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유전자
리처드 도킨스 지음, 야나 렌조바 그림, 이한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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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능동적 원인'이야말로 유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선택을 통한 진하가 일어나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생물에게 쓰 이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생물을 이용한다. 유전자는 생물을 임시 탈것으로 이용 이용하며, 미래 세대로 옮겨가는 수단으로 삼는다. 이는 사소한 견해 차이, 결코 단순한 단어 게임이 아니다. 근본적인 차이다. 중요한 문제다' (p.244)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및 동물행동학자, 유명 과학저술가, 유전자(gene)과 같이 세대를 이어 전해지는 문화/사회적 단위 ‘밈(Meme)’의 창시자, 진화론의 기수, 신다윈주의의 선봉장, 다윈의 롯트와일러(투견), 창조론자의 재앙, 전투적 무신론/회의론자…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한명인 리처드 도킨스의 이 많은 수식어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다윈의 롯트와일러(투견)’입니다.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어언 200여년, 교황청조차 인정한 진화론과 아직도 기싸움 중인 창조론자들을 말 그대로 ‘흠씬 두들겨 패는’ 통쾌한 그의 글빨은 언제 봐도 유쾌/상쾌/통쾌하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진 신’에서 이 기분을 더욱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창조론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원수인 존재인데, 막상 본인은 ‘자신은 공격적이지 않으며,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니까 대응할 수 없는 상대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것일 뿐’이라는 광역 도발을 했었죠. 심지어 그는 같은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와도 진화에 대한 각론이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 대립각을 세우며 그를 대차게 깠습니다. (물론 그들은 상호 발전적인 관계의 좋은 학계 동료이기도 했죠)

도킨스는 진화론의 영역에서도 매우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자연선택이 유전자 수준에서 작용하며, 진화는 거의 일정한 속도로 일어나고, 생명체가 획득하는 형질 대부분이 자연에 적응한 결과라는 것이죠. 최근에 주류 인터넷 ‘밈’으로 자리잡은 ‘유전자 만능론’과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는 무려 40년도 전에 생명체는 유전자의 탈것이며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한 생존 기계에 불과하다고 설파했습니다. 지금 보아도 여전히 급진적인 이 주장이-동시에 창조론자들의 부아를 치밀게 만드는-당시에는 얼마나 파격이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다윈 생전의 사람들이 ‘인류가 원숭이의 조상’이라는-진화론의 대한 오해와 무지로 빚어진 촌극-것에 충격을 받았던 것과 동일한 수준의 주장이죠. ‘인간은 유전자의 노예!’

이렇듯 평생을 저작과 강의 등을 통해 진화론 진영의 선봉에서 활발히 활동해왔던 리처드 도킨스가 최근에 신작 ‘불멸의 유전자’을 출간하였습니다. 만년이 되어 덜 공격적이 된 것인지, 그는 이 저작을 관통하는 대표적인 키워드를 ‘생존 기계’, ‘탈 것’ 등의 자극적인 표현이 아닌 ‘사자의 유전서(genetic book of the dead)’라는 멋진 용어로 설정합니다. 그는 그간의 주장을 요약 발전시켜, 생명체는 자연선택에 의해 아직 쓰여지고 있는 한 권의 책으로서, 이 책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쓰임이 없지만 한때 조상들이 가졌던 유전자가 기록된 유전자 역사의 보관소이자, 미래는 과거나 현재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가정하에 후손에게 남겨질 미래의 유전자의 예측서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도킨스는 그간의 저작에서 펼쳤던 여러 주장들을 종합하는 차원에서 이 책을 쓴 듯하며, 여전히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문체와 새로운 시각과 비유, 주장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생물의 사례, 이해를 돕는 유려한 일러스트는 이 책을 가히 ‘도킨스 저작의 끝판왕’이라고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아이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을 해봤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사자의 유전서’를 물려주었고, 그럼으로서 진정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라구요? 그러면 이 책을 꼭 읽어보세요.

