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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믿음 -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언제나 위험하다
케빈 하니 지음, 배응준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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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한 야성을 잃어버렸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초대교회와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에 공통점이 있다면,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아주 야성적이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탐험의 세계이며 신비로움이 가득한 곳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싸워야 하는 전쟁터였다. 그러나 언제가 부터 천천히 그리스도인들은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이제 세상은 더 이상 탐험해야 하는 신비로운 곳이 아니라 편히 앉아서 즐길 수 있는 쇼파와 같은 곳이며 전쟁터가 아니라 협상의 테이블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도전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용기 있게 뛰어들지 않는다. 이제 더 이 세상은 변화시키고 개혁 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즐기면서 살아가면 되는 곳이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야성을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무엇이라 말하고 계실까?
하나님은 세상에 길들여진 그리스도인들을 무모한 믿음으로 초대하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야성이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무모한 믿음은 단순히 자기를 합리화 시키는 것이 아니다.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미명아래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기대를 적당히 자기 합리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예상하는 것과 다른 결과나 나오며, 또한 자기를 합리화 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케빈 하니가 말하는 무모한 믿음, 야성의 회복은 자기 합리화가 아니다. 철저히 자기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감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칙들을 말하고 있다. 먼저는 기도이다. 무모한 믿음의 시작은 기도에서 시작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그림을 보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넓은 시야는 결코 우리의 경험이나 능력, 지식이 아니다. 넓은 시야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혜를 가진 성도들이다. 마지막은 기도와 성경, 지혜를 가진 성도들을 통해서 무모한 믿음을 가졌다면 이제는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조급해 한다.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하며 기다릴 것을 말하고 있다. 기다리는 것 그 자체가 훈련이기 때문이다. 무모한 믿음은 절대 자기를 합리화 시키거나 책임을 회피하거나 하나님에게 전가하지 않는 것이다. 무모한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을 무모한 믿음으로 초대하는 것일까? 조금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믿음은 없을까? 그리고 때론 왜 우리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벼랑 끝으로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 같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쇼파에서 그리고 협상 테이블에서 안전하게 믿음을 지키려고 한다. 그곳에 안주하려고 한다. 그리고 야성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도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외면한다. 왜 우리입니까? 또는 왜 우리가 뛰어 들어가야 합니까? 라고 반문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장 무모한 믿음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본을 따라야 한다. 완전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무모한 믿음의 최상의 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무작정적으로 없는 야성을 키워서 도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근육 운동을 한다고 근육이 생기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하루 이틀 야성을 키운다고 야성이 결코 자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무모한 믿음은 마음이 있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모범적인 모델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친히 그 모범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따라 오라고 친히 우리에게 손짓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