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즈믹 - 세기말 탐정신화 JDC 월드
세이료인 류스이 지음, 이미나 옮김 / 비고(vigo)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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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4년 새해, 일본의 언론사와 경찰청, JDC(Japan Detective Club)에 일제히 ‘범죄예고장’이 수신됩니다.

‘올해 1200개의 밀실에서 1200명이 살해당한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밀실경‘

그리고, 정말로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합니다.
수만 군중 한가운데서, 달리는 택시 안에서, 신칸센 화장실에서, 스키장 곤돌라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 ‘밀실경’은 자신의 약속대로 하루에 3~4명을 참수합니다.
무작위의 범행 장소와 시간, 불가능한 방법, 사라진 흉기, 불특정의 희생자,
‘연쇄’가 아닌 ‘연속’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의 ‘무차별 살인’

이 전대미문의 연쇄 살인사건에 경찰과 일본 최고의 탐정집단 JDC는 속수무책으로,
일본 전역은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게다가 영국에서도 자신을 ‘잭 더 리퍼’의 현신이라 자처하는 ‘재키 더 리퍼’가 하루에 4명을 토막 살인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영국을 합쳐 하루에 7~8명, 한 달이 지속된다면 무려 2백여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상황.

사건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JDC 총재이자 전세계에 7명뿐인 S급 탐정 ‘아지로 소지’에게 ‘1200년 밀실전설’이라는 제목의 원고가 도착합니다.
그 내용은, 과거 일본의 헤이안, 에도 시대에도 밀실연속살인사건과 같은 사건이 존재했었다는 것.
그렇다면 밀실경은 이 사건의 모방범인 걸까요?

영국의 ‘재키 더 리퍼’가 과거 ‘잭 더 리퍼 사건’의 모방범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미스터리인 이 사건들은 전세계인들에게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계 곳곳에서 수천명이 살해당하는, ‘코스믹(우주적)’ 스케일의 재앙으로 다가옵니다.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이 우주적 재해에 대항하여 JDC은 과연 밀실 트릭을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본서는 1996년 출간 당시 호황기였던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발표 즉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내에서 ‘역사상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포스트모더니즘 장르 문학’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전위적인 스타일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10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과 비범한 목차 구성, ‘밀실 #’라는 소제목을 달고 기상천외하다 못해 창의적이기까지 한 수십 가지 밀실 살해 방법을 디테일 하게 묘사한 사건 일지, 소설 중간에 뜬금없이 삽입된 것처럼 느껴지는 일본 전통 시들, 소설의 말미의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당신은 사건의 진상을 절대 파악하지 못할’거라는 ‘도발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에 대한 상식과 그 궤를 매우 달리합니다.
또한 전통 장르 문학의 기법을 벗어나서 독창적이다 못해 파격적이기까지 한 ‘막 나가는’ 세계관과 스토리, 쉴 틈없이 나오는 언어유희와 고난이도의 암호 해독, 격투 게임 캐릭터처럼 추리와 관련된 낯간지러운 이름의 ‘고유 스킬’을 가지고 있는 주요 등장인물들-예컨대, 전화로 여러 사건들을 동시에 해결하는 ‘전화 탐정’, 사건 해결에 필요한 데이터가 모두 취합 되면 즉시 진상을 깨닫는 ‘신통이기’, 객관적인 데이터와 통계로 추리하는 ‘통계탐정’, 잠재의식 탐구를 통한 하늘의 계시를 받는 ‘잠탐추리’-등은 이런 류의 소설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건의 해결’만큼은 명확하다는 사실입니다.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결말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어떤 트릭이 사용되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각양각색의 밀실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만큼은 모든 독자가 합심하여 ‘유레카’를 외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1천 페이지를 읽은 수고에 대한 보상, 넘쳐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일본에서 환생한 제임스 조이스가 쓴 ‘라이트노벨 버전 피네간의 경야’와도 같은 이 소설, 읽어보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은 절판되어 도서관 대여를 통해서만 보실 수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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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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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p. 88)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p .101)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음을. (p.254)

<우리의 기억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야기의 배경은 1960년대 영국입니다.

주인공 토니는 1960년대 영국의 남학생인데, 같은 학교 두 명과 절친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나이대에 흔한,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따위의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지적 허영심이 가득한 무리였죠.

그러다 전학생 ‘에이드리언’이 패거리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진짜배기 천재였고, 주인공을 포함한 모두가 그를 부러워하고 인정했습니다.

학창 시절과 그들의 허세가 함께 끝나고,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성적이 우수했던 에이드리언은 케임브리지 대학생이 되었죠.

토니는 대학교에서 여친 베로니카를 사귀게 되고,
외딴곳에 있는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여친의 가족과의 어색한 주말을 보냅니다.