* 이 글은 도란군의 서재 네이버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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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택시에서 우주가 말을 걸었다
찰스 S. 코켈 지음, 이충호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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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평단에 선정되어 주관적으로, 그러나 진심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만약 모든 종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페르미 역설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다. 이 모든 편집증적 종들은 소리를 내면 재앙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접촉을 시도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진짜 재앙이 된다. 심지어 접촉할 능력이 있는 종조차도 접촉을 시도하지 않아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두려움 때문에 고독을 선택하게 된다. 설령 이것이 진짜 역설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비극적인 아이러니이다.’ (p.183, ‘제9장 우리는 외계인 동물원의 전시 동물인가?’)

‘따라서 사회에 끔찍한 독재자가 나타나면, 용감한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거나 혁명을 모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배 집단이 공기 자체를 통제하면, 저항할 능력을 사실상 잃게 된다. 산소의 통제권을 무기로 억압적 정치를 펼치는 지배 집단에 시민이 저항하면, 지배 집단은 형식적인 사과와 함께 저항하는 사람에게 달 표면에서 1~2초간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밀폐된 문을 열어 주겠다고 제안할 수 있다.’ (p.260, ‘제13장 우주에는 독재 사회가 넘쳐날까, 자유 사회가 넘쳐날까?’)

‘그 진실이란, 다른 생명체가 아무리 맹목적인 삶을 영위하더라도, 그런 삶을 지속할 권리가 있다는 신념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의 선천적 겸손이 빛을 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령 미생물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화성의 생물권 전체를 파괴하는 것은 매우 나쁜 인간성의 표출이며, 우리 자신에게서 보고 싶지 않은 잔인한 본성이 반영된 행동이다.’ (p. 288, ‘제14장 미생물도 보호할 가치가 있을까?’)

세기말의 과거로 가봅시다. 이공계 대학생인 당신은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초여름 한낮의 에어컨도 없는 유난히 더운 강의실, 그날따라 유독 느릿한, 눌변에 가까운 교수님의 말씀, 아침을 굶어 폭식한 탓에 꽉 찬 당신의 위장, 너무나도 어려운 전공 강의 등은 당신의 의식에 무자비한 연속 타격을 꽂아 넣습니다.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눈은 자꾸 감기고 고개는 위아래로 끄덕거리다, 결국 얼굴을 책상에 완전히 밀착시키는 것으로 졸음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려는 찰나, 교수님의 일갈에 정신이 번쩍 트이고 난 후 속으로 이렇게 되뇌입니다. ‘재미있게 강의하는 교수님을 원해…’

독자가 전공 교양 서적을 읽는 이유는 (나를 만족시키는) 지적 성취감 또는 (타인을 만족시키기 위한)지적 허영을 위함이므로, 가독성은 이런 류의 책의 필수 덕목입니다.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유발 하라리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사회∙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저자들의 공통점이기도 한 이 덕목은 학자-이자 대부분 교수이기도 한-들이 갖추기 매우 힘든 것 중 하나입니다. 서두의 세기말의 이공계 대학생이 겪었던 교수와 같은 이들이 대부분이죠. 그런데 오늘 소개할 책을 쓴, 무려 애든버러 대학의 ‘우주 생물학’을 가르치는 이 교수님은 과학 분야 교양 서적을 즐겨 읽는 제가 감히 보증하는, 이 ‘덕목’을 갖춘 사람입니다. 거기에 주제가 ‘우주와 외계인’이라니, 치트키 아닙니까?

우주 생물학자인 찰스 S. 코켈 교수는 어느날 택시 기사에게 ‘외계인 택시 기사가 있을까?’라는 엉뚱하고 사소한 질문을 받게 됩니다. 우주 연구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그는 이 질문을 한 택시 기사와 대화를 주고 받다 전문가인 자신조차 이런 의문을 가져 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범한 사람들의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한 책을 쓰기로 결심합니다. 일반 대중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여정의 전문 가이드를 자처한 것이죠. ‘외계인 택시 기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주 어딘가에 외계인이 존재해야 하며, 이들의 과학 기술, 문화, 가치관, 체제 등의 ‘문명’ 수준은 적어도 인류 이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주의 규모에 비추어 본다면 어딘가에는 ‘가-ㄷ툣그-ㅇ’을 운전하는 ‘즛틍-ㅎ쬻콰-ㅅ’이라는 이름의 ‘햭-ㅅ-약ㄷ툣그-ㅇ’이 존재할 수 있겠죠. 어떤 형태로든 말입니다. 이 질문에 답한 저자는 내친 김에 다른 질문에도 답하기로 합니다. ‘외계인의 침공’, ‘화성 여행’, ‘화성 테라포밍’, ‘생명 기원’과 같이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궁금했던 것에 대해서 말이죠.

