번 신작이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하정우, 김윤석 등 출연 배우들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구로CGV 1관에서 오전 9시 10분 표로 보았다.
조조였지만 은근히 관객들이 많았고
나는 표에 배정된 E열 끝 자리에 앉지 않고 E열 중앙 자리에 앉았다.
"그 사람 손가락 가져와야 된다, 손가락. 앰지."
조선족 김구남은 연변에서 택시운전을 하면서 아직 갚지 못한 빚을 갚고 있다.
결혼한 아내는 자신과 딸을 두고 한국으로 돈을 벌러 갔으나 소식이 없고,
낙심한 구남은 마작과 음주를 즐기며 무질서하고 생기 없는 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같이 마작을 했던 연변의 재력가 면정학은
구남에게 빚을 청산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한국에 가서 자기를 대신하여 누군가를 죽여오라는 것.
살인을 하라는 그의 말에 구남은 고민했지만,
빚을 청산할 수 있고 아내의 소식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배를 타고 밀항하여 한국에 도착한다.
"여기서 제일 높은 놈이 누기야?"
<추격자>로 영화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았던 나홍진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조선족 사회의 비정함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추격자>와 비슷하게 추격신이 많았고 다수의 등장인물들 간의 액션은 현란했다.
그러나 <추격자>처럼 의미있는 폭력이 아닌 단순히 죽이기 위한 폭력만 있었다.
근래 내가 본 한국영화의 범죄, 스릴러 물들은 시각적으로 너무 잔인해진 것 같다.
<추격자>, <국가대표>의 하정우는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다.
영화의 여러 부분에서 고생한 흔적이 나타났고 조선족 남자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주로 스릴러 물에서 그의 진가가 나오는 것 같다.
<타짜>, <추격자>, <전우치> 등 매 영화에서 강렬한 연기를 보여 주는 김윤석.
이 영화에서도 그 강렬함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특히 집요하고 잔혹한 면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와 비슷했다.
김윤석은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악역 배우가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더 다양한 배역을 맡았으면 좋겠다.
<거미숲>, <집행자>의 조성하는 기본에 충실한 연기를 했다.
그가 출연하는 영화의 첫 등장을 보면 그의 배역과 역할이 어떨지 빠르게 짐작이 된다.
그리고 거의 그 짐작에 맞게 연기를 하고 배역을 소화한다.
이 영화에서도 그랬다.
"그 새끼가 내 여자를 건드렸어."
영화는 상당히 어지럽다.
내용이 다소 복잡한 면은 있었으나
리얼한 액션을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 앵글을 일부러 흔들리게 잡아서
집중하고 보면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러웠다.
또한 2시간이 넘는 긴 상영시간은 집중보다 인내를 필요로 했다.
인상적인 장면들은 부산에서 찍은 장면들이었는데,
특히 김구남과 면정학이 대립하는 장면들은 박진감이 넘쳤다.
그리고 돼지뼈를 손에 들고 칼잡이들을 상대하는 면정학은 진정 몬스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영화를 보고 기억에 남는 건 액션 밖에 없는 듯 하다.
"혹시 이 여자 아오?"
오늘날의 사회가 비정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될 수 있고 그 반대 역시 가능하다.
대부분 돈과 명예가 그 이유로 따라오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치사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치사한 것을 알면서도 비정해진다.
빚을 청산하고 아내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탄 조선족 김구남과
그 같은 사정을 알지만 더 큰 이익을 위해 김구남을 죽여야 했던 면정학.
그리고 자신의 명몌를 위해 김구남과 면정학 둘 다 죽여야 했던 김태원.
이 세 사람은 누가 살아남을지 모르는 비정한 도박판에서 자신의 삶을 올인한다.
그 과정 속에서 벌어진 것은 유혈충돌이었고 결론은 죽음이었다.
승자 없이 모두 패자가 된 것이다.
영화 도입부에 나왔던 나레이션처럼,
죽은 개를 불쌍히 여겨 묻어 주었지만
다음날 사람들은 무덤을 파헤쳐 죽은 개를 잡아먹는다.
비단 개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인육을 먹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했고 이후에 있었던 변명들은 자기 합리화였다.
그러나 그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면 쉽게 비판하거나 판단 할 수 없다.
법과 윤리는 그것을 비판하고 판단 할 지라도
법과 윤리가 사람보다 앞에 있을 수는 없다.
그 어느 때보다 비정한 사회를 살고 있다.
웃는 얼굴로 서로에게 인사를 하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니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
누구의 잘못이기 보다는 인간이 가진 본성이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보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 절박하고 치열한 생명체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인간이기에 희망도 있는 것이다.
비정한 사회에도 온정이 있듯이,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의 본성 속에서 선의 가능성을 찾고 회복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미덕일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