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절망 속에서 피어난 희망

본문:  마가복음 10장 46∼52절

들어가며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풍족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풍족함이 우리에게 꼭 행복을 주고 있습니까? 우리 주위를 조금만 둘러보면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소망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할 때마다 이 세상에 희망이 없는 듯 합니다. 카드 빚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버리는 끔직한 일이 우리 주위에서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추운 겨울 어린 자녀를 한강에 던지는 무정한 아버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 사건 등등 예전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 거지 바디베오는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을 기대하면서 아무런 희망 없이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에게서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바디매오는 소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지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당시 소경들은 모세율법에 따라서 보호를 받기는 했지만, 종교적인 사람으로 대접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사회는 소경, 절뚝발 등 몸이 불완전한 자는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 할 수 가 없었습니다.(레2:18-21) 그는 구걸을 해야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오늘도 누더기 같은 겉옷을 의지하여 여리고로 들어가는 길가에 앉아서 사람들에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디메오의 인생에서 커다란 변화를 가져가 줄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그가 앉아 있는 길로 예수님이 지나가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모여들었습니다. 언젠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 이신지 바디메오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는지,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바디메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여리고로 가는 길은 시끄럽고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그리는 소리로 매우 복잡했을 것입니다. 길가에 앉아 있는 바디메오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걸리적거리는 귀찮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 앞을 지나가는 무리 가운데 분명히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된 바디메오는 큰소리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첫째, 바디메오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47절에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가운데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주저함 없이 소리지르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마 지나가는 사람들이 깜짝 놀랬을 것입니다. 비록, 바디메오가 육적으로 소경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모여든 군중 속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자신들을 로마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인 인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과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모여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선지자들이 오랜전에 예언한 메시야임을 알았습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크신 이적들 중 그 어느 것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이적의 현장을 그리고 죽은 자를 말씀으로 살리시는 이적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는 눈이 멀어서 이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권리를 행사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혹은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들었고 그 들은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을 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 즉 비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민감한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임을 알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바디메오는 육적으로 소경이었지만, 분명 영적으로는 소경이 아니였습니다.
 
 둘째, 바디메오는 용기의 사람이었습니다. 48절에 '많은 사람이 꾸짓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소경 거지인 바디메오가 크게 부르짓을 때에 무리들은 으레 그렇듯이 돈을 구걸하기 위한 거지의 본성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꾸짓어 잠잠하라' 고 제지했습니다. 만일 바디메오가 여기서 포기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포기한 바디메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비참한 자신의 옛자리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 소경으로 거지의 신세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심히' 소리질렀습니다. 분명히 바디메오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지 못하는 죄인으로 또는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는 무력한 사람으로 한마디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상한 육신과 영혼을 끌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는 세상의 온갖 방해가 따랐습니다. 그는 몰인정한 구경꾼들의 비난에 개의치 않았고, 집요하게 던져지는 조롱에도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바디메오는 자신과 예수님의 만남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였습니다.

 셋째, 바디메오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50절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여기서 '겉옷'이란 통으로 짠 속옷(tunic)위에 걸치던 네모란 긴 천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디메오를 불렀을 때 그는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차서 뛰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그 말 한마디에 그를 감싸고 있던 절망과 비참한 모든 것이 떠나가는 듯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겉옷마저 훌훌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혹 누가 가져 갈까해서, 거적거리거나 깡통이나 겉옷을 챙기느라 우물쭈물하고 미적거리지 않았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머뭇거렸다면 군중들에게 떠밀려 예수님은 떠나가고, 바디메오는 영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디메오는 자신이 가진 전부라 할 수 있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넷째, 바디메오는 무엇이 자신에게 절실한 것임을 아는 사람입니다.보기를 원하나이다)

맺으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결국 믿음이다.(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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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도전에 믿음으로 응전하라
다니엘3:1-18

유대인 가정교육에서 매우 많이 사용하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영리하기로 이름난 여우 한 마리가 바닷가에 갔습니다. 여우는 물고기들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ꡒ물고기 여러분, 바닷속은 위험하니까 뭍에 올라와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 어부들이 그물을 쳐서 여러분을 잡으려고 한답니다. 또 큰 고기들이 여러분을 잡아먹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육지에 올라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ꡓ 물고기 대표들은 모여서 회의를 하였습니다. 갑론을박, 좀처럼 회의는 끝나지 않는다. 여우는 머리가 영리하니까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주장에서부터 바닷속에 사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대립된다. 고기들은 여우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하였다. 물고기 대표는 물위로 얼굴을 내밀고 이렇게 말했다. ꡒ여우님, 우리를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우리는 물 속에 사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ꡓ

