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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 부르디외 사회이론으로 문화읽기
김동일 지음 / 갈무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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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 2시 <예술을 유혹하는 사회학> 출간 기념 저자 강연이 진행되었습니다.(^^)

책 출간과 함께 저자 강연 이벤트를 준비한 건 이번이 세 번째인데요. 출판 활동을 하면서 가장 설레는 일이 있다면 독자 분들과 저자 선생님을 잇는, 저자 강연을 준비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AIS(270).jpg(2010.12/ 갈무리/ 김동일)

책을 서점에 보내고 나면, 어떤 독자 분들이 갈무리 책을 읽으시고, 갈무리 책을 통해 무엇을 얻게 되시는지 항상 궁금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강연회에 오시는 한 분, 한 분을 뵐 때마다 살짝 긴장이 되기까지 합니다.*_*!

special_lecture(550).jpg 

오늘 이벤트의 조금 더 특별한 점은 정말로 많은 독자 분들이 참석해주셨다는 것인데요. ‘예술은 사회에, 그리고 사회는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고민되고 있고, 그만큼 삶의 중요한 문제 인 것 같습니다. 독자분들의 참여를 통해 갈무리 책의 츨긴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게 됩니다. 그리고 독자분들께서 이러한 고민들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는 자리였기를 바랍니다. 

오늘 김동일 선생님의 강연 가운데 특히 와 닿은 부분이 있었는데요. 예술을 본질로서 파악하지 않고 실천(practice)으로서 사유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작품을 평가하기를 거부하고 작품의 시 ․ 공간적 맥락 속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태도를 짚어 주셨는데요. 지배계급이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의 삶이 동질화 되고, 하나의 가치를 위해 삶을 경쟁시키는 맥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또 국내 미술관들이 대변하고 있는 사회계급들을 분류 하시면서, 대안 공간이 더 적극적으로 철거민들, 이주민들과 같은 다중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셨는데요. 장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장내 투쟁이 사회공간의 권력관계를 역전하기 위한 분투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많은 분들과 대화하지 못한 게 아쉬운데요.^^;  또 준비했던 저자 사인회를 깜박하고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ㅠ 아직 미흡한 점이 많은 행사이지만 지속적으로 개선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오늘 참석해주신 독자 분들께 정말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신청하시고 미처 오시지 못한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럼 언제 일지는 모르지만 다음 행사 때 다시 뵙겠습니다.*_*!매일 매일 활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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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제국주의 - 개정판
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김성곤.정정호 옮김 / 창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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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판이 나왔네요! 분위기 있는 책표지가 우선 눈길을 끄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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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아우또노미아총서 20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 갈무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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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올해 11월 26일(금) ~ 27일(토) 백남준 아트센터 국제 예술상 수상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브뤼노 라투르의 수상연설문이자 Making things public 전시회 도록의 서문이기도 한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어떻게 사물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백남준아트센터 팜플렛, 2010)에 대한 조정환 선생님의 해석입니다.
원문 주소: http://amelano.net/?document_srl=21135&mid=filozo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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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 무리, 2009)의 저자이자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의 수상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수상연설문이자 Making things public 전시회 도록의 서문이기도 한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어떻게 사물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백남준아트센터 팜플렛, 2010)에서 물정치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그가 이해하는 물(物)정치Ding-politik는 Ding, thing을 그 어원인 모임 혹은 집회assembly로 해석함으로써 성립된다. 그는 정독을 요하는 긴 논의 후에 자신의 물정치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한다.
 


a)정치가 단지 인간에게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문제들이 서로 엮인 상태로 혼재하고 있을 때

b)객체가 물이 될 때, 즉 사실의 문제들이 그것들의 복잡한 얽힘에 길을 비켜주어 공동관계concern의 문제로 될 때

c)모임이 더 이상, 가상 의회를 건설하는 초기 전통에서의 기존의 구체globe나 돔 아래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

d)언어 손상, 인지적 취약성 및 온갖 종류의 장애에 의해 부과된 내적 한계들이 더 이상 부정되지 않고 인공보철물이 받아들여질 때

e)모임이 협의의 의회에 더 이상 국한되지 않고 정당한 모임을 추구하는 수많은 다른 아상블라주들로 확장될 때

f)모임이, 더 이상 신체, 리바이어던, 혹은 국가 등과 등가적이지 않은, 임시적이고 깨지기쉬운 유령대중(Phantom Public) 아래에서 이루어질 때

g)그리고 끝으로 정치가 연속의 시간에 대한 강박에서 해방되어 물정치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에 도입되는 등급의 리얼리즘realism이다.(p. 30;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번역을 포함하고 있는 한글번역문을 무시하고 다시 번역했다.-조정환)



라투르의 논의는 더 이상 신체로서의 민중이 불가능하고 의회는 물론이고 노동자들만의 평의회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하며 재현과 매개의 가능성이 새로운 조건하에 놓여 있음을 시사한다. "공산주의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추구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되어야 할 공통세계Common World가 무엇인가를 상상한 성급한 방식에 있다"(p. 29)는 단언은 이것을 증언한다. 
 