토니에 대한 가족의 태도는 결코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지만, 토니는 잘 대응합니다.

이후 토니와 베로니카는 섹스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다툼 후 헤어짐이라는 흔한 연인관계의 결말을 맞이하고,
몇 년 후 토니는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되냐는 편지를 받습니다.

토니는 상처받았지만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둘을 인생에서 지워버리죠.

그러던 어느날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유서에 ‘자유인은 자신의 삶의 본질을 탐구할 철학적 의무가 있으며, 또한 그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적었고, 토니는 그의 결단에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드넛 토니는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 하나를 낳고 노인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인생이었습니다. 죽은 베로니카의 어머니로부터 현금 500파운드와 두 개의 문서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 문서는 하나는 그녀의 토니에 대한 사죄의 편지, 다른 하나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었습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일평생 단 한번 만났던 딸의 남자친구에게 이런 유산을 남긴 걸까요?

토니는 필사적으로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결국 베로니카와 만날 결심을 합니다.

토니의 일생은 그의 회고와 달리 무언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노력하지 않으면 정확히 떠올리지 못하는 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거짓되고 왜곡되기 쉬운지 잘 알 수 있는 소설입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충격적인 반전과 묵직한 울림이 있는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입니다.

#예감은틀리지않는다 #thesenseofanending #줄리언반스 #다산책방 #소설 #문학 #영국문학 #책 #책리뷰 #책읽기 #독서 #독서리뷰 #서평 #내돈내산 #도란군 #도란군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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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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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는 한숨을 쉬고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천천히 떨어졌다. 이 사람들이 괴동물들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그를 이해하는 일에 괴동물들보다 관심이 적다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아요.” 오필리아는 강조하는 뜻으로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들은 어차피 자기들 마음대로 결론을 내릴 거고, 오필리아는 거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터였다.  (p .419)

오필리아는 걱정하지 않았다. 가끔 30년 뒤 머나먼 곳에서 로사라와 바르토가 극저온 수면에서 깨어났을 때, 그에 관한 어떤 비전의 이야기를 듣게 될지 궁금해하기는 했다. 수송 중에 죽었다고 듣게 될까….. 아니면 이곳에 남아 유명해졌다고 알게 될까? 어느 쪽이든 유쾌한 농담이었다. 그는 한때 계획했던 대로 혼자 죽지는 못했지만, 웃음 지으며 죽었다. (p. 493)

오필리아는 근미래의 인류 기업이 우주 이곳저곳에 개발한 콜로니 중 하나에 젊었을 때 이주하였고, 행복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남편과 자식의 상실을 버티고, 남은 자식을 헌신적으로 키워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소박하지만 평생을 살아 정이 든 집과 정원을 관리하며 평온한 죽음을 맞을 당연한 권리가-사랑하지만 무능력하고 밉살맞은 아들과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 며느리와 함께라고는 하지만-있었습니다. 콜로니 관리 기업이 사업권을 잃게 되어 새로운 행성으로의 이주 계획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젊지 않고, 남성이 아니며 출산을 하지 못하는 자신은 이주할 때 오히려 비용을 내야 하며, 늙었기 때문에 이주 중에 들어가야 하는 극저온 탱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아주 조금은 자식-어머니를 사랑하지만 함께 이주하기 위한 비용 부담을 걱정하는-을 위해,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꺼이 잔류 인구가 되어 평생을 살았던 콜로니에서 생을 마감하겠다고 마음먹고, 이 계획을 실행하게 됩니다. 그는 혼자 누리기에 충분한 자원과 시설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복하게 삶을 즐깁니다. 외롭고 무서울 법도 한데 말이죠. 그런데, 오로지 자신만 사는 것으로 알고 있던 콜로니는 사실 이전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지성체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 자생종은 인류가 떠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오필리아가 홀로 살고 있는 콜로니로 접근합니다.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죽음을 맞기로 결심한 오필리아에게 찾아온 뜻밖의 손님을 맞게 된 오필리아. 그녀의 잔류인생은 과연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요?

소설을 만들고자 하는 이에게 ‘SF’는 정말이지 훌륭한 도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전개나 상황 등을 통해 서사의 긴장감을 극대화 시켜 주거든요. 예를 들면 현실에서는 기껏해야 몇 십년 사이의 이별 또는 재회만이 가능하지만, SF에서는 이 간극을 수천년, 아니 수십만 년까지 벌릴 수 있습니다. 요지는 비극은 더 슬프게, 희극은 더 기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만약 주인공이 현실 지구의 오필리아라면 그의 자유를 향한 강한 의지는 정말로 큰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이란 고작해야 가출 후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사는 것뿐이었을 테니까요. 그마저도 같은 인간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 말이죠. 그러나 잔류 인구의 오필리아는 진정하게 홀로,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정도 스토리만 되도 진취적인 여성상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데, 거기에 지성을 가진 외계 종족과의 만남도 모자라, 그들과 진정으로 교감하여 인류의 성공적인 퍼스트 컨택트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는 영광까지 누라다니. 이게 바로 진정한 페미니즘이자 남성들까지도 우러러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진정한 히로인이죠.