저녁 식탁에서 자녀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준 유대인 아버지는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ꡒ물고기가 뭍에 나오면 어떻게 되지?ꡓ 아이들은 금방 알아듣습니다. 말라죽게 된다고 대답한다. ꡒ바로 그거야.ꡓ 아버지의 교훈은 계속된다. "유태인은 유태인으로 살아야지 아무리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유태인임을 저버릴 수는 없는 거다ꡓ 무서운 교훈이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은 유태인으로서의 신분과 정신을 떠날 수 없는 것을 어린 마음 속에 심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지 아무리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그리스도인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믿습니까?(아멘)

그러나 청년 여러분, 세상의 도전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제대로 한 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봐야지 하면, 삶에는 신앙과는 거리가 먼 일만 일어납니다. 세상의 도전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세상은 순수한 신앙을 타락시키기 위해 도전해옵니다. 우상을 섬기라고 도전해 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라고 도전합니다.

본문에서는 세상의 도전을 받는 청년들이 나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들이 세상으로부터 어떤 믿음의 도전을 받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도전을 신앙으로 승리해 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세상의 도전에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첫째, 세상은 권력의 힘으로 청년들의 신앙을 도전할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느브갓네살왕은 최고 통치자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해 사드락과 메삭 아벳느고에게 느브갓네살이 세운 금신상 우상에게 절하라고 신앙을 도전합니다.

왕은 세상의 최고의 권위와 권력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권력 앞에 약해지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권력 앞에 끌려가 신앙을 팔아버리고 세상속에 신앙을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세상의 권력에 신앙을 복종시키지 않았습니다.

청년여러분, 여러분의 상관이 권력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도전하여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상관의 권위로 크리스찬의 삶에서 빗나가는 모습으로 일을 요구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그런 일은 분명히 다가옵니다.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기억하십시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백도 없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누구도 그들을 굴복케 할 없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믿음, 그 믿음으로 권력으로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나갔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을 제일 많이 믿는 부류는 노예들이었습니다. 당시 전 6천만 로마시민의 3분의 1이 노예였습니다. 이 노예들이 기독교를 바로 믿어서 로마를 복음화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노예는 마음대로 사고 팔고 죽이기까지 했답니다. 막 때리고 쇠사슬로 묶고, 이렇게 모진 학대속에서도 그들은 외양간 같은 데에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고관이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밖으로 나가보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옵니다. 노예들이 외양간 같은 데에 모였는데 그들이 기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주인 자신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주인의 일이 잘되게 해주시고, 주인에게 건강을 주시고, 주인 가정에 평화를 주시고,… 이렇게 기도하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그 자리에 뛰어들어갔습니다. "나도 예수 믿겠다고 하고 그는 쇠사슬을 다 풀어주고 그들과 함께 울면서, 그 동안 사람 대접을 하지 안 했던 것을 잘못했다며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노예들을 통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노예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법 권력과 위장된 권위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릅 꿇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그들이 놓은 그들의 덧에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같은 신앙으로 세상의 권력을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거든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물들어 살다가 영원한 패배자가 되든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길 밖에 없습니다. 믿습니까?(아멘) 세상의 권력의 도전을 하나님의 권력을 힘입어 승리해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세상은 생명의 위협으로 청년들의 신앙을 도전할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황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넣겠다는 특별법을 반포하여 생명을 위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전합니다.

그런데 이런 범은 누구에 의해 반포되었느냐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함께 일하는 주위 사라들로부터 나온 법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매우 성실한 직장인이었습니다.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포로가 된 자들로서 바벨론을 다스리는 직책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성실한 일꾼이었으면 포로로써 바벨론 사람들을 치리하는 직책을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성실함을 시기하는 바벨론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 때 오히려 세상사람들로부터 여러분을 제거시키려는 경쟁자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을 시기하거나 중상모략하는 모략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때 어떻게 극복해 나가시겠습니까? 그들을 되 받아 칠 힘이라도 있습니까? 그들에게 내 놓을 두 개의 생명이라도 있습니까? 엎거든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 크리스찬의 삶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로마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으로 그들의 목이 찍히우면서도 찬양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보았습니다.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면서,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나의 철학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분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그들의 죽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저들의 삶과 죽음으로 증거하고 있는 저들의 하나님을 무엇으로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위협해 오는 세상의 유혹을 생명으로 도전하며서 승리할 수 있겠던가요? 자신이 없습니까? 그럴 능력이 없거든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생명에는 누구나 약한 법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동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우선 순위가 먼저 생명을 선택합니다. 세상의 도전은 이렇게 야비합니다. 세상의 도전은 이렇게 유치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 때 우리가 세상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밖에는 없습니다. 세상의 도전을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겨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세상은 인간관계의 위협으로 청년들의 신앙을 도전할 것입니다.

