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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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였다. 그 책을 통해서 희망을 잃지 않는 아름다운 인간을 만났다는 것은 너무나 기쁘고 나에게도 살아간다는 것의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번역한 '사람아 아 사람아'라는 책에서도 체제는 다르지만 역시 사람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것이었고, 번역자를 보고 그 책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최초의 책이었다. 그리고 '사람아 아 사람아'랑 비슷한 말투의 이 책을 통해서 또 다른 감동을 느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와서 세상을 자유롭게 거닐때 그는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게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말하면서 그의 여행기, 아니 '여행지에서의 사색'이 시작되었다. 전에는 그의 사색의 편지를 가족에게 보내주었다면 이번에는 중앙일보에 보내게 되었다. 그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내 어찌 그분의 큰 뜻을 비판하겠는가. 하지만 출판사가 돌베개라는 친근한 곳에서 발행함이 감사했다. 중앙일보에서 이 책이 나왔다면 그를 좋아하는 한 독자로서 서운했을 것이다.

갇혀본 자만이 그 자유를 알고 진리에 목마른 자만이 진리가 얼마나 귀한지 아는 것처럼 그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힘들지만 어렵지만 그는 희망을 볼 수 있고, 우직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여행지에서는 그는 편지를 보낸다. 중앙일보가 아닌 이 글을 읽는 젋은 당신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한다. 때로는 허준에게 자신의 늙어 죽은 몸을 맞긴 유의태처럼 자신을 밟고 가라고, 때로는 자연속에서 기품을 잃지 않고 언제나 동일한 나무들처럼 살아가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었던 어느 여자후배는 허난설헌의 무덤을 보고 쓴 글이 가장 감명깊었다고 한다. 얼마전 강릉 경포 초당동에 가서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에 다녀왔다.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앞에는 경포호수가 있고 뒤에는 소나무들이 있는 아름다운 집이었다. 집안도 소박했다. 그 집안을 채우는 것은 지금 집안에 적어놓은 허균과 허난설헌의 시처럼 그들의 학문과 인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내가 아는 허난설헌은 아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에까지 그의 글이 알려질 정도로 뛰어난 지식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찍 죽었다고 해서 나는 미인박명과 천재박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이야기,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어선 그녀가 재주를 다 펴보지도 못하고 죽은 아쉬움보다는 한 여인으로서, 여자로 태어나서 겪은 그녀가 애설프게 느껴졌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그녀에게 이러한 고통이 있었던 것일까? 시대를 잘못타고나서, 여자이기때문에. 신사임당처럼 현모양처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자가 나서서 집안이 망한 것일까? 그리고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여자후배에게는 허난설헌이 어떻게 다가왔던 것일까? 허난설헌이 너무 똑똑했기때문에 그녀의 남편은 부담스러워 그녀를 괴롭히고 다른 여자를 찾았던 것일까? 그녀의 짧은 인생만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었던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힘들지만 이겨내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할 수 없는 현실이 가슴이 아프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불평등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의 여성들을 보면 허난설헌은 부러워할 것 같다. 나 또한 이 땅의 허난설헌들이 비극이 아닌 해비엔딩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꿔 본다.

세상에는 많은 사색이 있다. 사람들은 올바른 사색의 길로 독서와 여행을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에게 여행은 사람을 깊은 사색으로 이끈다. 나도 여행을 갔지만 깊은 사색보다는 그곳에서 경치구경과 경험에 한정된 사색을 할 때가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귀한 시간이었지만 값되게 쓰지 못한 아쉬운 시간이었다. 여행지에서도 이런 생각해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비록 다듬어지지 않았고 대단하지는 않지만 순수하고 희망찬 그런 생각을 하는 그런 여행을 가고 싶다. 푸른 경치도 좋고, 파란 하늘과 바다도 좋고, 황금 들판도 좋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자연이 있고, 사람이 주인공인 그곳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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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 -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
피터 퓨 지음 / 이두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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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인즈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최근 주류경제학에서 신고전주의학파와 케인즈학파로 나눌만큼 그의 이름은 한 학파를 대변하고, 오늘날 그는 자본주의를 구한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런 그에 모습은 이곳저곳에서 많이 들어서 알고 싶지 않아도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애를 통틀어 단편적인 한 부분이었다. 이 만화책같은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시리즈를 통해서 그의 인생을 쉽고 간결하지만 전체적으로 깊이있게 볼 수 있었다. 만화책도 이런 만화책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멋나라 이웃나라처럼 지식을 부담스럼지 않게 전달해주는 책같다. 이 시리즈가 꽤 있는데 그것도 시간 되면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케인즈는 어려서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똘똘한 아버지와 역시 똘똘한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샬의 제자였고, 또 케임브리지에서 상급 윤리학자라 칭호도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케임브리지 시장도 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풍부한 재산과, 부모님께 물려받은 똘똘한 머리, 그리고 풍부한 문화자본 등 아주 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케인즈 또한 수학에 탁월하고 국왕장학생으로 선발되 이튼 스쿨에도 들어가는 등 천재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는 풍부한 영어구사력까지 가졌다고 한다. 그의 부모님이 대단한 독서가였다고 한다. 역시 훌륭한 사람에게 성공비결중 독서는 끊이지 않는가보다.