또다른 위대한 SF 작가, 모두가 SF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면 그 첫번째가 될 것이라 말한 어슐러 K. 르 귄이 오필리아를 ‘SF 소설계가 이제껏 알고 있던 여성 히로인 가운데 가장 그럴듯하다라고 극찬했다는 말로 이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70대 여성 노인의 일대기, 어서 만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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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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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SF문학의 오래된 팬인 저에게 듀나를 위시한 1세대 한국 SF 작가인 김보영은 친숙한 이름입니다. 그가 저에게 '친숙한'에서 '최애'인 작가로 격상한 것은 읽는 내내 충격에 휩싸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던 '종의 기원담'인데, 이후로 읽지 못한 김보영의 소설들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래빗홀클럽 5월 도서가 김보영 소설집이라니, 이런 기쁜일이 저에게 일어나다니!

저는 개인적으로 '뛰어난 스토리보다 더 뛰어난 세계관 내지는 설정'을 SF 장르문학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데, 김보영의 소설은 이런 저의 취향을 잘 만족시키는데, 이 소설집은 더할 나위 없는 'SF 맛집'입니다. 어떤 작품을 고르더라도 독자를-장르문학 독자가 아니더라도-만족시키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래빗홀클럽 미션은 '문장 교환'이니 이 이상의 서평은 생략하고 '고래눈이 내리다'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을 공유합니다.

“우리 인생도 선택으로 가득해. 하지만 그래봤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평생 갈 수 있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국 안전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영웅적인 선택도 바보스러운 선택도 할 수가 없어. 원하지 않는 길을 어쩔 수 없이 가야 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다 자신의 인생에서 소외되는 거야……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아. 선택지가 나타났을 때 알게 되는 거야. ‘나는 저 모든 길을 다 갈 수 있겠구나.’ 세계의 이면을 다 보고, 모든 가능성의 경로와 결과를 다 볼 수 있겠구나…… 그걸 알게 되는 순간 내 게임을 하는 사람은 세계의 주인공이 되는 거야. 그게 바로 게임이야. 그게 진짜 게임 시나리오라고.” (p. 46, ‘저예산 프로젝트’)

늘 바라마지않았다. 이런 풍경이 너의 결말이기를. 같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수다를 떨고, 따듯하고 푹신한 곳에 편히 누워 고요함 속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기를. 너의 결말이 안온함 가운데 찾아오기를. 그렇게 뚝 끊긴 너의 이야기에 내가 지금 만든 이 작은 결말을 덧붙이는 것으로 위로받을 수 있기를. 그렇게 너의 새 결말을 같이하는 것으로 또한 내 이야기를 다시 마무리하기를. (p.109, ‘껍데기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는요, 내 가족이 있으니까 존재해요. 나 혼자서는 살아 있어봤자 산 게 아니에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 나는요, 내 동생들이 보기에만 살아 있으면 돼요. 내가 지금 좀비면 어때요? 나는 그 애들에게 밥을 먹여주는 대단한 좀비예요. 그럼 이 좀비는 존재해야죠. 내가 살아 있는게 중요하냐고요? 아뇨, 하나도, 조금도 안 중요해요. 나는요, 가족이 살아 있는 게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해요." (p.139,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나는 역장에 둘러싸인 채 제주공항 전송기에서 나타났다. 전신이 땀에 푹 젖어 옷이 축축했다. 숨은 헐떡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전송기는 내 단내까지 복사했다. 나는 ‘나’를 인지할 수 있었고,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느꼈다. 내게는 주관이 있었고 그 주관은 내가 영혼을 가진 존재처럼 느끼게 했다. 나는 죽음을 기억할 수 없었고 삶만을 기억했다. 전송기는 어떻게 영혼을 만들어내는 걸까? 하긴, 신 앞에서 엄마 뱃속에서의 열 달과 순간에 차이가 있겠는가? 둘 다 신에게는 찰나의 숨결에 불과한 것을. (p. 158,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나는 내 이어진 죽음을 생각했고 이어진 생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죽음 속을 걷고 있든 생명 속을 걷고 있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답고 살아 있는 것들은 눈부시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니….. (p.165, ‘느슨하게 동일한 그대’)

