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예술과 다중 아우또노미아총서 23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심세광 옮김 / 갈무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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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에 번역된 안또니오 네그리의『예술과 다중』(갈무리, 2010)에 대한 교수대 님의 서평(「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http://blog.aladin.co.kr/706911124/group/2337759)에 대한 『예술과 다중』 기획자 조정환님의 응답입니다. 앞으로 의미 있는 대화가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문 주소:http://amelano.net/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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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자 교수대 님께

안녕하세요. 『예술과 다중』 기획자 조정환입니다.


『예술과 다중』 에 관한 님의 서평 「예술의 월경(越境)과 강등 - 과연 예술은 협동노동의 산물이었는가」 는 잘 읽었습니다. 책의 설계뿐만 아니라 내용까지 꼼꼼히 짚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특히  책에 실린 네그리의 서신들이 전후 문맥을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는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구할 수 있는 한의 정보를 담아내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앞으로 판을 거듭하면서 자료나 정보를 입수할 수 있다면 꼭 보강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래야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에 한결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적고 싶은 것은 내용과 관련하여 교수대 님이 지적한 것에 대해 기획자로서 제가 갖고 있는 개인적인 생각 몇 가지입니다.

첫째로 교수대 님은, 네그리가 '예술은 자본주의의 권력을 용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전근대 혹은 근대로의 이행기에 발견되는 예술 후원자들(메 세나, 파트롱)이 오히려 '예술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주장하는 대목이 실소를 머금게 했다고 평가합니다. 먼저 사소한, 그러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부터 이야기하자면 네그리는 메세나가 '예술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고 쓰지 않고 '예술가들이 자본의 노예로서 존재하도록 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본의 노예가 되어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에 (아직) 포섭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오늘날과는 달리 임금노동자의 지위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예술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고 그 사실이 예술가에게 일정한 자유공간을 제공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후원자를 잃은 예술가들은 임금노동자의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예술은 자본주의 권력을 용인할 수 없는 활동이기 때문에 오늘날 '저항과 거부'가 예술의 조건이 된다고 네그리가 덧붙이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오늘날 자본에 종속되어서 너무나도 천연덕하게 자본주의 권력을 용인하면서, 아니 그 권력에 구걸까지 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는 많은 예술작품들과 예술창조의 현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러한 생각이 '현실설명력'이 부족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네그리는 오늘날의 작품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설명하는데 자신의 시학을 바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예술의 잠재력, 예술의 가능성, 다중의 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밝혀내는 데 자신의 예술론을 바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지배적인 예술상태를 설명하기보다 소수적 예술, 전복적 예술, 저항과 거부의 예술에 관심을 갖고 그것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에만 예술은 자본주의 권력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문제가 더 중요하고 이 책의 논지에 비춰보면 더 핵심적인 쟁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술과 노동의 연관성 문제가 그것입니다. 교수대 님은 "노동의 변화에 따른 예술의 변화에 일면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다중의 노동과 예술의 창조력을 동일시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을 함유하고 있는 주장"이라고 말하고 (네그리가) "노동과 인간활동, 그리고 예술에 관한 기괴한 벤다이어그램을 그리려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라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의 개념일 것입니다. 만약 노동을 고용노동, 임금노동, 요컨대 경제적 의미의 노동으로만 이해한다면 네그리의 주장들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네그리는 주지하다시피 『디오니소스의 노동』(갈무리, 1997) 의 공저자이고 오랫 동안 노동운동에 종사해온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네그리가 1960~70년대에는 노동거부 운동의 주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거부 운동의 주도자가 어떻게 예술적 경험을 '노동의 각 변형 양식에 대한 분석'으로 귀착시킬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가 예술의 창조력과 다중의 노동을 동일시할 정도로 노동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까요? 네그리를 충실하게 이해하려면 이 모순 속에 눌러 앉아서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네그리가 생각하는 노동은 임금노동이나 고용노동, 말하자면 강제노동 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노동은 소외되어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근본적인 의미를 갖는 인간의 보편적 활동입니다. 거부되어야 할 것은 이 소외와 강제의 형태이고 만회되어야 할 것은 보편적 인간활동으로서의 그것의 근원적 내용입니다. 노동 개념을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다중의 노동과 예술 창조는 어떤 비약도 없이 맞물리고 (예술 창조는 그 자체가 전인적 노동의 한 형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술 창조가 다중의 노동으로, 그리고 다중의 노동이 예술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적 공간이 열리게 됩니다.

