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다중 아우또노미아총서 23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심세광 옮김 / 갈무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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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안또니오 네그리, 『예술과 다중』

 


1.
  『예술과 다중』이라는 제목 자체를 기표로, 그리고 책의 내용 자체를 기의로 치환한다면 어떤 연결이 만들어질까. 이 책의 제목은 과연 내용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표상인가. 책을 읽은 뒤, 다소 자의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던 이 책의 제목에 대한 소정의 의문을 붙들고 이 서평을 작성하고 있음을 밝힌다.
   본문 중에 등장하는 ‘알레테이아’ -깨달음- 라는 말은 ‘등불 끄기’를 의미하는 희랍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등불을 꺼야 별을 볼 수 있고 우주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비추고 있는 등불을 끄는 일이 깨달음을 얻는 일과 상통하고 있다고 보았던 희랍인들의 사고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차(茶) 맛을 보러 누군가를 찾아갔다면 자신이 가져간 잔은 깨끗이 비운 뒤에 차를 청하는 것이 경우에 합당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아홉 편의 편지가 작성된 1988년의 예술이 보이고 있던 미학적 ․ 철학적 흐름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는 먼저 나의 무지 -플라톤 류의- 를 고백해야 한다. 기존에 이루어졌던 논의들에 대한 나의 무지와 그에서 비롯된 용어들의 문제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테면 나의 잔이 가득 차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잔을 비우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할까. 잔을 비우고 등불을 끄는 등의 수고를 할 필요 없이도 내 잔에 살고 있던 공허와 무지에 직면해 그 실체를 보았다는 사실은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소득이라고 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스스로의 무지에 대한 통렬한 일침과 작자의 독창적인 문제제기에 대한 탄복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자와의 견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던 지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어 이 서평을 이러한 의문점들을 정리하는 자리로 삼았다. 이 자리가 준엄한 비판의 자리가 되기에는 나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에 내내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글을 써내려가게 될 것 같다. 