그날, 내 모듈 한쪽이 열렸다. 국가기관에서 내 제어센터에 강제로 접속해 벌인 일이었다. 초기 거주구들은 기본적으로 탑재해야 했던 군사 모듈에 숨어 있던 생화학 미사일이 지상으로 낙하했다. 표토 위에 덮여 땅을 굳게 하고, 맹독을 살포하고, 식물을 말려 죽이고, 벌레들을 떼죽음당하게 하고, 바다에서 물고기가 섬처럼 떠오르게 하는 포탄이. 향후 수십 년간 반경 10킬로미터 이내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게 하는 포탄이. (p.252, ‘귀신숲이 내리다’)

어린 날에는 내 아픔이 다 밖에서 온 줄 알았다. 내가 본래 가진 것은 다 좋고 빛나는 것뿐이고 내게 있는 어둠은 다 세상이 주었다 믿었다. 하지만 어쩌면 슬픔은 처음부터 내 생명에 깃들어 있었으리라.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심장에 가시를 박고 태어나는 모양이다. 아리고 쓰라리고 서러운 것이 애초에 내 영혼에 깃들어 있었고 단지 너처럼 좋은 인연이 있어 보듬고 달리주었ㅇ르 뿐이더라. (p.269, ‘ 봄으로 가는 문’)

* 이 글은 도란군의 서재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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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관하여
베레나 카스트 지음, 최호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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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관계의 양면성은 무엇보다도 헌신과 개별화의 양면성인 것이다. 이런 양면성을 억누르면, 따라서 또한 우리의 분리 공격성을 억누르면 관계는 우리에게 훨씬 더 위험하게 작용할 것이다. 또한 관계 자체가 훨씬 더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독립성이 사라진 공생 관계에 빠지거나, 이런 친밀감과 거리감의 끊임없는 수정이 없으면 어느 날 갑자기 이별의 위험에 직면할 것이다. 이런 친밀감과 거리감의 양면성은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상실 불안의 토대를 이룬다. (p. 236)

이런 분리 불안에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결국 공허함과 지루함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면 불안감에 휩싸인다. 또는 존재가 부정되고 무가치해지는 것에 대한 커다란 불안과 절망감이 꿈틀댄다. (p. 266)

이 통합과 거리 두기의 단계에서는 더 이상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우리는 인간이 작별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살기 위해 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이미 통합 단계에 있다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여전히 초기 관계의 강렬함이 남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작별하는 존재란 삶이 죽음을 포함하므로 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p. 283)

현대인에게 불안은 통제 불가능한 상수와도 같습니다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평안(平安)의 최소한의 전제조건인데, 우리는 대부분 무언가를 하거나, 누군가와 함께 있어 이 상태를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모바일 기기의 발전은 우리를 온종일 일종의 불안 중독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 세상엔 어찌나 사건사고가 많은지, 이 모든 일이 나한테도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으로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되는 것-아니면 잠깐만 보려던 쇼츠를 두 시간 동안 보다 후회에 빠진다던지-이죠. 이처럼 현대인의 만성질환이 되어버린 불안은, 그러나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중에 나온 수많은 처방은 이미 불안이 패시브 스킬로 장착된 사람에게 사후약방문에 불과합니다. 이럴 때에는 근본적인 접근법이 필요합니다.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이것의 정체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죠. 불안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걸까요?

불안에 관하여는 카를 융 심리학 권위자이자 심리 치료사인 베레나 카스트 교수의 저작으로, 무려 15판까지 출간된 불안 심리학의 고전입니다. ‘우리는 왜 불안한가?’에서 출발하는 이 책은, 불안을 인간이 아플 때 생기는 증상으로 정의합니다. , 불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 보내는 위험 신호라는 것이죠. 우리가 느끼는 불안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상태-외모, 직업, 심리 등 내외면 전반에 대한-불안, 나의 불행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타인과의-가족 등의 정서적으로 가까운 이들을 포함한-관계에 대한 불안 등은 방치하면 우리를 불안병에 걸리게 만들고,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데미지를 입히게 되는 것이죠. 또한 불안은 정신분석학 관점에서 무의식의 측면에서 그 원동력을 분석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불안이 초래하는 신체적, 심리적 상태나 불안으로 인한 장애도 각양각색입니다. 저자는 불안을 해소하는 여러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불안에 맞서는 자세,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불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불안이 전달하는 감정적 신호에 주모하고 이에 따른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불안을 다스리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써 머리맡에 꼭 두어야할 필수재와도 같습니다. 누구든 불안하지 않은 자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불안을 품고 보듬어 우리 모두가 희망의 바다에서 유영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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