이 책이 과학 교양서로써 훌륭한 점 중 하나는 ‘점진적인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의 수준이 ‘초보적’이기 때문에, 답변의 시작도 ‘초보적’일 수 밖에 없는데, 저자는 노련한 글솜씨로 답변의 수준을 점진적으로 끌어 올림으로서 독자들의 이해력을 높은 수준으로 제고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농담 따먹기 좋아하는 삼촌’ 모드로 펼쳐지는 명망 높은 과학자의 최고 수준의 강의는 여러분을 우주와 생명이라는 지적인 바다 탐험의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우주 어딘가에 틀림없이, 당신처럼 외계인 ‘인류’의 존재를 궁금히 여기는 외계인과 이 외계인을 위해 책-‘쿟갸’ 또는 ‘췩-ㄱ’, ‘븃’ 등등으로 불리는’을 쓴 외계인 과학자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서평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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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즈믹 - 세기말 탐정신화 JDC 월드
세이료인 류스이 지음, 이미나 옮김 / 비고(vigo)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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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4년 새해, 일본의 언론사와 경찰청, JDC(Japan Detective Club)에 일제히 ‘범죄예고장’이 수신됩니다.

‘올해 1200개의 밀실에서 1200명이 살해당한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밀실경‘

그리고, 정말로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당합니다.
수만 군중 한가운데서, 달리는 택시 안에서, 신칸센 화장실에서, 스키장 곤돌라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 ‘밀실경’은 자신의 약속대로 하루에 3~4명을 참수합니다.
무작위의 범행 장소와 시간, 불가능한 방법, 사라진 흉기, 불특정의 희생자,
‘연쇄’가 아닌 ‘연속’이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의 ‘무차별 살인’

이 전대미문의 연쇄 살인사건에 경찰과 일본 최고의 탐정집단 JDC는 속수무책으로,
일본 전역은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게다가 영국에서도 자신을 ‘잭 더 리퍼’의 현신이라 자처하는 ‘재키 더 리퍼’가 하루에 4명을 토막 살인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영국을 합쳐 하루에 7~8명, 한 달이 지속된다면 무려 2백여명의 사망자가 나오는 상황.

사건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JDC 총재이자 전세계에 7명뿐인 S급 탐정 ‘아지로 소지’에게 ‘1200년 밀실전설’이라는 제목의 원고가 도착합니다.
그 내용은, 과거 일본의 헤이안, 에도 시대에도 밀실연속살인사건과 같은 사건이 존재했었다는 것.
그렇다면 밀실경은 이 사건의 모방범인 걸까요?

