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어떻게 이해 할까? 아니 더 정확하게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는 걸까? 인간의 다양한 모습 만큼 인간의 이해 역시 학자마다 시대마다 다양하다. 특히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를 마틴부버의 "나와 너"를 읽으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마틴부버가 말하는 인간이해는 무엇일까? 부버는 "나와 너" 에서 세 가지의 인간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 세가지 인간관계는 나와 너(I and Thou), 나와 그것(I and It), 그리고 그것과 그것(It and It)이다. 먼저 "너"는 무엇을 의미 하는 걸까? Thou는현재적인 개념으로서 나와 상호 관계 맺는 것을 말한다. 나란 존재 혹은 너란 존재가 일방적으로 관계를 맺는다고 해서 나와 너의 관계는 맺어지지 않는다. 나와 너가 상호의존하여서 관계를 맺을 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It은 나와의 관계를 맺은 너를 의미 한다. 즉 이전에 Thou가 It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를 의미한다. 나와 그것은 상호관계를 맺지 못하는 관계이다. 그것은 나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과 그것의 관계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 간략하게 세 가지 인간관계를 살펴 보았다.

  부버 사상의 핵심은 나와 너의 관계를 어떻게 맺는냐 이다. 부버는 인간의 고통이 나와 너의 상호관계가 언제가는 끊어 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인간의 유한성과 제한성으로 인하여 상호 관계가 끊어지는 고통과 아픔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너"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너"를 그것으로 받아 들인다. 즉 사람을 사람 자체의 너로 대하지 못하고 목적과 이해관계에 의해서 맺어지는 관계를 말한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많은 사람들과 상호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진정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은 사람은 몇명이나 될까?

  인간의 아픔...고통... 언제가는 지금 사랑 하는 사람이 Thou가 아닌 It 으로 다가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한계성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하려고 한다. 이러한 극복 의지는 인간의 죄이다. 인간의 한계성은 인간이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너" 로 인해서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제한성을 극복해햐 한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아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분은 언제나 "너"란 존재로 우리 곁에 다가 오신다. 그러나 결코 강제로 오시지 않는다. 그분은 인격적인 존재 임으로 우리의 마음이 열리기 까지 기다리신다.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가 언제가는 그분을 인정하는 상호관계를 맺으리라는 기대감으로 그분은 기다리신다. 영원히...

  우리는 과연 어떤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가? 파페포포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인간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비록 내가 아프지만.... 그리운 사람이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It의 경우가 아닐까? 살다보면 모든 관계에서 Thou의 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너로 다가 오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너로 다가 오기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으로 멀리 가기에는 너무 그리운 존재... 파페포포의 저자는 적당한 가리를 둔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현재 어떠한 존재가 너 흑은 그것으로 다가 오지 않지만, 언제가는 너로 다가 올것을 기대하면서 나의 삶의 어느 한구석에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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