신체, 리바이어던 방식의 모임을 통한 재현의 불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중 개념은 라투르의 유령대중과 보조를 같이한다. 하지만 다중 개념은 살을 통한 새로운 몸의 구축을 전망한다.(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2부 참조) 이러한 다중 개념은 라투르가 인식하고 있는 시대 개념과 정치 개념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라투르의 물정치 개념은 다중 개념이 빠지지 말아야 할 어떤 경계선을 알려주면서 그것이 나아가야 할 침로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벗어나야 할 것은 인간주의이다. 인간, 기계, 자연 등이 물Ding로서 서로 관계하고 얽혀드는 현실에 대한 유물론적 통찰이 필요하다. 둘째로 벗어나야 할 것은 이성주의이다. 의회, 평의회의 방안은 이성에 의한 재현, 즉 이성의 궁전을 통한 재현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제 물정치적 모임은 모든 사람들이 오늘날 처해 있는 언어장애, 인지장애 등 다양한 장애에 대한 승인 위에서 그것들을 배제하기는커녕, 그 장애에 인공보철물을 장착하여 보정하는 것을 정치의 본령으로 인식하고 실천하는 태도를 요구한다. (보정이자 치유로서의 정치) 셋째 정치가 단일한 공동체의 구축으로 구심화되지 않고 다양한 아상블라주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집회들의 모임뿐만 아니라 해산의 움직임까지 모으는 Commonwealth(공통체)의 구축으로 방향잡혀야 한다. 넷째 그러므로 다중은 하나로 묶인 실체적 대중이 아니라 유령 대중으로서 구성될 수 있다. 다중이 유령대중이라면, 그 주체는 진보와 연속이라는 연속의 시간 속에 살지도 않고 혁명과 대체라는 단절의 시간 속에 살지도 않는다. 라투르는 모든 것을 동시에 다루는 일련의 동시성으로서의 동거의 공간이 바로 그 유령대중의 활동공간이라고 말한다.(p. 29) 이것은 시간에 대해서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결과적으로 어떤 진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시간의 화살이 앞으로 쏘아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화적인 것이나 혁명적인 것과 같은) 매우 단순한 동거형태로부터 훨씬 더 충만한 동거형태로, 더욱더 많은 요소들이 고려되는 동거형태로 서서히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 29; 번역은 조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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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열전, 2010년 서울의 모습을 투사하다
뉴욕열전 - 저항의 도시공간 뉴욕 이야기 아우또노미아총서 25
이와사부로 코소 지음, 김향수 옮김 / 갈무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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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maringo 님의 서평(http://blog.aladin.co.kr/mediabus/4267770)에 조정환 선생님이 엮은 글 입니다. 
원문 주소: http://amelano.net/kulturo/20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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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go 님은 『뉴욕열전』(갈무리, 2010)에 대한 서평 「뉴욕열전, 2010년 서울의 모습을 투사하다」에서 사부 코소의 생각을 읽어낼 하나의 중요한 해석틀을 제시한다. 그것은 도시재개발(젠트리피케이션)과 그것에 대한 저항의 맥락에서 『뉴욕열전』을 읽는 것이다. 이러한 독해법은 뉴욕 이야기를 현재의 서울 이야기로 흥미있게 번안할 수 있도록 한다. 용산, 두리반, 그리고 권선3지구 등은 이런 의미에서 살아 있는 뉴욕적 사건이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은 오늘 아침 한겨레 칼럼에서 "용산참사란 무엇인가. 도시 재개발이니 뭐니 하는 온갖 거짓언어를 배제하고,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이 사회의 지배층이 서민들의 생활터전과 생계수단을 강탈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참사였다고 할 수 있다." (http://is.gd/haNJh)고 직언한다.  