영국의 ‘재키 더 리퍼’가 과거 ‘잭 더 리퍼 사건’의 모방범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미스터리인 이 사건들은 전세계인들에게 과거부터 현재까지 세계 곳곳에서 수천명이 살해당하는, ‘코스믹(우주적)’ 스케일의 재앙으로 다가옵니다.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저지른 것으로 보이는 이 우주적 재해에 대항하여 JDC은 과연 밀실 트릭을 밝혀내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본서는 1996년 출간 당시 호황기였던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발표 즉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 내에서 ‘역사상 최대의 문제작’으로 꼽히는, ‘포스트모더니즘 장르 문학’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전위적인 스타일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10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과 비범한 목차 구성, ‘밀실 #’라는 소제목을 달고 기상천외하다 못해 창의적이기까지 한 수십 가지 밀실 살해 방법을 디테일 하게 묘사한 사건 일지, 소설 중간에 뜬금없이 삽입된 것처럼 느껴지는 일본 전통 시들, 소설의 말미의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당신은 사건의 진상을 절대 파악하지 못할’거라는 ‘도발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에 대한 상식과 그 궤를 매우 달리합니다.
또한 전통 장르 문학의 기법을 벗어나서 독창적이다 못해 파격적이기까지 한 ‘막 나가는’ 세계관과 스토리, 쉴 틈없이 나오는 언어유희와 고난이도의 암호 해독, 격투 게임 캐릭터처럼 추리와 관련된 낯간지러운 이름의 ‘고유 스킬’을 가지고 있는 주요 등장인물들-예컨대, 전화로 여러 사건들을 동시에 해결하는 ‘전화 탐정’, 사건 해결에 필요한 데이터가 모두 취합 되면 즉시 진상을 깨닫는 ‘신통이기’, 객관적인 데이터와 통계로 추리하는 ‘통계탐정’, 잠재의식 탐구를 통한 하늘의 계시를 받는 ‘잠탐추리’-등은 이런 류의 소설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건의 해결’만큼은 명확하다는 사실입니다.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결말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어떤 트릭이 사용되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각양각색의 밀실사건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만큼은 모든 독자가 합심하여 ‘유레카’를 외칠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1천 페이지를 읽은 수고에 대한 보상, 넘쳐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일본에서 환생한 제임스 조이스가 쓴 ‘라이트노벨 버전 피네간의 경야’와도 같은 이 소설, 읽어보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은 절판되어 도서관 대여를 통해서만 보실 수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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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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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는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p. 88)

‘나는 살아남았다. ‘그는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과거, 조 헌트 영감에게 내가 넉살좋게 단언한 것과 달리,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p .101)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토니가’. 나는 안다. 이제는 바꿀 수도, 만회할 수도 없음을. (p.254)

<우리의 기억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야기의 배경은 1960년대 영국입니다.

주인공 토니는 1960년대 영국의 남학생인데, 같은 학교 두 명과 절친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나이대에 흔한,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따위의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지적 허영심이 가득한 무리였죠.

그러다 전학생 ‘에이드리언’이 패거리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진짜배기 천재였고, 주인공을 포함한 모두가 그를 부러워하고 인정했습니다.

학창 시절과 그들의 허세가 함께 끝나고,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갔습니다.

성적이 우수했던 에이드리언은 케임브리지 대학생이 되었죠.

토니는 대학교에서 여친 베로니카를 사귀게 되고,
외딴곳에 있는 그녀의 집에 초대받아 여친의 가족과의 어색한 주말을 보냅니다.

토니에 대한 가족의 태도는 결코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지만, 토니는 잘 대응합니다.

이후 토니와 베로니카는 섹스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다툼 후 헤어짐이라는 흔한 연인관계의 결말을 맞이하고,
몇 년 후 토니는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베로니카와 사귀어도 되냐는 편지를 받습니다.

토니는 상처받았지만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둘을 인생에서 지워버리죠.

그러던 어느날 토니는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유서에 ‘자유인은 자신의 삶의 본질을 탐구할 철학적 의무가 있으며, 또한 그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적었고, 토니는 그의 결단에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어드넛 토니는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아이 하나를 낳고 노인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인생이었습니다. 죽은 베로니카의 어머니로부터 현금 500파운드와 두 개의 문서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 문서는 하나는 그녀의 토니에 대한 사죄의 편지, 다른 하나는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이었습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일평생 단 한번 만났던 딸의 남자친구에게 이런 유산을 남긴 걸까요?

토니는 필사적으로 과거를 되새김질하고, 결국 베로니카와 만날 결심을 합니다.