 이러한 탁월한 케인즈는 공부벌레로 얽메이지도 않고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면서 사교클럽에서 인기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야 말로 누가 보기에 부러운 삶이다. 공부도 잘하면서 놀기도 잘하고 케인즈는 정말 천재인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윤리적으로 당시 범죄였던 동성애를 하였다고 한다. 천재들중에 의외로 동성애자들이 많은 것같다. 요즘은 성적소수자라는 용어도 쓰는데 케인즈같은 경우는 성적소수라기 보다는 무식한 이성보다는 똘똘한 동성에게서 더 사랑을 느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이성에게서 채우는 것이 아닌 자신과 다른 분야에서 뛰어난 동성에게서 호감을 갖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도 여성 발레리나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꽤 재미있게 살기도 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성적소수자라고 옹호해줘야 하는지 참 의문이다. 동성애자들이 내세우는 논리로 어쩔수 없이 동성을 사랑하게 된다고 내세우는데 그것도 맞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때문에 전체 동성애에 대한 비판을 없앨수는 없을 것 같다.

 케인즈는 그 동안의 화폐주의(고전주의)에서 벗어나 시장실패를 깨닫고 정부의 개입을 옹호하는 주장을 한다. 물론 이러한 그의 주장덕분에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세계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공산주의자라고까지 비판받은 케인즈가 자본주의를 구한 영웅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충실한 부유층이었고, 대공황과 더불어 잃어버린 재산도 미국경제가 그의 주장의 채용으로 살아나듯이 그의 재산도 같이 살아났다. 여기서 사람들은 또 부러워 한다.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경제학자라고 극찬을 하곤한다. 그러나 어떤 정책을 쓸지 아는데 그것을 예측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봤다.

 케인즈는 대공황에서 자본주의를 구원한 구원투수뿐만 아니라 1970년까지 전세계 자본주의국가들의 정책으로 그의 주장이 채용돼 호황을 이루고 완전고용을 목표로하는 그의 주장 덕분에 사회적으로도 윤택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하지만 이후 신고전주의학파들 주장이 전세계를 강타하면서 실업의 공포가 다가오고 오로지 시장질서만을 강조하기때문에 약자들이 고통받게 되었다.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에 그의 주장은 자본주의국가의 고용인들에겐 밥그릇(일자리)를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케인즈는 너무 좋게 과장되었다. 그는 윤리학자도 아니고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옳은 경제를 추구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이런 의도하지 않은 정책으로 마치 시장의 질서에서 의도하지 않은 각 개인의 활동이 사회적 선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되었다. 지금도 세계는 케인즈의 정부냐 고전주의학파의 시장이냐를 두고 논쟁중이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바람이 심하게 부는 이 시기에 케인즈라면 어떤 주장을 할지 생각해 보는 것 도 괜찮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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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훔치기 - 한 저널리스트의 21세기 산책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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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대학들의 리포트 짜집기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들의 논물, 전문적인 학술논물조차 짜집기하면서 마치 자기것인양 떠벌리고 있다. 자신의 깊이 없이 마치 남의 것을 자기것인양 나열하는 지식이다. 자신의 지적재산권은 악착같이 주장하면서 남의 지식은 도둑질 하고 있다. 지적재산권의 효용성은 둘째로 치고도 떳떳하게 거짓말하는 것은 굉장히 역겨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 대놓고 남의 지식(코드)를 훔쳐왔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으니 관심을 가져볼만한다.

 고종석이라는 사람 저널쪽이나 많은 독서를 하기전에는 듣기 어려운 이름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세계의 대표 보수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이다. 그리고 의식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훔쳐온 지식이 어떤지 궁금하다.