2.
   본문에 소개 된 9편의 편지들의 발신인인 안또니오 네그리의 이력에 대한 정리를 담은 역자 서문과 부록을 편성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려 함에 있어 네그리의 삶과 경력에 대해 전혀 무지했더라면 책장을 덮었을 때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확실히 네그리의 이력은 그의 예술론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단서가 될 수 있을 만큼 명징한 것들이지만 오히려 그의 예술론을 그가 걸어온 정치적 노선이나 이력의 일부로 여기게끔 하는 역효과를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력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상이란 얼마나 서글픈 것인가. 앞서 1.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제목과 내용 사이에서 괴리를 느꼈던 것은 이 책의 내용이 예술 전반에 대한 예술가의 서술이 아니라, 예술의 제한적인 몇 가지 요소들에 대한 정치철학자의 단편적 서술로 비치는 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는가. 이것은 무엇에 관한 저술인가. 이 의문을 해소시키는 데는 네그리의 이력을 간추린 역자 서문 -상당한 분량의- 보다는 네그리와 당대의 지성인들과 나누었던 편지와 대화와 담론들에 대한 배경지식의 제공이 더 절실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서간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어지는 이유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식 수준을 쉽게 뛰어넘는 내용에 대한 개인적인 차원의 이해력 부족도 물론 작용했겠지만,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시도한 네그리의 대화 시도가 어떤 맥락을 가지고 행해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지식인들 간에 있었던 소통의 발신만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물론 그 생략된 부분을 친절히 다시 정리해 주는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이 부분은 독자를 이 소통 안으로 몰입시킬 수 있을 만큼 자세하지는 않은 것 같다. 네그리가 라울에게 쓴 편지에 대한 답신이 함께 실려있는 것처럼 네그리의 서한에 대한 답변, 혹은 네그리가 답변을 하게 된 최초의 발신이 소개되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물 밖에 나오는 고기만이 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는 J.R 톨킨의 말처럼 우리는 외부에 서게 될 때 내부에서는 발견하기 힘들었던 어떤 것들을 어렵지 않게 목도하곤 한다. 그러나 베헤모스 만큼이나 거대하기 때문에 그 외부를 허용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내부 관찰자로서의 네그리는 다소 제한된 시야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예술은 자본주의의 권력을 용인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부분, 그리고 메세나 혹은 파트롱이라고 불리는 후원자들이 오히려 예술가들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주장하는 대목 등 독자로 하여금 실소를 머금게 하는 부분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 부분에 관련해서는 후원자 없이 예술 활동을 했던 예술가나 혹은 후원자의 간섭이 예술 자체의 본질을 흐렸던 사례들의 반례를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최근의 자유로운 팬덤 문화가 창작자를 자본에 얽매이게끔 했는지 아니면 해방시켰는지에 대한 결론은 이렇게 명확하고 단순하게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예술적 경험은 노동의 각 변형 약식에 대한 분석으로 귀착’된다는 말을 통해 위력적인 문제제기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 위력은 의외성 면에서만 국한되는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예술이라는 활동에 대한 네그리의 개념 규정이 현실성을 상실한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네그리가 실바노에게 보낸 서신에 드러나 있는 ‘현실성 상실’에 대한 우려 섞인 그림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노동의 변화에 따른 예술의 변화에 일면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다중의 노동과 예술의 창조력을 동일시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을 함유하고 있는 주장이다. 노동과 인간활동, 그리고 예술에 관한 기괴한 벤다이어그램을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루포N의 사례를 돌아보며 그루포N의 멤버였던 만프레도에게 보낸 서신에서 네그리는 탈구축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보여준다. 자화자찬 혹은 자기가치화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루포N이 이룬 예술적 성취에 대해 자신하고 있는 네그리는 ‘생산적 긴장이 집단을 통해 현실화 될 때 가치 수준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P.100)’고 말하지만, 예술의 생산적 긴장이 집단노동의 산물일 때 비로소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부분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혹시 예술에서 엘리트주의를 청산하고자 하는 과중한 목적의식 때문에 오히려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예술 방면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천재 개념은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것이다. 물론 다중이 향유자가 아닌 창작자로도 기능했던 적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부에 국한되는 설명일 뿐, 개인의 표현력이 극대화되어 있는 현대를 예시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전체적으로 확장해서 적용할 수는 없는 이야기이다. 
   만일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본다면 사태의 본질은 흐려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창작자와 향유자 간의 분절을 인정한다면 누구든지 네그리가 전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대중의 창작력에 관한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다중은 주체인가, 아니면 향유자인가. 
   ‘예술적 재능을 절대적으로 개인에 귀속시킴으로써 대중으로부터 재능을 박탈하게 되는 결과가 발생(P.100)’ 한다고 보고 있는 네그리이지만, 이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천재라고 불리는 선구자적 개인에 비해 대중이 더 나은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인(萬人)이 천사’라는 말은 그 누구도 천사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엘리트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성향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이는 이 노동과 예술에 관한 논지를 뒷받침해줄 현실적 근거가 어디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술가가 아닌 학자가 말하는 예술이 공허와 직면하지 않기 위해서 이 작업은 꼭 필요하다. 이 논의에 대해서는 노동과 예술의 대응지점을 포착하는 선에서 그치고 그 내밀한 상관관계를 더 예민하게 분석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예술은 노동이었을까.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끈질긴 물음처럼, 네그리 역시 잠재력 -재능이 아닌- 이라는 말에 지나친 천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잠재’ 혹은 ‘잠재력’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가 양태로서 발현되기 이전 단계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보이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지오르지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등장하는 ‘잠재력이야말로 존재의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는 부분 등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양태 이전의 잠재력만을 가지고 성과와 측량을 말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일이 아닐까. 
   ‘추상이 삶을 포섭’하는 것과 ‘삶이 추상을 포섭’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당사자가 전자에 속하는지, 아니면 후자에 속하는지의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네그리는 거의 전적으로 옳다는 생각이 든다. ‘추상’과 ‘n번째의 자연’, ‘구성적 리얼리즘’, 그리고 ‘내부의 폭발’과 ‘육체로의 회귀’에 관련된 부분을 거치며 나는 포스트모던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해가 더욱 선연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름다움이 형식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겠느냐고 묻는 그에게 전적으로 공감하며, 1988년도의 서신을 엮은 이 책은 오늘날에도 간과하기 힘들 만큼 충만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신이 죽고, 왕이 죽었지만 자본만은 더욱 공고한 현대, 외부가 없는 자본주의의 내부 초소에 기거하고 있는 저자가 그와 동시에 예술에 관한 외부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예술가였다기보다는 정치적 지식인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그의 이력이, 또 그의 입지가 다소 불안해 보이는 것은 왜였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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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정환님의 응답:「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from 여러머리 히드라 2010-09-29 18:20 
    이 글은 최근에 번역된 안또니오 네그리의『예술과 다중』(갈무리, 2010)에 대한 교수대 님의 서평(「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http://blog.aladin.co.kr/706911124/group/2337759)에 대한 『예술과 다중』 기획자 조정환님의 응답입니다. 앞으로 의미 있는 대화가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문 주소:http://amelano.net/1817    
 