이 정확한 직관에서한 가지만 수정하고 싶다. 도시재개발이란 말은 거짓언어라기보다 그 자체가 수탈을 표현하는 말이다. 역사에서 개발(발전)이 착취와 수탈을 표현했듯이. 사부 코소가 바라보는 뉴욕은 원주민을 몰아내고 맨하튼을 세운 바로 그 젠트리피케이션(재개발)의 산물이다. 그리고 도시주민운동과 도시를 무대로 전개되는 다양한 사회운동들, 예술운동들은 바로 이 재개발 과정에 대한 다중의 저항을 보여주며 이것이 다른 뉴욕을 구성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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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2-23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예술과 다중 아우또노미아총서 23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심세광 옮김 / 갈무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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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에 번역된 안또니오 네그리의『예술과 다중』(갈무리, 2010)에 대한 교수대 님의 서평(「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http://blog.aladin.co.kr/706911124/group/2337759)에 대한 『예술과 다중』 기획자 조정환님의 응답입니다. 앞으로 의미 있는 대화가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문 주소:http://amelano.net/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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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자 교수대 님께

안녕하세요. 『예술과 다중』 기획자 조정환입니다.


『예술과 다중』 에 관한 님의 서평 「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는 잘 읽었습니다. 책의 설계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꼼꼼히 짚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책에 실린 네그리의 서신들이 전후 문맥을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한의 정보를 담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앞으로 판을 거듭하면서 자료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면 꼭 보강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래야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에 한결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적고 싶은 것은 내용과 관련하여 교수대 님이 지적한 것에 대해 기획자로서 제가 갖고 있는 개인적인 생각 몇 가지입니다.

첫째로 교수대 님은, 네그리가 '예술은 자본주의의 권력을 용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전근대 혹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발견되는 예술 후원자들(메 세나, 파트롱)이 오히려 '예술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실소를 머금게 했다고 평가합니다. 먼저 사소한, 그러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부터 이야기하자면 네그리는 메세나가 '예술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쓰지 않고 '예술가들이 자본의 노예로서 존재하도록 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본의 노예가 되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에 (아직) 포섭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오늘날과는 달리 임금노동자의 지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예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고 그 사실이 예술가에게 일정한 자유공간을 제공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후원자를 잃은 예술가들은 임금노동자의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예술은 자본주의 권력을 용인할 수 없는 활동이기 때문에 오늘날 '저항과 거부'가 예술의 조건이 된다고 네그리가 덧붙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본에 종속되어서 너무나도 천연덕하게 자본주의 권력을 용인하면서, 아니 그 권력에 구걸까지 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예술작품들과 예술창조의 현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생각이 '현실설명력'이 부족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네그리는 오늘날의 작품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설명하는데 자신의 시학을 바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예술의 잠재력, 예술의 가능성, 다중의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밝혀내는 데 자신의 예술론을 바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지배적인 예술상태를 설명하기보다 소수적 예술, 전복적 예술, 저항과 거부의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것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에만 예술은 자본주의 권력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문제가 더 중요하고 이 책의 논지에 비춰보면 더 핵심적인 쟁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과 노동의 연관성 문제가 그것입니다. 교수대 님은 "노동의 변화에 따른 예술의 변화에 일면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다중의 노동과 예술의 창조력을 동일시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을 함유하고 있는 주장"이라고 말하고 (네그리가) "노동과 인간활동, 그리고 예술에 관한 기괴한 벤다이어그램을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개념일 것입니다. 만약 노동을 고용노동, 임금노동, 요컨대 경제적 의미의 노동으로만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주장들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네그리는 주지하다시피 『디오니소스의 노동』(갈무리, 1997) 의 공저자이고 오랫 동안 노동운동에 종사해온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네그리가 1960~70년대에는 노동거부 운동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거부 운동의 주도자가 어떻게 예술적 경험을 '노동의 각 변형 양식에 대한 분석'으로 귀착시킬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가 예술의 창조력과 다중의 노동을 동일시할 정도로 노동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요? 네그리를 충실하게 이해하려면 이 모순 속에 눌러 앉아서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네그리가 생각하는 노동은 임금노동이나 고용노동, 말하자면 강제노동 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노동은 소외되어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 인간의 보편적 활동입니다. 거부되어야 할 것은 이 소외와 강제의 형태이고 만회되어야 할 것은 보편적 인간활동으로서의 그것의 근원적 내용입니다. 노동 개념을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다중의 노동과 예술 창조는 어떤 비약도 없이 맞물리고 (예술 창조는 그 자체가 전인적 노동의 한 형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술 창조가 다중의 노동으로, 그리고 다중의 노동이 예술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적 공간이 열리게 됩니다.