토니의 일생은 그의 회고와 달리 무언가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어제 먹은 점심 메뉴도 노력하지 않으면 정확히 떠올리지 못하는 인간의 기억은 얼마나 거짓되고 왜곡되기 쉬운지 잘 알 수 있는 소설입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충격적인 반전과 묵직한 울림이 있는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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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류 인구
엘리자베스 문 지음, 강선재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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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는 한숨을 쉬고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천천히 떨어졌다. 이 사람들이 괴동물들만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그를 이해하는 일에 괴동물들보다 관심이 적다는 것이다.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아요.” 오필리아는 강조하는 뜻으로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이들은 어차피 자기들 마음대로 결론을 내릴 거고, 오필리아는 거기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터였다.  (p .419)

오필리아는 걱정하지 않았다. 가끔 30년 뒤 머나먼 곳에서 로사라와 바르토가 극저온 수면에서 깨어났을 때, 그에 관한 어떤 비전의 이야기를 듣게 될지 궁금해하기는 했다. 수송 중에 죽었다고 듣게 될까….. 아니면 이곳에 남아 유명해졌다고 알게 될까? 어느 쪽이든 유쾌한 농담이었다. 그는 한때 계획했던 대로 혼자 죽지는 못했지만, 웃음 지으며 죽었다. (p. 493)

오필리아는 근미래의 인류 기업이 우주 이곳저곳에 개발한 콜로니 중 하나에 젊었을 때 이주하였고, 행복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남편과 자식의 상실을 버티고, 남은 자식을 헌신적으로 키워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소박하지만 평생을 살아 정이 든 집과 정원을 관리하며 평온한 죽음을 맞을 당연한 권리가-사랑하지만 무능력하고 밉살맞은 아들과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확실한 며느리와 함께라고는 하지만-있었습니다. 콜로니 관리 기업이 사업권을 잃게 되어 새로운 행성으로의 이주 계획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젊지 않고, 남성이 아니며 출산을 하지 못하는 자신은 이주할 때 오히려 비용을 내야 하며, 늙었기 때문에 이주 중에 들어가야 하는 극저온 탱크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아주 조금은 자식-어머니를 사랑하지만 함께 이주하기 위한 비용 부담을 걱정하는-을 위해,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꺼이 잔류 인구가 되어 평생을 살았던 콜로니에서 생을 마감하겠다고 마음먹고, 이 계획을 실행하게 됩니다. 그는 혼자 누리기에 충분한 자원과 시설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마음 내키는 대로 행복하게 삶을 즐깁니다. 외롭고 무서울 법도 한데 말이죠. 그런데, 오로지 자신만 사는 것으로 알고 있던 콜로니는 사실 이전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지성체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 자생종은 인류가 떠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오필리아가 홀로 살고 있는 콜로니로 접근합니다.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죽음을 맞기로 결심한 오필리아에게 찾아온 뜻밖의 손님을 맞게 된 오필리아. 그녀의 잔류인생은 과연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요?

소설을 만들고자 하는 이에게 ‘SF’는 정말이지 훌륭한 도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전개나 상황 등을 통해 서사의 긴장감을 극대화 시켜 주거든요. 예를 들면 현실에서는 기껏해야 몇 십년 사이의 이별 또는 재회만이 가능하지만, SF에서는 이 간극을 수천년, 아니 수십만 년까지 벌릴 수 있습니다. 요지는 비극은 더 슬프게, 희극은 더 기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만약 주인공이 현실 지구의 오필리아라면 그의 자유를 향한 강한 의지는 정말로 큰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행동이란 고작해야 가출 후 아무도 모르는 곳에 혼자 사는 것뿐이었을 테니까요. 그마저도 같은 인간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 말이죠. 그러나 잔류 인구의 오필리아는 진정하게 홀로, 자유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정도 스토리만 되도 진취적인 여성상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데, 거기에 지성을 가진 외계 종족과의 만남도 모자라, 그들과 진정으로 교감하여 인류의 성공적인 퍼스트 컨택트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는 영광까지 누라다니. 이게 바로 진정한 페미니즘이자 남성들까지도 우러러 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진정한 히로인이죠.

또다른 위대한 SF 작가, 모두가 SF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면 그 첫번째가 될 것이라 말한 어슐러 K. 르 귄이 오필리아를 ‘SF 소설계가 이제껏 알고 있던 여성 히로인 가운데 가장 그럴듯하다라고 극찬했다는 말로 이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70대 여성 노인의 일대기, 어서 만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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