이 지평에서 보면 집단창작 혹은 창작의 집단성을 둘러싼 세 번째의 쟁점도 이 맥락에서 저절로 풀릴 수 있게 됩니다. 교수대 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그루포N의 사례를 돌아보며 그루포N의 멤버였던 만프레도에게 보낸 서신에서 네그리는 탈구축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지나친 신뢰를 보여준다. 자화자찬 혹은 자기가치화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루포N이 이룬 예술적 성취에 대해 자신하고 있는 네그리는 ‘생산적 긴장이 집단을 통해 현실화 될 때 가치 수준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다(P.100)’고 말하지만, 예술의 생산적 긴장이 집단노동의 산물일 때 비로소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부분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혹시 예술에서 엘리트주의를 청산하고자 하는 과중한 목적의식 때문에 오히려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실 예술 방면의 엘리트주의라고 할 수 있는 천재 개념은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것이다. 물론 다중이 향유자가 아닌 창작자로도 기능했던 적이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부에 국한되는 설명일 뿐, 개인의 표현력이 극대화되어 있는 현대를 예시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전체적으로 확장해서 적용할 수는 없는 이야기이다."(강조는 인용자)


 
이러한 문제제기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 창작자와 향유자의 구분, 개인이 예술의 주된 창작자이고 대중은 그 향유자라는 널리 확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지배적인 예술관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통념에 기초해서 네그리의 예술론을 읽게 되면 '만인이 천사이고 다중이 예술의 주체'라는 이 책의 핵심적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통념과의 이 충돌에 네그리의 시학이 갖는 역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네그리의 『예 술과 다중』은 오늘날 지배적 통념이 되어 있는 예술개념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자 문제제기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단편적 생각의 전개를 넘어서는 획기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향유자로만 간주되어온 다중이 곧 예술창조자이며 창작자와 향유자는 구별불가능하게 되고 있고 그래서 예술주체와 예술객체의 구분도 이제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근본적으로 혁신적인 생각을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있습니다.

네그리가 예술을 노동의 일환으로 설정했을 때 네그리는 이미 예술이 천재적 개인의 활동을 넘어 집단의 공동활동이고 집단적 산물이라고 말한 셈입니다. 우리가 노동을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이며, 신체적일 뿐만 아니라 인지적인, 보편적 인간활동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예술은 이같은 노동의 한 형태라고 이해한다면 예술이 수 많은 사람들의 (나아가서는 자연과 기계의) 집단활동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어느 누구도 로빈손 크루소처럼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본원적으로 집단적이고 공동적이고 공통적인 활동이라는 생각은 그것이 너무나도 무시되고 망각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진실을 내포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예술이라고 해서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적 소유관념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특히 지적재산권의 지배 하에서 예술활동은 그것의 과정적 공동성을 망각한 채 개인의 독자적 작업으로 자리매김되곤 하지만('저자' 혹은 '작가'란 말이 이 사유화에 붙여지는 이름이 아닐까요?) 이것은 공통적인 활동들을 사유화함으로서 축적하는 현대 자본주의 메커니즘 속에서 집단활동이 사적인 것으로 굴절되는 전형적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보이는 예술창작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떨까요? 영감의 포착, 아이디어의 구체화, 소재채택, 형상화, 전시나 공연, 그리고 감상과 평가..... 이 모든 과정들에서 인간적 자연적 기계적 타자들Others이 작업 속에 깃들어 있고 이 타자들 없이는 단 한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예술창작입니다. 네그리는 개인적 창작이 갖는 집단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집단성을 어떤 유보도 없이 인정했고 또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네그리의 생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그 힘이란, 대부분의 사람들, 매체들, 큐레이터들, 평론가들, 또 예술가들이 예술로서 바라보지 않는 것들을 예술로서 인식하고 평가하고 대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데 있습니다. 개인주의적 예술관은 우리 삶의 집단적 생산물들을 예술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그리적 입장에서 보면 우리의 사회적 실천들, 나아가 나날의 삶 자체가 거대한 예술작품입니다. (참고로 나는 2008년의 촛불을 하나의 역동적인 예술작품으로 서술하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역사적 예술집단으로 플럭서스(fluxus) 그룹을 들 수 있습니다. 플럭서스의 예술가들은 누구나가 예술가이며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또 예술적으로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네그리도 인용하고 있는) 요셉 보이스나 백남준은 이러한 생각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는 이 관점을 좀더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 내년 초에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백남준의 예술이념을 분석한 『플럭서스』(갈무리, 2011 출간예정)라는 책을 출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책이 교수대 님과의 대화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유익한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 으로 잠재력에 대해서 한 마디 덧붙이고자 합니다. 확실히 잠재력이라는 용어는 양태 이전의 것을 지시하는 듯한 느낌을 남깁니다. 현실화를 앞두고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재력으로 번역된 puissance라는 단어는 권력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pouvoir와 대비하여 사용되는 것으로 역능, 역량, 힘, 활력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용어입니다. 그것은 양태 이전의 것은 물론이고 양태화되고 있는 것, 혹은 양태화된 것까지 포함하여 다양한 양태로 나타나는 힘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네그리의 책에는 다중의 예술적  잠재력에 대한 단언 외에 이 puissance가 표현된 다양한 예술양태들에 대한 분석도 나타나고 있지요.

다시 한 번 꼼꼼한 독서와 좋은 제안들과 지적들에 감사드리고 님의 건필을 바라면서 글을 맺습니다.

2010년 9월 28일
『예술과 다중』 기획자 조정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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