이 지평에서 보면 집단창작 혹은 창작의 집단성을 둘러싼 세 번째의 쟁점도 이 맥락에서 저절로 풀릴 수 있게 됩니다. 교수대 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그루포N의 사례를 돌아보며 그루포N의 멤버였던 만프레도에게 보낸 서신에서 네그리는 탈구축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보여준다. 자화자찬 혹은 자기가치화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루포N이 이룬 예술적 성취에 대해 자신하고 있는 네그리는 ‘생산적 긴장이 집단을 통해 현실화 될 때 가치 수준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P.100)’고 말하지만, 예술의 생산적 긴장이 집단노동의 산물일 때 비로소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부분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혹시 예술에서 엘리트주의를 청산하고자 하는 과중한 목적의식 때문에 오히려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예술 방면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천재 개념은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것이다. 물론 다중이 향유자가 아닌 창작자로도 기능했던 적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부에 국한되는 설명일 뿐, 개인의 표현력이 극대화되어 있는 현대를 예시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전체적으로 확장해서 적용할 수는 없는 이야기이다."(강조는 인용자)


 
이러한 문제제기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 창작자와 향유자의 구분, 개인이 예술의 주된 창작자이고 대중은 그 향유자라는 널리 확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지배적인 예술관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통념에 기초해서 네그리의 예술론을 읽게 되면 '만인이 천사이고 다중이 예술의 주체'라는 이 책의 핵심적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통념과의 이 충돌에 네그리의 시학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네그리의 『예 술과 다중』은 오늘날 지배적 통념이 되어 있는 예술개념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자 문제제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단편적 생각의 전개를 넘어서는 획기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향유자로만 간주되어온 다중이 곧 예술창조자이며 창작자와 향유자는 구별불가능하게 되고 있고 그래서 예술주체와 예술객체의 구분도 이제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생각을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있습니다.

네그리가 예술을 노동의 일환으로 설정했을 때 네그리는 이미 예술이 천재적 개인의 활동을 넘어 집단의 공동활동이고 집단적 산물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우리가 노동을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이며, 신체적일 뿐만 아니라 인지적인, 보편적 인간활동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예술은 이같은 노동의 한 형태라고 이해한다면 예술이 수 많은 사람들의 (나아가서는 자연과 기계의) 집단활동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어느 누구도 로빈손 크루소처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본원적으로 집단적이고 공동적이고 공통적인 활동이라는 생각은 그것이 너무나도 무시되고 망각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진실을 내포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술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적 소유관념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특히 지적재산권의 지배 하에서 예술활동은 그것의 과정적 공동성을 망각한 채 개인의 독자적 작업으로 자리매김되곤 하지만('저자' 혹은 '작가'란 말이 이 사유화에 붙여지는 이름이 아닐까요?) 이것은 공통적인 활동들을 사유화함으로서 축적하는 현대 자본주의 메커니즘 속에서 집단활동이 사적인 것으로 굴절되는 전형적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보이는 예술창작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떨까요? 영감의 포착, 아이디어의 구체화, 소재채택, 형상화, 전시나 공연, 그리고 감상과 평가..... 이 모든 과정들에서 인간적 자연적 기계적 타자들Others이 작업 속에 깃들어 있고 이 타자들 없이는 단 한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예술창작입니다. 네그리는 개인적 창작이 갖는 집단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집단성을 어떤 유보도 없이 인정했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네그리의 생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그 힘이란, 대부분의 사람들, 매체들, 큐레이터들, 평론가들, 또 예술가들이 예술로서 바라보지 않는 것들을 예술로서 인식하고 평가하고 대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예술관은 우리 삶의 집단적 생산물들을 예술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그리적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사회적 실천들, 나아가 나날의 삶 자체가 거대한 예술작품입니다. (참고로 나는 2008년의 촛불을 하나의 역동적인 예술작품으로 서술하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역사적 예술집단으로 플럭서스(fluxus) 그룹을 들 수 있습니다. 플럭서스의 예술가들은 누구나가 예술가이며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또 예술적으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네그리도 인용하고 있는) 요셉 보이스나 백남준은 이러한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는 이 관점을 좀더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 내년 초에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백남준의 예술이념을 분석한 『플럭서스』(갈무리, 2011 출간예정)라는 책을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책이 교수대 님과의 대화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 으로 잠재력에 대해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합니다. 확실히 잠재력이라는 용어는 양태 이전의 것을 지시하는 듯한 느낌을 남깁니다. 현실화를 앞두고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재력으로 번역된 puissance라는 단어는 권력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pouvoir와 대비하여 사용되는 것으로 역능, 역량, 힘, 활력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것은 양태 이전의 것은 물론이고 양태화되고 있는 것, 혹은 양태화된 것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는 힘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네그리의 책에는 다중의 예술적  잠재력에 대한 단언 외에 이 puissance가 표현된 다양한 예술양태들에 대한 분석도 나타나고 있지요.

다시 한 번 꼼꼼한 독서와 좋은 제안들과 지적들에 감사드리고 님의 건필을 바라면서 글을 맺습니다.

2010년 9월 28일
『예술과 다중』 기획자 조정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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