 
 
바보가 바보들에게 두 번째 이야기 김수환 추기경 잠언집 2
김수환 지음, 장혜민(알퐁소) / 산호와진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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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끄럽게만 유년을 추억하는 것만큼 미련한 일이 있을까. 하지만 책을 펴기 전 나는 한때 장차 사제가 되겠노라는 유년시절의 꿈이 떠올라 잠시 손을 움칫거려야 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끄럽다는 느낌.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래서인지 변치 않고 자신을 오롯이 지켜간 사람들의 이름은 별이 되어 세인들의 영혼을 풍족하게 하곤 한다. 사람들의 가슴을 긴 울림으로 치고 지나간 김수환 추기경의 삶 역시 별이 될 것이라고 의심치 않는 것은 비단 선종 직후 유행처럼 번졌던 추모 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진정 사람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사제가 진실로 사제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그저 간단한 말 한마디 일수도 있지만 그 말 이면에 숨겨진 진의는 다시 간단히 그 말을 넘어선다.

   처음 '바보가 바보들에게' 라는 책의 이름을 읽은 나는 제목에 어떤 중의(重義)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그렇지만 아마도 '바보가'의 바보는 그냥 단순한 의미로의 바보가 아니라 어떤 종교적인 깨달음을 얻은 사람, 즉 김수환 추기경을 지칭하는 말이며, '바보에게'의 바보는 영리한 행세를 하지만 실은 중요한 것들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리라는 내 예상은 이 책의 가장 첫 장에 적혀 있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전 말씀, ‘안다고 나대고, 대접받길 바라고, 내가 가장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의 한 줄로 인해 변명의 여지도 없이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바보는 그냥 그대로 바보일 뿐이었다. 이 책의 제목에 무엇인가 숨겨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을 품었던 나는 정말 그대로 바보가 되었다. 

  사실 우리는 바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습성이란 대체로 거북하다는 것을 이미 체험으로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지식 체계를 거부하고 조소하며 그 기반을 무참히 붕괴시키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스스로를 무지한 사람이라고 칭했던 소크라테스가 그랬고, 조조의 휘하에서 야채밭을 가꾸며 천둥소리에 놀란 척 술상 밑으로 숨어들던 유비가 그랬다. 바보를 자처하고 누군가를 가르치려 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가르치는 자로서의 책임을 크게 덜 수 있는 구실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도 잘 모르지만 이건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식의 가르침은 책임회피와 같은 맥락으로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바로 그런 면에서 세상에 널린 가르침과는 다른 파장을 가진다.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쳐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되새겨주는 그런 목소리.  이 책에 깃든 목소리는 왠지 그런 느낌이다. 굳이 어떤 부분이 마음에 와 닿더라 하는 언급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구절구절이 다 옳은 이야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작고 낮으나 숨김과 피함이 없는 목소리, 야구로 말하자면 쇼맨기질 없이 직구만을 던지는 투수라고 할까. 이 책의 제목이 진정한 겸손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만도 시간을 허비했던 내가 책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이름이 찍히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았을 것들, 너무나 사소해서 오히려 무거운 가르침들,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이 단정하게 적힌 자리를 눈으로 좇아가며 나는 아주 오랜만에 유년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사람 산다는 일은 그렇다, 당연하지만 어쩌면 아닌 듯도 하고, 언뜻 괴로운 것 같지만 한 호흡 돌이킬 시간은 나게 마련인 생. 조급하게 살아야 하는 수험생(!)이 잠시 쉬어갈 곳을 마련해 준 이 책에 작은 감사의 점을 찍고 싶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할 수는 없는 일들을 해온 분이 남긴 말씀들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렇다, 진리란 본디 아주 가볍고 간편하며 부담이 없는 것. 심오하고 고단한 진리들에 지쳐있던 대학시절, 그리고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책을 파고들던 각박한 오늘은 어쩌면 세월 지나면 한 잔 술에 안주 삼을 우스운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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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기누스의 창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허지은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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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기누스의 창 리뷰