 40개의 다양한 주제에 관한 모색. 대부분의 다른 유명인물들의 저작들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어떻게 보면 가치중립적이라고도 볼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자신이 원하는 내용들만 가져왔기때문에 편향적이기도 하다. 그의 말처럼 그속에 무슨 의지가 있고 욕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좀 더 나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 때론 진보의 입장에서 때론 소수의 의견에서 때로는 다수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지극히 카멜레온적이기도 하지만, 옳다는 것은 꼭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고 소수도 아니고 다수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독서를 하면서 그의 방대한 지식량, 아니 훔쳐온 지식의 양에 놀랐고, 적재적소에 짜집기 하는 그의 실력에 감탄을 계속했다. 하지만 가끔은 그의 깊은 생각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짜집기하여서 인용만 하는 그가 조금 아쉬움으로 느껴졌다. 또한 몇몇 구절, 그의 얼마안되는 그의 생각, 그의 코드가 들어있는 곳에서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의 유연화에서

"남자든 여자든 동시에 여러 배우자를 지닐 수 있게 되고, 남자든 여자든 동시에 여러 배우자를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사랑은 에리히 프롬이 정식화한 '소유에서 존재로의 이행'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글귀에서 상당히 아쉬움을 느꼈다. 내가 느꼈을때는 그가 에리히 프롬의 저서를 오독을 했던지 아니면 자기 의견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껴맞춘 것 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의 글 상당수가 종교와 연관되서 설명되었다. 특히 현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기독교가 많이 등장하였다. 그 중 기독교의 창조론을 믿는 자들을 광신으로 폄하하는 것이나 기독교가 사회의 악처럼 비쳐지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일이다. 과학에서도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 한쪽도 과학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고 한다. 한쪽은 불완전한 과학을 더 믿고, 한쪽은 보이지 않은 신을 더 믿을 뿐이다. 그가 저널리스트로서 비판을 하기 위한 대상을 찾기 위해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조금 가지 않았나 생각한다.

 저널리스트는 사회의 잘못된 것을 꼬집을 수 있고, 사회를 좀 더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하며, 보다 좋은 사회를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사회가 곪는 것을 막기 위한 백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때론 사회가 그들의 이러한 노력에 길들여져 그들의 글이 항생제처럼 되어 또 다른 면역이 생기지 않길 바란다. 결국은 어렵지만 철인 저널리스트가 되어야한다. 이루기 힘든 유토피아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진리 추구자의 길이다.

 많은 지적 사치에 빠졌다. 좀 더 아쉬운 것은 이 책은 단행본 보다는 신문으로 보는게 더 좋았을 것 같았다. 그게 독자에게 더 감동을 주었을 것 같다. 그래도 읽으면 좋은 교양 백과사전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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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국경제를 파탄으로 몰았는가
이교관 지음 / 동녘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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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IMF체제라고 하던 시절이 지난간지도 꽤 지났다. 하지만 그 때보다 우리의 수준이 많이 나아졌냐고 하면 그것은 의심스럽다. 아직도 우리의 모습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어쩌면 더 나빠졌다. 청년실업은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고, 침체에 빠진 내수시장은 구멍난 독에 물을 붇는 것처럼 어떠한 처방에도 약효가 먹히지 않는다. 경제!경제! 외치지만 그럴수록 희망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고, 우리의 아픈 현실만 상기시켜주는 것 같다.


왜 이런 현실이 온걸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던 것이고, 언제부터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걸까? 그걸 연구하고 책으로 쓴 사람이 한국에서 가장 탄압받는 기자중 한사람으로 선정된 이교관이다. 그는 왜 우리가 IMF체제에 들어가야했고, 왜 그렇게 한국국민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을 전체적인 면에서 알려준다. 그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음모론처럼 보이기도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왠지 잘 꾸며진 소설처럼 구조가 탄탄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허구의 소설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이라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럼 누가 한국 경제를 파탄으로 몰았는가?


우선 나의 생각은 부실경영을 일삼는 재벌기업들과 사치와 향락에 빠진 국민들이라고 생각하고 거기다 약간으로 초국적기업의 초단기기금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미디어에서는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의 사치를 문제 삼고, 국민성 등을 많이 문제 삼았다. 일찍 터트린 샴페인이라고 하면서 그 전부터 자주 예견이 되어왔다. 그래서 일반 국민들에게 '한국경제 파탄이 나에게 있구나 반성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맞다. 나도 잘못하고 국민들도 모두 잘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경제파탄의 원인에 넣는다면 가장 밑에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누가 한국경제를 파탄으로 몰았는가? 그 대답은 명쾌하다. 미국이다. 미 재무부와, 국제통화기금(IMF), 월가의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합작이라는 것이다. 말만 들으면 음모론에 가까운 내용이지만. 저자는 체계적인 논리로 이를 뒷받침해준다. 일본, 한국등이 IMF에 맞선 금융기구 창립에 반대하고, 한국의 금융개방을 위해, 그리고 미국의 부의 원천인 금융자본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을 파탄의 지경으로 몰았던 것이다. 그 내부사정은 아주 쪼잔하면서도 치밀한 이익에 우선을 둔다.


