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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기누스의 창
아르노 들랄랑드 지음, 허지은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롱기누스의 창 리뷰
불멸의 근원에 대한 탐색
그리스도의 성물들 중‘롱기누스의 창’만은 유독 특별한 억양을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원탁의 기사들이 찾아 헤매던 목수의 잔(성배)을 상기할 때 분명해진다. 그것을 손에 넣은 자는 절대권력을 얻는다는 전설로 인해 군주들의 관심대상이 되어왔던 롱기누스의 창과는 달리, 성배는 어떤 세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탐색되는 것이 아니었다.1) 권력지향적 목적(?)을 가진 롱기누스의 창과 세속의 영광보다는 그리스도의 권위 그 자체를 상징하는 성배는 이 부분에서 판이한 어감을 획득하는 것인지 모른다.
무엇인가를 속에 담아 채우는 잔이 가진 수용성(受容性)은 유한한 인간의 육신에 측량할 수 없는 신성(神性)을 담았던 그리스도를 적절히 은유할 수 있겠지만, 적을 상하게 할 목적으로 울타리 밖을 향해 겨누어지는 창의 배타적 공격성은 그리스도의 원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다. 물론 십자군 전쟁이나 신구교간 종교전쟁의 발생을 설명하는 데는 더없이 훌륭한 상징이 될 것이지만.
하지만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입힌 빛깔을 지워낸 성배는 현대에 들어 모종의 변모 과정을 거친다. <인디아나 존스>에 등장한 성배는 원주민의 던전에 숨겨진 황금상과 같은 지위의 골동품으로 전락한다. 마치 전기밥솥처럼, 사람의 상처를 낫게 하는 신비한 치유력을 가진 도구로 물화(物化)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지에서 성배가 가진 의미의 현대적 변모 양상을 목도한 사람이라면 이 작품이 예정하고 있는 또 다른 성물(聖物)의 현대적 의미부여를 기대하게 된다. 창끝에 남겨진 그리스도의 혈흔을 통해2) 성령이 아닌 인간의 손으로 예수의 부활을 모색한다는 설정은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독자의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쥬라기 공원>에 이미 등장한 것과 유사한 유전공학적 방법들을 다시 따라가야 하는 지루함을 맛보게 된다.
이로 인해 다소 느슨해진 긴장의 끈은 임무수행 중 들이닥친 주인공의 위기와 단 한 발짝이 모자란 최후의 순간을 통해 일정 부분 보상을 받는다. 하지만 위험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 주인공이 겪는 고뇌와 두려움을 시작과 끝에 병렬 반복 배치한 대목에서, 어쩌면 작가는 플롯의 느슨함을 독자보다 먼저 인식하고 의도적인 장치를 통해 긴장의 고조를 모색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간단히 현금으로 구매한‘또 다른 마리아’역시 작품의 긴장을 느슨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파악할 수 있어 짧게 언급해 둔다.
불멸에는 근원이 없다. 불멸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무한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성기(性器)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 남근(男根)을 상징하는 창에 꿰뚫려 한 번의 죽음을 맞이한 그리스도의 역설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을 느낀다.
작품 전체를 통틀어 꼭 한번 거론하고 싶은 부분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배를 찌르는 롱기누스의 인간적인 고뇌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물론 이것이 성서의 다른 기록들과 일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조차 설득할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롱기누스가 자랑스러운 로마 군단병의 소임마저 저버리고 싶도록 했던 형언할 수 없는 망설임. 그 부분에 집중되어 있는 작가의 실존주의적 역량은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소중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짧은 망설임의 순간으로부터 모든 서사가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교활한 인상의 유전공학자가 한국인 박이문 교수라는 것은 한국 독자들의 주의를 끌만한 것이 분명하다. 황우석 박사 스캔들의 영향이라고 보여지는데, 그 사건의 진상이 어떻든 간에 일단 한국 학자가 외국 소설에 등장하게 된 배경을 조성했다는 점에서는 유쾌한 일로 받아들여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다소 긴장감이 떨어지는 이야기 구조와 흔한 결말,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근원적 문제제기가 없다는 점에서 아쉬운 면모를 드러내고 있지만, 굳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 없이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장점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본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찾는 독자들에게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1) 아더왕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성배를 찾으라는 주문은 비비안에 의해 탑에 갇혀버린 채 실질적인 실각을 맛본 멀린의 남긴 것이었고, 갤러해드와 퍼시발 등이 천신만고 끝에 성배를 찾아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더왕은 조카 모드레드의 모반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2) 성서에는 예수의 배를 찌른 병사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