황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불 속에 던져넣겠다는 특별법을 반포하여 생명을 위협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전합니다. 그런데 이런 법은 누구에 의해 반포되었다구요?

그런데 8절에 보면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이런 성실함을 시기하는 바벨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성실하게 살 때 오히려 세상사람들로부터 여러분을 소외시키거나 열외시키거나 왕따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12절에는 “이제 몇 사람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렐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하면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참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모략하는 간신자가 있다는 것도 기억하십시오. 직장동료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기하고 왕따를 시킵니다.

이런 외로움을 이겨나갈 자신이 있습니까? 이런 고통을 극복할 자신이 있습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럴 자신이 없거든 하나님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런 환경이 없도록 기도하시던가, 아니면 그런 고통을 이겨나갈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나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마도 오움이 없는 환경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 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세상의 도전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회로 삼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세상은 타협의 방법으로 청년들의 신앙을 도전할 것입니다.

세상이 성도들의 신앙을 세속화시켜 위해 타협하면 도전합니다. 흔히 타협이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성도들의 신앙을 도전하며 타락시킵니다.

15절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런 거래에서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구해주지 않더라고 당당하게 신앙을 지키며 죽은 것을 택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은 직장에서 신앙의 타협을 어떻게 이겨나가겠습니까? 한 젊은이가 세상에 첫 걸음을 내디디면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처음 시작한 것은 정육점이었습니다. 호텔에 고기를 납품하던 그는 주방장으로부터 뇌물 상납을 종용받았습니다. 이 청년은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뇌물을 주면 손해를 보는 쪽은 고객들이다. 그 만큼 질이 나쁜 고기를 납품하게 된다. '정직, 이것은 나의 경영철학이다." 그는 결국 뇌물을 주지 않아서 호텔에 고기 납품의 길이 끝겨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청년이 다시 시작한 사업은 생필품을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가게 입구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붙이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사람들은 그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업은 크게 번창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백화점 왕’ 인 페니(JC Penny)입니다. 페니는 정직을 바탕으로 1천 6백 60개의 점포를 남겼습니다. 정직은 반드시 인정받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다만 좀 늦을 뿐이다. 믿습니까? (아멘)

이것이 타협하지 않는 세상에서의 크리스찬입니다. 세상은 계속 도전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냐? 아니면 세속이냐? 교묘한 묘책으로, 이성적인 논리로 여러분의 신앙을 도전하며 타협을 강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타협은 편한 것이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좁은 길이지만 영원합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교과서 대로 대답하지 말고, 가식도 필요 없이 현실 그대로 대답해보십시오. 자 여러분, 세상에서 많이 누리고, 부자 되고, 풍요롭게 잘 살기를 원하시죠? (네). 그래요. 자, 그러면, 세상에 남 등쳐먹고 사기치는 놈이 잘 살아요? 아니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순수하게 사는 사람이 잘 살아요? 네(사기치는 놈이 잘 살아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웃음). 내가 이런 질문을 대학생들에게 “어떻게 살겠는가?” 했더니. 한 대학생이 목사님 저는 의롭게 살겠습니다. “어떻게 하는 사는 것인데?”. “등쳐먹는 놈들을 등쳐먹고 살겠습니다.”(웃음)

사랑하는 청년여러분, 세상은 신앙에서 타협을 하자고 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이런 양면작전을 씁니다. 타협을 그럴 듯할 것입니다. 타협은 관계가 좋은 것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타협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비참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과 신앙의 타협은 순간은 사는 길이지만 영영 우리를 파괴시키는 사탄의 작접임을 명심하십시오. 세상의 타협에서 신앙이 무너지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맺는 말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대학생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현장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신앙을 온전히 유지하며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도전합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함께 세속화되라고 도전합니다. 세상은 어떤 모양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타락하도록 도전합니까?

그러나 우리는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의 우직한 신앙을 봅니다. 세상은 무서운것 같지만, 우직한 신앙 앞에선 무릅을 꿇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넘어트릴 수 있지만 신앙은 무터트릴 수는 없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타협하고 싶고, 세상의 방법으로 살고 싶고, 인간의 방법으로 세속화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왜요? 그것이 편하니까? 그러나 그 때 우리는 영원한 패배자기 되고 말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도전에 맞설 방법은 세상을 믿음으로 도전하는 길입니다. 세상이 나를 대적해 올 때, 나는 신앙으로 세상을 도전하며 대적해야 합니다.

느브갓네살왕은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우직한 신앙을 무너트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풀무불 가운데서 살아나서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토록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빛을 나타냄으로 (빌 2:15), 직장과 삶 속에서 세상의 도전에 신앙으로 승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홍진 목사 http://myhome.naver.com/chapelainkhj 청년대학부설교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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