        불멸의 근원에 대한 탐색


그리스도의 성물들 중‘롱기누스의 창’만은 유독 특별한 억양을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원탁의 기사들이 찾아 헤매던 목수의 잔(성배)을 상기할 때 분명해진다. 그것을 손에 넣은 자는 절대권력을 얻는다는 전설로 인해 군주들의 관심대상이 되어왔던 롱기누스의 창과는 달리, 성배는 어떤 세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탐색되는 것이 아니었다.1) 권력지향적 목적(?)을 가진 롱기누스의 창과 세속의 영광보다는 그리스도의 권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성배는 이 부분에서 판이한 어감을 획득하는 것인지 모른다.

무엇인가를 속에 담아 채우는 잔이 가진 수용성(受容性)은 유한한 인간의 육신에 측량할 수 없는 신성(神性)을 담았던 그리스도를 적절히 은유할 수 있겠지만, 적을 상하게 할 목적으로 울타리 밖을 향해 겨누어지는 창의 배타적 공격성은 그리스도의 원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다. 물론 십자군 전쟁이나 신구교간 종교전쟁의 발생을 설명하는 데는 더없이 훌륭한 상징이 될 것이지만.

하지만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입힌 빛깔을 지워낸 성배는 현대에 들어 모종의 변모 과정을 거친다. <인디아나 존스>에 등장한 성배는 원주민의 던전에 숨겨진 황금상과 같은 지위의 골동품으로 전락한다. 마치 전기밥솥처럼, 사람의 상처를 낫게 하는 신비한 치유력을 가진 도구로 물화(物化)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지에서 성배가 가진 의미의 현대적 변모 양상을 목도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예정하고 있는 또 다른 성물(聖物)의 현대적 의미부여를 기대하게 된다. 창끝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혈흔을 통해2) 성령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예수의 부활을 모색한다는 설정은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독자의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쥬라기 공원>에 이미 등장한 것과 유사한 유전공학적 방법들을 다시 따라가야 하는 지루함을 맛보게 된다.

이로 인해 다소 느슨해진 긴장의 끈은 임무수행 중 들이닥친 주인공의 위기와 단 한 발짝이 모자란 최후의 순간을 통해 일정 부분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위험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주인공이 겪는 고뇌와 두려움을 시작과 끝에 병렬 반복 배치한 대목에서, 어쩌면 작가는 플롯의 느슨함을 독자보다 먼저 인식하고 의도적인 장치를 통해 긴장의 고조를 모색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간단히 현금으로 구매한‘또 다른 마리아’역시 작품의 긴장을 느슨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파악할 수 있어 짧게 언급해 둔다.

불멸에는 근원이 없다. 불멸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무한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기(性器)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 남근(男根)을 상징하는 창에 꿰뚫려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한 그리스도의 역설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을 느낀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꼭 한번 거론하고 싶은 부분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배를 찌르는 롱기누스의 인간적인 고뇌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물론 이것이 성서의 다른 기록들과 일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조차 설득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롱기누스가 자랑스러운 로마 군단병의 소임마저 저버리고 싶도록 했던 형언할 수 없는 망설임. 그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작가의 실존주의적 역량은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소중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짧은 망설임의 순간으로부터 모든 서사가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교활한 인상의 유전공학자가 한국인 박이문 교수라는 것은 한국 독자들의 주의를 끌만한 것이 분명하다. 황우석 박사 스캔들의 영향이라고 보여지는데, 그 사건의 진상이 어떻든 간에 일단 한국 학자가 외국 소설에 등장하게 된 배경을 조성했다는 점에서는 유쾌한 일로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이야기 구조와 흔한 결말,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가 없다는 점에서 아쉬운 면모를 드러내고 있지만, 굳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 없이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본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찾는 독자들에게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1) 아더왕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성배를 찾으라는 주문은 비비안에 의해 탑에 갇혀버린 채 실질적인 실각을 맛본 멀린의 남긴 것이었고, 갤러해드와 퍼시발 등이 천신만고 끝에 성배를 찾아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더왕은 조카 모드레드의 모반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2) 성서에는 예수의 배를 찌른 병사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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