이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만약 저들의 이익이 군사적인 것으로 해결할려고 했다면, 그래서 북한을 군사력으로 침공하여 이익을 대변했다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한편으로 생각해본다. 다행히(?) 그 군사력에 의한 이익은 이라크에서 얻으려는 모습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정말 알수록 두려운 나라이다. 다른 이데올로기도 아닌 오직 이익에 의해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돈에 눈이 멀었기때문에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환자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힘이 있는 환자이기에 더 두렵다.


미국이 한국의 외환위기에 강력한 역활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한가지 이유로만 돌릴 수는 없다. 내부적인 이유도 있다. 문제는 알면서도 고칠 수 없었던 재벌개혁과 금융개혁, 그리고 이리저리 표만 보고 정권의 이익만 보던 정치인들에게도 큰 원인이 있다. 그들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거머리에게 피를 보이지 않으면 거머리는 붙어도 신경쓸바 아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피를 보였으니 그들이 피를 빨아가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내면을 알면 알수록 내 가슴이 아팠다. 세계경제공황은 공부하면서 자칫 한국의 공황은 보지 못하는 경제를 공부할 뻔했다. 아직도 우리의 경제체제는 미국식이다. 미국의 주류경제학속에 속해있지만, 연구자료와 통계, 그리고 교수님들의 박사학위조차도 그들의 경제모습을 보고 논문을 작성한다. 그래서 한국의 경제는 알 수가 없는 것이고, 누구하나 한국경제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 내가 한국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뜻있는 지식인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기대된다. 한국적인 경제학, 우리체질에 맞는 경제학, 허준처럼 우리체질에 맞는 처방을 내릴 경제학자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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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자누스 2005-11-21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체질에 맞는 경제학' 언제 나올런지 기다려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http://blog.naver.com/ritter13/20006044726
 
데미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4
헤르만 헤세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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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이라는 녀석의 이름을 처음들은 것은 고등학교때였다. 친구녀석이 데미안을 읽더니 황홀했던지 감성적으로 이 책에 대해서 청소년시기에 읽을만한 책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난 이 책이 멜로북(?)으로 청춘들의 애정행각을 버리는 책인지 알았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 가슴떨리는 사랑을 구하게 될 것 같은 책인지 알았다.
이게 끝이었다. 순수문학작품 별로 안좋아하던 나에게 이 책은 그냥 유명한 고전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집에 구석에 있던 문고판 데미안을 잡게되었다. 이제 나도 어디가서 데미안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얼마나 기쁜가. 아 사랑은 얼마나 낭만적일까 생각하면서 책을 들었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데미안이 아니고, 녀석은 사랑스런 연인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쁜 크로모로부터 해방시켜준 친구 데미안에게서 감사를 느낄 수도 없었다. 다만 가난한 크로모가 부유한 싱클레어의 약점을 가지고 착취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로모와 싱클레어의 추악한 인간의 심성을 보았다. 신비로운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구원자였고, 진실한 친구였을것이다. 하지만 싱클레어가 허영심으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일찍 부모님께 고백했다면... 과연 데미안과의 만남이 이루워졌을까 생각해봤다.

싱클레어, 이 녀석은 데미안 없이는 타락하는 인간일 뿐이다. 녀석은 데미안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마치 연인들이 사랑하는 자기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몽롱하다. 뭔가에 홀린듯 싱클레어는 꿈꾸고, 홀린듯 그림을 그리고, 뭔가에 홀린듯 데미안을 만나고, 그리고 에바부인을 만난다. (여기서 에바부인과 신세기엔반게리온의 에바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왠지 은연중 같은 알 모티브를 채용하고 몽롱함을 추구한게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젠 몽롱하다 못해 어지럽다. 그리고 데미안에게서 얻었던 해방은 다시 어지러운 세상으로 헤메이게 된다. 어지러울려면 책 속에 있는 사람들이나 어지럽지 왜 나한테까지 전이 되는지, 지하철에서 책 읽고 오다가 어지러워서 쓰러질뻔했다.

꿈이라는 것은 좋다. 환상도 좋다. 몽롱한 것은 더욱 좋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이것들을 연구했을 것이다. 나도 꿈꾸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그러한 환상속에서 나의 현실을 맡길 순 없다. 프로이트의 역활은 이러한 꿈과 성에 관에서 연구하는 것으로 끝나고, 헤세의 역활은 이러한 것을 자신의 삶과 작품에 반영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다 내 한몸 어지러울 때 어떻게 사회를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겠는가. 천재여 그래서 괴로웠던 헤세여. 당신마저 세상을 등지면 평범한 나는 어찌하리. 당신은 알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알을 깰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을 파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신에게는 불행히도 날개도 없습니다. 제발 환상속에서 태양을 쫒다 불속으로 간 이카루스처럼 되지 마시기를...

이제 데미안은 알속으로 들어가고 건강한 포유류 싱클레어는 나와서 세상으로 뛰어갈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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